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
1983년 10월 9일 아침, 버마(현재의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이 모셔져 있는 아웅산 묘지에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요동칠 만한 폭발이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은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불과 1.5 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이 폭발로 한국인 17명과 버마인 4명이 목숨을 잃고 부상자는 49명에 이르렀다.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 불과 수십 초 전에 찍은 당시 주요 관료들의 도열사진
왼쪽부터 이기백 합참의장(생존), 심상우 민정당 의원(사망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 함병춘
비서실장(사망), 이계철 버마대사(사망), 서상철 동력자원부장관(사망), 김동휘 상공부장관(사망),
이범석 외무부장관(사망),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사망)
1983년 10월 8일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전두환은 공식 수행원 22명, 비공식 수행원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의 공식 순방길을 출발했다. 첫 순방지인 버마에서 이 날 독립운동가 아웅 산의 묘소에서 참배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두환은 차량 정체로 예정보다 다소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늦는다는 연락을 받은 후 애국가 예행 연습을 한번 더 하게 되었고 당시 폭탄테러 용의자중 1명인 신기철은
예행연습 중에 나온 음악을 듣고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오인하여 오전 10시 28분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폭탄 스위치를 작동 시켰다.
폭발물이 터지는 순간 아웅산 묘소로 향하던 중이어서 가까스로 화를 면한 전두환은 남은 순방계획을 모두
취소, 즉시 귀국해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북한의 새로운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전군(全軍)에 비상태세를
지시했다.
버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8군단 소속의
'강창수 부대'에서 선발된 특수요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조장 진모 소좌(사형), 통신담당
강민철 상위, 폭파담당 신기철 상위(버마경찰에 사살)로 구성되어 있었다.
1983년 9월에 제련소 직원으로 위장하여 버마 양곤에 잠입한 후, 북한외교관의 자택에 머물면서 테러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사건 이틀 전인 10월 7일 새벽, 아웅산 묘소에 침투하여 건물 천장에 크레모어 2개와 소이탄
1개를 설치한 후 테러 당일인 10월 9일까지 묘소 주변에서 노숙하며 전두환 일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폭파 스위치를 누를 장소를 놓고도 의견대립이 있었고, 강민철이는 묘소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쉐다곤
파고다'에서 일을 치르자고 했지만, 그곳은 관광객이 많아 위험하다는 조장 진모 소좌의 의견에 따라 결국
묘소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위자야 극장'을 선택했다.
사건 다음날인 10월 10일, 강을 헤엄쳐가며 도주하던 조장 진모 소좌는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버마
경찰과 대치하다가 결국 체포되었고, 10월 11일 나머지 신기철과 강민철 2명은 경찰과 교전을 벌이며 저항
하다가 신기철은 사망했고, 끝까지 대치하던 강민철은 다음날인 10월 12일, 들고 있던 수류탄이 터지며
결국 버마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우두머리였던 진모 소좌는 3년 후 사형당했고 강민철은 2008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사회주의 성향으로 한국보다 북한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버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 4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양곤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국외추방을 명령했고,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8 특별재판부는 12월 9일 이들 테러범들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 외교를 단절했으며, 미국, 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
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9월 1일 KAL 비행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폭파된 것에 이어 10월 9일 아웅산 테러까지 이어지자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반감과 함께 심각하게 구겨진 자존심을 찾기 위해 우리의 특수부대를 평양에 파견해
김일성을 사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계획엔 아무런 공식적인 이름이나 작전번호는 붙이지 않은 채
극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벌초계획’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벌초계획은 특수부대원 30명을 공중으로 평양에 투입해 주석궁을 폭파한 뒤 김일성을 제거하고 육로 또는
해로로 귀환한다는 것이었다. 평양 주석궁에 잠입해 김일성을 제거하는 데에는 4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았고 육로로 귀환할 경우에는 15일, 해로로 올 경우에는 2일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 어떤 방식으로
귀환할 지는 현장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극비였던 이 작전 계획은 약 두 달 뒤인 그 해 12월 3일, 부산 다대포로 침투했던 무장
간첩을 생포하면서 없던 일로 돌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특수부대 관계자는 “다대포로 무장 간첩선이
들어온다는 유력한 정보를 입수, 평양으로 보내려 했던 병력을 부산으로 투입했다”며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간첩 침투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무장간첩 두 명을 생포하고 북한 반잠수정을 침몰시켜, 정전협정을 위반한
북한의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고 했다.
사진은 순국 외교사절의 유해가 지난 1983년 10월 13일 국립묘지에 도착, 안장식장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1983년 12월 부산 다대포로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후 도주하다 해군고속정에 받혀 침몰한
북한 간첩선이 1984년 4월 9일 인양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