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수님 앞에 서서 주님께 한 가지만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님,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묻고 싶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은 ‘어떤 주식이 가망이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비결을, 업종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할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
주님의 제자들은 알고 싶은 것이 하나 둘이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제자들은 기도에 대한 갈증, 기도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주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무엇을 기도하실까? 기도는 왜 하실까? 기도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여러가지 의문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일까요?
E.M 바운즈라는 작가는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자가 가장 강한 자다”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자주 좌절하는가. 그 이유는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수많은 교회 봉사자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하는가. 그 이유는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실패의 요인이 은밀한 기도의 결핍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중요시해야 할 일 중에 기도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없는데도 기도보다 더 무시되고 있는 것 또한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도의 실천을 ‘피곤케 하는 종교의식’쯤으로 간주함으로써 기도를 최대한 축소시키는 일에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저자는 계속하여 이렇게 충고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수도 있고, 장시간 성경공부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열렬하며 진실하며 흡족할 만큼 전도와 개인적인 교제에 힘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깊은 기도가 없는 한 진정한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건과 일들이 사실 기도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느냐에 따라 사건과 일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예수님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우리가 외워서 기도하고 있는 주 기도문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주님께서는 기도의 표본을 제시하십니다. 기도에는 어떤 진정한 정신과 어떤 내용이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 시험에 들지 않게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일상에 필요에 위해서 주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기도의 첫머리에서 기도에서 가장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버지’라는 명칭입니다.주기도문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져야 할 나라는 나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뜻은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뜻과 나의 영광과 나의 나라가 확립되는 것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과 그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면 어릴 적에 마트에 가면 아이는 보이는 대로,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에 가기가 겁이 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면 부모가 사줄 수 있는 것을 분별합니다. 나아가 무엇을 사달라고 하면 부모가 기쁘게 흔쾌히 사줄지를 고민하며 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성장해 가면 주님 앞에서 기도할 때도 내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기뻐하시는 지를 헤아리면서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바로 아버지의 말씀, 그의 아들의 가르침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고 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따라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나라와 영광 그리고 그 뜻을 추구하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데, 5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밤 중에 떡을 빌리러 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밤 중에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 손님이 지치고 굶주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밤 중에 먹걸이를 차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집에는 대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꼭 대접해야 하는데 먹을 음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는 다 잠들은 야심한 밤입니다.
이러한 때에 집주인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찾아온 친구를 위해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자정이 넘은 한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떡을 빌러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서 생겨났을까요? 바로 관계성에서 옵니다. 친구이기에 …. “내가 부탁하면 친구가 어떻게 안 들어 줄 수가 있겠는가?”라는 친구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바로 친구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13절에 더 깊은 관계성을 말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3)
이제 친구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부자관계)로 넘어갑니다. 자식은 아들이기에 아버지를 믿고 신뢰합니다. 그리고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담대하게 요청합니다. “아버지, 이것 좀 해주세요. 저것 좀 해주세요”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아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을 바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한 밤중과 같은 때에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비유 속에 나오는 집 주인처럼 우리의 친구요, 아버지가 되시는 주님께 노크(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위기가 생겼다고 이럴 때만 기도하는 것이 얌체 같아서 아예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아주 체면을 차릴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체면을 차리면 더욱더 비참하게 될 뿐입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전남 화순에 박영식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나이 쉰이 넘어서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인데 예수 믿고 나니까 너무나 좋고 기뻐서 뭔가 사역을 하고 싶은데 초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는 신학을 공부할 수가 없어 교회 없는 전라남도 화순의 산골짝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순회 전도를 했습니다. 믿는 자가 생기면 교회를 세워서 정식 사역자에게 세우도록 하고는 자신은 다른 곳에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분은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전도하지만 우상에 절어 있는 동네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도 어지간해서는 씨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남다른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어느 동네에 들어가 방 한 칸을 얻어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밤중에 그 동네의 젊은 새댁이 아기를 낳느라 진통을 하는데 아기가 나올 기미가 안 보이고 산모는 곧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캄캄한 밤 중에 차도 없이 이 산골에서 광주 시내까지 나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동네 사람들이 이 전도사님 숙소에 와서 사정을 하더랍니다.
우리 동네 젊은 새댁이 아이를 낳다가 다 죽게 되었으니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께 기도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지금 산고를 치르고 있는 옆방으로 와서 기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산모가 어찌나 비명을 지르던지, 비명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겁이 납니다. 기도해서 산모가 살면 복음도 전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산모가 죽기라도 한다면 몰매를 맞고 쫓겨날 텐데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재미있게도 기도하면서 이런 찬송가 가사(343장)가 생각나더랍니다. 그래서 찬송을 불렸습니다.
‘울어도 못하네’(아무리 배가 아파 문꼬리 잡고 울어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아무리 배를 움겨잡고 참아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아무리 이를 악물고 애써도 못하네)
그런데 ‘믿으면 하겠네’라고 부르는 순간 “응애”하고 아기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이 큰 확신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야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게 위대한 것이로구나”하는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얼마나 믿고 기도합니까? ‘들어 주시면 좋고, 안들어 주어도 그만이다’라는 식으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한 밤중에 친구에게 달려가 떡을 달라고 할 정도의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아버지께 기도해 보아라”
2. 지속적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본문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작정이라도 하고 간 것처럼, 친구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집요함에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8).
친구 사이에 체면 불구하고 강청할 수 있다면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께는 무엇을 구하더라고 떼를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웃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식으로서 체면 생각하지 않고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떤 사항을 되풀이 하는 것은 상대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거나 성가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우리가 기도를 되풀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으로, 혹은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한 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절대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챙겨 주신다고 생각하여. 같은 기도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런데 이 기도를 한 번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되풀이 기도한다고, 오늘 하고, 내일 한다고 중언부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중언부언의 기도란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란 마음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되풀이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기도는 주님이 들어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 기도할 때에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아닙니까? 이것은 그냥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하여 구하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점층적인 강청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제가 섬겼던 모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던 연로하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그만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들어갔습니다. 가망이 없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때 제가 전도사였는데 새벽 기도회가 가면 그 어머니 권사님께서 새벽제단 맨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들 살려주이소” “아들 살려주이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삼일이 갑니다. 연로하신 권사님이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판이었습니다. 저러다가 아들보다 권사님이 먼저 가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끈질기에 부르짖을 때에 아들 집사님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퇴원하여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숨은 쉬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힘들고 지칠수록 오히려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망하는 사람을 보면 100%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 기도하기를 도중하차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도 억울한 과부의 비유를 들면서 기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든든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끝까지 기도하지 않고 도중에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응답이 오다가 말아 버립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와 영광 그리고 그 뜻을 위하여 기도의 제목을 세우고 믿음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