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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택배, 자동차…합리적인 선택의 산물
그 대가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열탕지구'
쫌 불편하면 어때, 조금 먹고 조금 싸면 되지
서서히 삶아지는 냄비 속 개구리 신세보다 낫지
버스, 지하철을 타거나 도심 길거리를 걷다 보면 작은 손선풍기를 들고 얼굴에 바람을 쐬는 이들을 본다. 이 찜통더위에 ‘오죽하면’ 싶기도 하고, 과거에 비하면 ‘온갖 게 다 나오네’ 싶기도 한데, 마음 한 켠에선 안타까움이 치솟는다.
한편, 이번 추석 명절에도 전국적 이동 인구가 많았다. 한국교통연구원과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의 총 이동 인구는 약 3700만 명으로 예상되었고, 하루 평균 약 600만 명 이상이었다. 버스나 기차 등 대중교통도 많이 이용하지만 자동차 이용 역시 많았다. 추석 당일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동차 이동 시간은 평소의 두 배인 9.5시간으로 예상됐는데, 실제로는 10~11시간 걸렸다.
또, 평소는 물론 명절 같은 때가 오면 택배 이용이 많다. 문 앞까지 배달해 주기에 매우 편리하다. 택배를 보내는 사람은 예전처럼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할 필요가 없어 일이 간편해진 면도 있다.
뭐 특별한 것도 아닌 일상사를 몇 가지 들추는 까닭은, 이러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본의 아니게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비합리성의 충돌이다. 왜 그런가?
‘6차 대멸종’을 예고하는 손선풍기, 자동차, 택배의 편리함
손선풍기를 들고 다니면 당장은 시원한데, 계속해서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다. 전기가 계속 든다. 이제는 집집마다 필수품처럼 되어버린 선풍기, 에어컨, 제습기, 공기 정화기, 식기 세척기, 냉장고, 냉동고, 김치냉장고, 스타일러, 심지어 AI(…) 역시 마찬가지다. 온갖 가전제품 목록이 길어질수록 전기가 모자라 핵발전소 추진 세력이 힘을 얻는다. 한편, 가전제품 부품은 대부분 플라스틱이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매 주일 신용카드 1장 정도의 미세플라스틱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주변 어디를 둘러 봐도 플라스틱이 안 들어간 게 별로 없다. 편리함의 대가다. 더 중요한 점은 아무리 선풍기, 에어컨, 제습기, 공기 정화기를 써도 이 찜통더위나 미세먼지의 역습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오히려 그렇게 개인들이 합리적 선택을 할수록 사회 전체, 지구 전체는 더 비합리적 방향으로 치닫는다. 핵은 ‘완벽한 죽음’의 표상이고, 이젠 기후위기를 넘어 ‘6차 대멸종’이 거듭 경고된다. 사라지는 벌과 멸종위기 종을 보시라.
자동차는 어떤가? 나 역시 예외가 아닌데, 집집마다 편리함, 신속함, 쾌적함, 익명성 등에 설득당해 자동차를 몬다. 개인의 자유롭고도 합리적인 선택! 그러나 많은 개인들이 합리적 선택을 해서 한꺼번에 거리로 나오면 본의 아니게 ‘교통 체증’과 ‘공기 오염’ 등 사회적 비합리성이 생긴다. 사회 전체적으로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 건강 폐해가 심해진다. 전국 곳곳에 자동차 도로를 만들고 확장하느라 산천을 파헤치고 논밭을 없애는 것은 단순한 낭비를 넘어, 건강한 살림살이의 토대 자체를 파괴하는 자살 행위이기도 하다. 또, 자동차 배기가스 속엔 대부분 수증기, 이산화탄소, 일산화탄소, 탄화수소, 질소산화물 등 온실가스가 많고 발암물질인 미세먼지도 나온다. 차가 달리면 타이어가 닳는데, 이게 초미세 가루가 되어 코와 폐로 침투한다.
편리한 택배 역시 비슷하다. 각자의 휴대폰이나 PC로 검색, 결제, 주문함으로써 전국 곳곳의 지인에게 선물 배달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하는 것은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다. 나 역시 그런 택배를 많이 보내기도, 받기도 한다. 어디건 택배차가 가가호호 방문하는 건 좋지만 배기가스를 온 동네에 뿜어댄다. 택배 포장을 뜯으면, 테이프가 지나치게 많고 박스 역시 양이 엄청나다. 때로는 플라스틱 소재도 많고 뽁뽁이나 비닐도 많다. 원룸 촌이 있는 동네를 지나다 보면 곳곳에 배달 음식이 남긴 쓰레기도 산더미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분리수거’를 잘 한다 해도 과연 이 넘쳐나는 쓰레기를 어디서 어떻게 처리할까 싶다. 생각할수록 정신이 아득하다. 그래서 아예 ‘생각’ 자체를 지운다. 편리의 대가는 이렇게 무겁고도 무섭다.
최대 명절 추석인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잠원 나들목에서 바라본 경부고속도로 서울 시내 구간이 이동하는 차량으로 혼잡한 모습이다. 현재 고속도로는 성묘객과 귀경객 등 이동하는 차량이 많아 곳곳 정체가 나타나고 있다. 2024.9.17. 연합뉴스
불편함 감수하고 나 개인의 합리성 포기하기가 첫 번째 해법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비합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논리적으로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사회적 비합리성을 초래하는 개인적 합리성을 절제하거나 포기하는 것, 둘째는 개인적 합리성이 유발하기 쉬운 사회적 비합리성을 교정하거나 예방하는 것, 셋째는 이 둘의 결합으로, 개인적 합리성에 조심스레 접근하면서도 사회적 합리성이 높은 대안을 찾는 것이다.
첫째 방법(사회적 비합리성을 초래하는 개인적 합리성을 절제하거나 포기하기)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찜통더위에 대한 (손)선풍기, 에어컨, 제습기, 공기청정기 같은 해법들은 전기도 많이 쓰고 플라스틱도 남용하며, 문제의 원인은 해결하지 못하면서 당장 나만 편하게 살려 하는 것이다. 선풍기나 에어컨 등은 지구 온난화(이제는, 지구 열탕화)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해법이다. 이는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문제를 개인적 상품 구매로 해결하려는 걸 일컫는다. “뒷일은 나 몰라!” 식 태도를 가진 자본 입장에서는 지구 온난화(열탕화)가 새 시장 개척의 기회다. 그러나 불행히도, 위 해법들은 에너지를 더 많이 쓰게 되고, 내 집 이외의 공간에 더 많은 열을 뿜어대며, 결과적으로 지구 열탕화(‘찜통 지구’)를 부채질한다. 처음엔 선풍기 하나만 해도 시원했지만, 나중엔 방마다 에어컨을 켜도 소용없는 때가 온다. 이런 연관성을 꿰뚫어본다면 우리는 ‘차라리’ 포기하거나 절제하는 식으로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불편함 혹 귀찮음을 감수하는 힘을 키우는 게 관건이다.
나의 경우, 이번 더위에도 일반 선풍기만 썼다. 에어컨이나 제습기, 공기청정기는 없다. 에어컨 없이 견디려 한다. 너무 더워 힘들 때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반신욕을 반복한다. 아침저녁으로 해가 약할 때 텃밭 일을 조금씩 하고 ‘차라리’ 땀을 흠뻑 흘리고 비누 없이 물 샤워만 해도 천국이다. 머리를 감고 말릴 때도 책받침이나 손부채를 쓴다. 땀에 쩔은 옷이나 수건, 양말은 샤워하면서 발로 철벅철벅 세탁한다. 손빨래 아닌, 발빨래! 세탁기는 한꺼번에 많이 할 때만 쓴다. 발빨래로 한 옷이나 수건을 강한 햇살에 말리면 까슬까슬해 좋다. 따끈따끈한 햇살이 태양광발전(3KW)으로 가정용 전기를 자급시켜 주고 빨래까지 말려 낸다.
무더위 속에서 지난 12일 오후 총수요 기준 최대전력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됐다.사진은 13일 오후 서울의 한 건물에 에어컨 실외기들이 작동하는 모습. 2024.8.13. 연합뉴스
“조금 먹고 조금 싸자!”로 사회적 비합리성 교정하기
두 번째 방법(개인적 합리성으로 인한 사회적 비합리성을 교정하거나 예방하기)은 앞서 말한 자동차의 예를 들면 쉬울 듯하다. 자동차 쏠림으로 인한 ‘교통체증’ 및 ‘공기 오염’을 줄이려면 맨 먼저 대중교통 내지 공공교통(버스, 철도, 전철)을 대폭 개선(요금, 전용차로, 서비스 등)하면 된다. 가능하면 그 에너지도 모두 청정재생가능에너지(RE100)로 전환하면 좋겠다. 동시에 안전한 자전거 도로와 샤워 시설까지 잘 만들어 통학이나 출퇴근 시에 자전거를 대폭 활용하게 한다. 또, 프랑스 파리나 덴마크 코펜하겐의 ‘15분 도시’ 내지 ‘컴팩트 도시’처럼 걷거나 자전거로 15분 이내에 중요한 볼일을 다 보게 도시계획을 다시 짠다. 인구 집중의 상징인 (서울 같은) 초거대도시보다 균형 잡힌 전원도시를 읍면 단위로 만들어 인구를 분산하는 것도 시급하다. 만일 명절 때의 차량 쏠림을 구조적으로 분산하려면 명절 연휴 기간을 (민주적 합의로) 최대한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결국 민주주의로 풀어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그만큼 성숙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택배나 포장 등으로 인한) 쓰레기 문제를 사회적 합리성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박스 테이프나 포장 재료를 자연소재로 만들도록 법제화하거나, 읍면 단위로 재활용센터를 크게 만들어 체계적으로 재활용률을 높이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소재를 처음부터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함과 동시에 대체물을 개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구 열탕화를 저지하기 위한 국가적, 세계적 노력을 전면 강화해야 한다. 6대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수소불화탄소, 과불화탄소, 육불화황)를 방출하는 모든 사업장과 가정이 더 이상 방출 못하게 ‘비상 대책’이 절박하다. 국회도 나서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비상상황에서 잠시나마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 보시라. “코로나 때 죽었던 ‘경제’를 걱정하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는 왜 하나? 생존과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경제는 과감히 버려야 산다! 인류의 집단 생존을 위해선 근대 이후 당연시해 온 편리함, 신속함, 있어 보임, 가성비, 이기심 등의 가치 대신 돌봄, 나눔, 아름다움, 버림, 어울림, 자유로움 등의 가치를 공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좋겠다. 이 모두, 사회적 합리성을 고양하는 밑거름이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조금 먹고 조금 싸자!” 그리하여 “모두 건강하게 살자!”
읍면에 살면서 발견한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조화
셋째는 개인적 합리성을 극도로 조심스레 접근하면서도 사회적 합리성이 높은 대안을 찾는 것인데, 앞서 말한 좋은 아이디어를 종합적으로 실천(조화)하면 된다. 흔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겠느냐, 사회가 변해야지…’ 하는데, 이는 반만 옳다. 개인과 사회가 ‘같이’ 변해야 하니까! 물론, 이 둘의 조화를 이루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자본주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것(탈자본)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될 일도 아니고 나만 깨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되 하나씩 깊어져야 한다.
나의 경우, 택배로 오는 박스들은 (테이프를 떼어내고) 납작하게 만들어 텃밭의 풀을 멀칭용으로 덮어주는 식으로 재활용한다. 비가 오거나 오래 되면 박스 종이들이 삭아서 흙으로 돌아간다. 또, 생태화장실에서 나오는 똥오줌을 분리해서 받아 잘 삭힌 뒤 텃밭에 거름으로 쓰는 것도 나의 비법이다. 개인적으로도 물과 전기를 절약해 좋지만, 사회적으로 수질 오염 예방과 흙 생태계 회복에도 좋다. 만일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이런 모델을 사회 전반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퇴직 이후 나와 아내는 굳이 도시 공간에 살 필요가 없어 읍면 지역으로 이사했다. 삶의 질이 높아 개인적 합리성에 걸맞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니 사회적 합리성도 높아진다. 빗물을 받아 텃밭에 재활용하고, 몇 가지 야채라도 자급하니 기분도 좋다. 지역에서 (돈 안 되는) 인문학 모임은 여럿 하지만, (돈 되는 일이라도) 대중교통이 닿지 않으면 절제하고 포기한다.
18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공공재활용센터에 추석 연휴 기간 나온 스티로폼이 가득 쌓여 있다. 2024.9.18. 연합뉴스
“사랑과 보살핌, 헌신과 희생”으로 지구에서 가족처럼 살기
얼마 전에 나는 <한겨레>에 ‘기후 산재’의 사례들을 고발하고 성찰하는 칼럼(“기후재앙과 죽음의 행렬”)을 썼는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도 ‘폭염노동 방지법’이 통과되었다 한다. 오는 26일 본회의 통과가 예상되는데, 때늦은 감이 있지만 사회적 합리성 차원에서 다행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조치는 8월 말 헌재가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기후소송’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2030년 이후에도 온실가스를 대폭 줄이기 위한 범국가적 비상조치를 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다시 고삐를 채우고 마침내 ‘탈자본’의 길을 열 방법은 없을까? 결코 쉽진 않지만, 이것만이 자본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길, 그리하여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충돌을 넘어서는 길이다. 이는 또한 근대의 계몽 철학이 낳은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식의 맹세를 해왔다. 알고 보면 조국도 민족도, 나아가 사회나 세계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되면 온갖 문제가 풀린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마치 <아빠의 바이올린>에서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 마히르가 아내 수나에게 고백하듯, “가족은 서로 다른 음으로 이뤄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서로 다른 음들이 조화를 이루려면 “사랑과 보살핌과 헌신과 희생”이 긴요하다.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충돌을 넘어, 사람과 지구가 한 가족으로 사는 길은 진정한 “사랑과 보살핌, 헌신과 희생”을 실천하는 것이다.
작은 고민은 소박한 해결의 시작이다. 더 깊고 체계적인 고민은 더 큰 해결의 문을 연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책임감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더 깊어지고 확장돼야 한다. 이런 고민과 실천의 사회적 축적이 없다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자멸할지 모른다. ‘나부터’ 귀찮음이나 불편함에 대한 감수력을 키우는 일과 동시에, 사회와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성찰적 합리성’(돌봄과 나눔)을 드높이고 실천하는 일이 매 순간 절실하게 느껴진다.
첫댓글 편리함의 대가는 무겁고 무섭다...
이 경고의 소리를 무시하면 큰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