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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Now, let us see,
“What is the meaning of the Four Woeful States?”
47) 이제 다음 질문을 봅시다.
“네 가지 비참한 상태(사악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THE FIRST OF the Four Woeful States is hell. Hell is anxiety (in Thai, literally “a hot heart”). Whenever one experiences anxiety, burning, and scorching, one is simultaneously reborn as a creature of hell. It is a spontaneous rebirth, a mental rebirth. Although the body physically inhabits the human realm, as soon as anxiety arises the mind falls into hell. Anxiety about possible loss of prestige and fame, anxiety of any sort - that is hell.
네 가지 비참한 상태의 첫 번째는 지옥입니다.
지옥은 근심(태국어로 문어적 의미는 “뜨거운 마음‘)입니다.
근심, 성냄, 헐뜯음을 경험할 때마다 동시에 지옥의 존재로 재탄생합니다.
이것은 자연히 일어나는 재탄생이며, 정신적 재탄생입니다.
몸은 비록 물리적으로 인간계에 거주하지만, 근심이 일어나자 마자 마음은 지옥계로 떨어집니다.
명성과 명예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근심이나 어떤 종류의 근심이 있든지 그것이 지옥입니다.
Now rebirth in the realm of beasts is stupidity. Whenever one is inexcusably stupid about something: stupid in not knowing that Dhamma and nibbāna are desirable, stupid in not daring to come into contact with or get close to Buddhism, stupid in believing that if one became interested in Dhamma or Buddhism it would make one old-fashioned and odd. That is how children see it, and their parents too. They try to pull back and move far away from Dhamma and religion. This is stupidity. Regardless of what sort of stupidity it is, it amounts to rebirth as an animal. As soon as stupidity arises and overwhelms one, one becomes an animal. One is a beast by spontaneous rebirth, by mental rebirth. This is the second Woeful State.
(두 번째의 비참한 상태인) 축생계에 재탄생하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을 때마다 축생계에 재탄생합니다.
담마와 닙바나(열반)를 바람직한 것으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불교에 접하거나 가까이 함에 대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담마나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 구식이고 별난 것으로 믿는 어리석음 등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불교를 이렇게 (어리석게)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담마와 종교에서 물러나 멀어지고자 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어리석음이든지 어리석음은 동물로 재탄생하게 합니다.
어리석음이 일어나 압도하자마자 동물이 됩니다.
자연적인 재탄생, 정신적인 재탄생에 의해 동물이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비참한 상태입니다.
The third Woeful State is the condition of a peta, a ghost that is chronically hungry because his desires continually outrun the supply of goods. It is a chronic mental hunger which a person suffers from, not hunger for bodily food. For instance, one wants to get a thousand baht. Then having just got the thousand baht, one suddenly wants to get ten thousand baht. Having just got the ten thousand baht, one suddenly wants to get a hundred thousand baht. No sooner has one got the hundred thousand baht, it’s a million baht that one wants, or a hundred million. It is a case of chasing and never catching. One has all the symptoms of chronic hun ger. One further resembles a hungry ghost in having a stomach as big as a mountain and a mouth as small as a needle's eye. The intake is never sufficient for the hunger, so one is all the time a peta. The peta's direct opposite is the person who, on getting ten satang *, is content with getting just the ten satang, or on getting twenty satang is content with twenty. But don't get the idea that being
easily satisfied like this means one falls into decline and stops looking for things. Intelligence tells one what has to be done, and one goes about doing it the right way. In this way, one is filled to satisfaction every time one goes after something. One enjoys the seeking and then is satisfied. This is how to live without being a peta, that is, without being chronically hungry. Going after something with craving constitutes being a pepa. Going after something inteligently is not craving: then one is not a peta; one is simply doing what has to be done.
세 번째 비참한 상태는, 갈망이 항상 물건의 공급 범위를 넘어 앞지르기 때문에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귀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몸에 필요한 음식이 부족한 배고픔이 아니라, 고통받는 만성적인 정신적 굶주림입니다.
예를 들면, 1천 바트(baht, 역주-태국의 화폐단위)를 갖고 싶어, 1천 바트를 가지자마자 1만 바트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1만 바트를 가지자마자 10만 바트를 갖고 싶어 합니다.
10만 바트를 가지자마자 100만 바트 또는 1억 바트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추구하기 때문에 결코 원하는 것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확실히 만성적 굶주림의 증상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위장은 산만큼 크고 입은 바늘구멍만큼 작은 ‘허기진 유령(아귀)’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를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자는 항상 아귀입니다.
아귀의 반대는 10 사트앙(1 바트는 100 사트앙)을 가지면 단지 10 사트앙에 만족하고 20 사트앙을 가지면 단지 20 사트앙에 만족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쉽게 이와 같이 만족하면 열의가 저하하여 어떤 것도 구하지 않게 된다는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지혜는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므로, 일을 바르게 열심히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자는 어떤 것을 추구할 때마다 만족으로 가득합니다.
따라서 즐겁게 구하고 만족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귀가 되지 않고, 즉 만성적인 허기짐이 없이 사는 방법입니다.
어떤 것을 갈망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지혜롭게 추구하는 것은 갈망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아귀가 아닙니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Thus, a wish such as the wish to extinguish suffering is not craving. Don't go telling people the wrong thing, spreading the word that mere wishing is craving or greed. To be craving or greed it must be a wish stemming from stupidity. The wish to attain nibbana is a craving, if pursued with foolishness, infatuation, and pride. Going for lessons in insight meditation without knowing what it is all about is craving and greed; it is ignorance that leads to suffering because it is full of grasping and clinging. However, if a person wishes to attain nibbana, after clearly and
intelligently perceiving suffering and the means whereby it can be extinguished, and in this frame of mind steadily and earnestly learns about insight meditation in the right way, then such a wish to attain nibb.na is not craving, and it is not suffering. So wishing is not necessarily always craving. It all depends on where it has its origin. If it stems from ignorance or the defilements, the symptoms will be similar to those of chronic hunger that chasing without ever catching. We speak of this chronically hungry condition as spontaneous rebirth as a hungry ghost (peta).
따라서 고(둑카)를 소멸시키고자 원하는 것과 같은 원함은 갈망이 아닙니다.
단순히 바라는 것도 갈망 또는 탐욕이라는 말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지 말기 바랍니다.
갈망 또는 탐욕이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원함이어야 합니다.
닙바나를 얻고자 하는 원함이 어리석음, 홀려 있기 및 자만으로 추구된다면 갈망입니다.
통찰명상이 무엇인지 전부 알지도 않고 명상코스에 참가하는 것은 갈망이고 탐욕입니다.
이것은 움켜쥠과 집착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고(둑카)로 이끄는 무지입니다.
그러나 고(둑카)와 그것이 소멸될 수 있는 수단을 분명하게 이성적으로 인지한 후, 닙바나(열반)를 얻고자 한다면,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꾸준히 열의를 가지고 바른 방법으로 통찰명상에 대해 배웁니다.
그러면 닙바나(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그런 원함은 갈망이 아니며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함이 반드시 항상 갈망은 아닙니다.
원함은 모두 그 근원에 따라 갈망일 수도 있고 갈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함이 어리석음이나 오염원에서 생긴다면 그 징후는 충족될 수 없는 추구를 하는 만성적인 허기짐과 유사할 것입니다.
이 만성적으로 허기진 상태를 '아귀로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탄생'이라 합니다.
The last Woeful State is the realm of the asuras (cowardly demons). First to explain the word asura: sura means "brave", a means "not", thus asura means "not brave" or "cowardly". Take it that whenever one is cowardly without reason, one has been spontaneously reborn an asura. Being afraid of harmless little lizards, millipedes, or earthworms is unjustified fear and a form of suffering. To be afraid unnecessarily, or to be afraid of something as a result of pondering too much on it, is to be reborn as an asura. We all fear death, but our fear is made a hundred or a thousand times greater by our own exaggeration of the danger. Fear torments a person all the time. He is afraid of falling into hell and in so doing becomes an asura. Thus he is actually falling into the Four Woeful States every day, day after day, month after month, year in and year out. If we act rightly and don't fall into these Woeful States now, we can be sure that after dying we shall not fall into the Woeful States depicted on temple walls.
마지막으로 비참한 상태는 아수라(겁 많은 악귀)계입니다.
먼저 아수라(asura)란 말을 설명해 보면, 수라(sura)는 '대담함'을 나타내고 아(a)는 부정을 나타내므로, 아수라(asura)는 '대담하지 못함', '겁 많음'을 의미합니다.
이유없이 겁날 때마다 그 상태에 빠지면, '아수라'로 자연히 재탄생한 것입니다.
해롭지 않은 작은 도마뱀이나 노래기나 벌레를 두려워하는 것은 이유없는 두려움이며 고(둑카)의 한 형태입니다.
불필요하게 두려워하거나 과도하게 숙고한 결과로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수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이 두려움은 위험을 1백 배 또는 1천 배로 과장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사람을 괴롭힙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렇게 두려워함으로 인해 아수라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매일, 매달, 매년 연중 내내 실제로 네 가지 비참한 상태(사악처)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행동하여 지금 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면, 사원(절)의 벽에 그려져 있는 악처로 죽음 후에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This interpretation of the Woeful States agrees in meaning and purpose with what the Buddha taught. These sorts of false belief regarding the Four Woeful States should be recognized as superstition. The most pitiable thing about Buddhists is the inaccurate way we interpret the teaching of the Buddha and the stupid way we put it into practice. There's no need to go looking for superstition in other places. In the texts there are references to people imitating the behaviour of cows and dogs; these were practices current in India at the time of the Buddha. There is no more of that these days, but behaviour does exist now which is just as foolish and much more undersirable. So give up all this superstition and enter the Stream of Nibbana. To give up belief in a permanent ego-entity, to give up doubt, and to give up superstition is to enter the Stream of Nibbana and have the Dhamma-eye the eye that sees Dhamma and is free of delusion and ignorance.
비참한 상태(악처)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하면, 붓다께서 가르치신 의미와 목적에 부합합니다.
네 가지 비참한 상태(사악처)에 대한 이러한 부류의 잘못된 믿음을 (습관적) 미신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불교인에게 가장 불쌍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고 어리석은 길을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미신을 찾으려고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경전에 보면 소와 개가 행동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예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붓다 시대에 인도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실천)수행의 하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실천)수행이 더 없지만, 그와 같이 어리석고 훨씬 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들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습관적) 미신을 버리고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 가십시오.
영원한 자아 실재가 있다는 믿음과, 의심과, (습관적) 미신을 버리는 것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는 것이고, '담마를 보는 눈(법안)'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로서, 미혹과 무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Bear in mind that in us worldlings there is always a certain measure of ignorance and delusion in the form of ego-belief, doubt, and superstition. We must move up a step and break free of these three kinds of stupidity in order to enter the Stream of Nibbana. From that point on there is a flowing downhill, a convenient sloping down towards nibb.na, like a large stone rolling down a mountain-side. If you are to become acquainted with nibb.na and the Stream of Nibb.na, if you are to practise towards attaining nibb.na, then you must understand that these three kinds of delusion and stupidity must be given up before one can give up sensual desire and ill-will, which are fetters of a higher and more subtle order. Simply giving up these three forms of ignorance constitutes entering the Stream of Nibb.na. To completely give up self-centredness, hesitancy in pinpointing one's life objective, and ingrained superstitious behaviour is to enter the Stream of Nibb.na. You can see that this kind of giving up is universally valuable and applicable to every person in the world. These three forms of ignorance are undersirable, Just as soon as a person has succeeded in giving them up he becomes an ariyan, a Noble One. Prior to this he is a fool, a deluded person, a lowly worldling, not at all an ariyan. When one has improved and progressed to the highest level of worldling, one must advance still further, until one reaches the stage where there is nowhere to go except enter the Stream of Nibbāna by becoming a sotapanna. Then one continues to progress and flow on to nibbāna itself.
우리 내부세계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미혹과 무지가 '영원한 자아실재가 있다는 믿음'과 '의심'과 '습관적 미신'의 형태로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단계 올라서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닙바나 흐름(예류)의 단계부터는 내리막길이며, 마치 큰 돌이 산 아래로 굴려 내려가는 것과 같이 닙바나(열반)를 향해 쉽게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습니다.
닙바나(열반)와 닙바나 흐름(예류)에 가까워지고 닙바나(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수행)하고자 한다면, 감각적 욕망과 악의를 버릴 수 있기 전에 이 세 가지 종류의 미혹과 어리석음(무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더 높고 미묘한 상태의 족쇄입니다.
단지 이 세 가지 형태의 무지를 버리기만 하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 중심과, 삶의 목적을 정하지 못하는 망설임과, 깊이 새겨진 미신 행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종류의 버림은 보편적인 가치가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무지는 바람직하지 못하며, 사람이 이 무지를 버리는데 성공하자마자 바로 아리얀, 즉 성자가 됩니다.
이 무지를 버리기 전에는 바보이고 미혹된 자이고 세속인이며, 전혀 아리얀(성자)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속의 가장 높은 단계로 향상되고 진보되었을 때는, 소따빤나(예류자)가 되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는 것 외에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 진보되어 닙바나(열반)로 흘러가게 됩니다.
The practice that leads away from grasping, self-centredness, and delusion is to observe all things as unworthy of being grasped at or clung to. This results in the eradication of hesitancy, blind grasping, and self-centredness. So we ought to start taking an interest in non-attachment right this very minute, each of us at the level most appropriate for us. If you fail in an examination there is no need to weep. Determine to start again and do your best. If you pass an examination you should not become carried away; you should realize that this is the normal way of things. This will then mean that there has arisen some understanding of non-grasping and non-clinging.
집착과, 자기 중심과, 미혹에서 멀어지는 실천(수행)은 모든 것을 움켜쥐거나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망설임과 맹목적인 움켜쥠과 자기 중심을 제거하는 결과에 귀착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무집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각자는 이 순간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단계에 있습니다.
시험에 실패하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결심을 하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시험을 통과하면 흥분하여 즐거워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만물의 정상적인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에 움켜쥐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When you are sitting for an examination, you should forget about yourself. Take good note of this! When starting to write an examination answer, you should forget about being yourself. Forget about the “me” who is being examined and who will pass or fail. You may think beforehand of how to go about passing the examination and plan accordingly, but as soon as you start to write, you must forget all that. Leave only concentration, which will pierce through the questions and seek out the answers. A mind free of any “me” or “mine” who will pass or fail immediately comes up agile and clean. It remembers immediately and thinks keenly. So sitting for an examination with proper concentration will produce good results. This is how to apply cit waang (a mind free of the self-illusion), or Buddhist non-grasping and non-clinging, when sitting for examinations. In this way you will get good results.
시험을 치기 위해 앉아 있을 때에는, 자신에 대해 잊어야 합니다.
이 말을 잘 새기십시오!
시험 답을 쓰기 시작할 때는 자신을 잊어야 합니다.
지금 시험을 보고 있으며 시험을 통과하거나 통과하지 못하게 될 '나'를 잊으십시오.
시험 통과와 그에 따른 계획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답안을 쓰기 시작하면 그 모든 것을 잊어야 합니다.
단지 집중하기만 하여 문제를 꿰뚫어보고 답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시험을 통과하거나 통과하지 못하게 될 어떠한 '나' 또는 '내 것'에서 해방된 마음이 즉시 나타나서 기민하고 능숙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즉각적으로 (답)을 기억해 내고 예민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집중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을 볼 때 �왕(자아 환영에서 해방된 마음), 또는 불교도의 '움켜쥐지 않음'과 '집착하지 않음'을 적용하는 방법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Those who don’t know how to make use of this technique always feel anxious about failing. They become so nervous that they are unable to call to mind what they have learned. They can not write accurate and orderly answers. Consequently they fail thoroughly. Others become carried away by the idea that “I am brilliant, I am certain to pass.” A student carried away by this sort of grasping and clinging is also bound to do poorly, because he lacks cit waang. On the other hand, for the “person” with cit waang there is no “me” or “mine” involved, so he cannot become panicky or over-confident. There remains only concentration, which is a natural power. Entirely forgetting about self, he can pass well. This is an elementary, most basic example of the effect of non-attachment and of cit waang.
이 기술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는 학생은 항상 실패에 대해 근심합니다.
이런 학생은 초조한 마음이 되어 배운 것을 기억해 낼 수 없으며, 정확하고 바르게 답안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완전히 (시험에) 실패합니다.
한편 '나는 우수하다', '나는 확실히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빠진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움켜쥠과 집착에 빠진 학생들도 '�왕'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나쁜 결과를 얻게 됩니다.
반면에 '�왕'이 있는 학생은 '나' 또는 '내 것'이 개입되어 있지 않으므로 겁에 질리거나 자만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자연적 능력(힘)인 집중 만이 있습니다.
자아에 대해 완전히 잊었으므로 시험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집착과 �왕의 효과에 대한 초보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예입니다.
Now a stupid and deluded person, as soon as he hears the word suññata mentioned in temple lecture halls, translates it as “utter emptiness or nothingness”. That is the materialistic interpretation and is how certain groups of people understand it. The suñnñnata of the Buddha means absence of anything that we should grasp at and cling to as being an abiding entity or self, although physically everything is there in its entirety. If we cling, there is dukkha; if we do not cling, there is freedom from dukkha. The world is described as empty because there is nothing whatsoever that we might have a right to grasp at. We must cope with this empty world with a mind that does not cling. If we want something, we must go after it with a mind free from grasping, so that we get the desired object without it becoming a source of suffering.
현재 어리석고 미혹에 빠진 사람은 사원의 강당에서 언급하는 '순냐따(빔, 空)'란 말을 듣자마자 이것을 '완전한 텅빔' 또는 아무것도 없음'으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유물론적인 해석이고 어떤 집단에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순냐따(빔, 空)' 는 비록 물질적으로 모든 것이 고스란히 거기에 있지만, 내재하는 실체 또는 자아가 있는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할 만한 것은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착하면 고(둑카)가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고(둑카)에서 해방이 있습니다.
세상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움켜질 권리를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 빈 세상에 대처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원할 때는, 고(둑카)의 근원이 되지 않으면서 원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집착에서 해방된 마음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Misunderstanding the word “empty”, just this one single word, is a great superstition (sīlappata-parāmāsa) and constitutes a major obstacle to people attaining the Stream of Nibbāna. So let us understand the word “empty”, and all other words used by the Buddha, properly and completely. He described the world as empty because there is nothing in it which can be taken as a self or ego. He answered King Mogha’s question by saying, “Always regard
the world as something empty. Always look on this world with all that it contains as something empty.” Viewing it as empty, the mind automatically becomes free of grasping and clinging. There can not arise lust, hatred, and delusion. To succeed in doing this is to be an arahant. If one has not succeeded in doing it, one has to keep on trying; though still an ordinary worldling, one will have less suffering. No suffering arises as long as there is cit waang. Whenever one becomes carried away and lapses, there is suffering again. If we keep good watch, producing emptiness (of self-idea) more and more often and lastingly, we come to penetrate to the core of Buddhism, and come to know the Stream of Nibbāna.
'빔(空)' 이라는 바로 이 한 단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중대한 미신(실랍빠따 빠라마사)이고, 사람들이 '닙바나 흐름(예류)'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빔(空)'이란 말과 붓다께서 사용하신 모든 다른 말을 바르고 완전하게 이해합시다.
붓다께서는 '자아' 또는 '에고'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세상이 비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모가 왕'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항상 세상을 빈 것으로 여기십시오.
세상이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 세상을 빈 것으로 바라보십시오."
세상을 빈 것으로 보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움켜쥠과 집착에서 해방됩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실천을 완성하면 아라한이 됩니다.
이 실천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이 실천을 하면 아직 보통의 세속인이지만 고(둑카)를 덜 받을 것입니다.
'�왕'이 있는 한, 어떤 고(둑카)도 생기지 않습니다.
(세상에) 빠져 정도를 벗어나면 다시 고(둑카)가 생깁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자아 개념에서) '빔'을 점점 더 자주, 오랫동안 생성하면 (마침내) 불교의 핵심을 꿰뚫어 닙바나 흐름(예류)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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