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당전쟁과 고구려의 수복운동 등이 한반도에서 있었다는 학계와 기존 통설을 깬다.
신라가 한반도 그리고 더 진보적인 연구자들의 요녕성 혹은 강소성 주장을 깨는 결과가 아래에 있다.
삼국사기 髙句麗本紀 第十 寶藏王 六年秋七月 (647년)
秋七月牛進逹 李海岸入我境凢百餘戰攻石城拔之進至積利城下我兵萬餘人出戰李海岸撃克之我軍死者三千人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모두 백여 차례 싸워 석성(石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아래에 이르렀다. 우리 병력 만여 인이 출전하였으나 이해안이 이를 공격하여 이겼다. 아군의 죽은 자가 3천인이었다.
新唐書 東夷列傳
高句麗
又明年三月, 詔左武衛大將軍牛進達爲靑丘道行軍大總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自萊州度海, 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右武衛將軍孫貳朗·右屯衛大將軍鄭仁泰副之, 率營州都督兵, 繇新城道以進. 次南蘇·木底, 虜兵戰不勝, 焚其郛. 七月, 進達等取石城, 進攻積(稽)利城 , 斬級數千 , 乃皆還. 藏遣子莫離支高任武來朝, 因謝罪.
또 이듬해 3월에 詔書를 내려 左武衛大將軍 牛進達을 靑丘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右武衛將軍 李海岸을 副總管으로 삼아 萊州에서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李勣을 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右武衛將軍 孫貳朗과 右屯衛大將軍 鄭仁泰를 副總管으로 삼아 營州都督의 군사를 거느리고 新城道를 거쳐 進軍하게 하였다. [李勣의 군대는] 南蘇[城] ·木底[城]에 진주하였을 때에 오랑캐兵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外城만을 불태웠다. 7월에 [牛]進達 등이 石城을 탈취하고 積利城으로 진격하여 수천급의 머리를 베고 모두 돌아왔다. 藏이 아들 莫離支 高任武를 보내와서 朝覲하며 謝罪하였다.
중국사학계에서 판단하는 石城縣은 5군데이다.
그 중에서 고구려,고려와 관련되는 석성현은 시대별로 4군데로 판단된다.
有過嘅縣(위키)
石城縣 (河源),喺廣東河源市。
石城縣 (河北),喺河北唐山。
石城縣 (遼陽),喺遼寧遼陽。
石城縣 (葫蘆島),喺遼寧葫蘆島。
石城縣 (河南),喺河南靈寶。
운영자는 이외에 탁장하 하류에 石城, 하북성 석문(石門)과 당산 지역의 石城을 삼국시대 쟁패 지명으로 추정한다. 요녕성 遼陽의 석성은 고려시대 지명으로 본다.

중국학계에서 5세기 魏-晉시기 마읍성 표시한 중국역사지도.
위의 지도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라-당전쟁 전쟁루트가 그대로 보인다.
즉, 고구려가 668년 망한후 고구려군와 신라군이 연합군으로 당군에 對敵하는 사건들이다. 마지막은 말갈군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하북 석성(石城)에서 싸웠다.

나-당전쟁의 또다른 추정 루트 (총 357Km)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十一年夏六月 ( 671년)
遂與唐兵戰於 石城 斬首五千三百級獲百濟將軍二人唐果毅六人.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삼국사기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十二年 秋八月 ( 672년)
八月攻韓始城馬邑城克之進兵距白水城五百許歩作營我兵與髙句麗兵逆戰斬首數千級髙保等退追至石門戰之我兵敗績大阿湌曉川沙湌義文 山世阿湌能申 豆善一吉湌安那含 良臣等死之
8월에〔당나라 군사가〕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백수성(白水城) 에서 5백 보 쯤 되는 곳까지 군사를 전진시켜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당나라 군사와〕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高侃) 등이 후퇴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대아찬(大阿湌) 효천(曉川), 사찬(沙湌) 의문(義文), 산세(山世), 아찬(阿湌) 능신(能申), 두선(豆善), 일길찬(一吉湌) 안나함(安那含), 양신 등이 죽었다.
석성에서 당나라군과 전쟁하였는데 지명상 산서성 石城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전쟁루트가 정확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672년 라-당 충돌기록을 분석하면,
① 唐군이 馬邑城 (윗 지도 화살표) 을 공격하여 전쟁을 치루고 고-신 군대가 패한 후 白水城으로 후퇴하여 다시 접전하였는데 전과가 있었으나 ,
② 唐將 고간(高侃)이 이끄는 군사가 산서성의 안문관(雁門關)과 정현관(井陘關)을 통과하여 하북 저지대인 石門(석가장 유역)에서 3차접전을 하였는바 高-羅 연합군이 慘敗 당한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전쟁에서 신라의 최고관등인 대아찬(大阿湌) 효천(曉川), 사찬(沙湌) 의문(義文), 산세(山世), 아찬(阿湌) 능신(能申), 두선(豆善), 일길찬(一吉湌) 안나함(安那含), 양신 등이 죽었다고 기록한것이다.
③ 삼국사기 김유신전 (672년)
唐軍與靺鞨營於石門之野 王(법민)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營於帶方之野.
'당군은 말갈과 함께 석문의 들에다 진을 치고 법민왕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대방의 들에다 왕의 진을 쳤다.
위 戰史에서 하북 석성에 무열왕과 김유신이 등장한다 즉 신라왕이 참전한것이다. 이 전쟁에서 패전하므로서 호종(扈從)하던 신라 대신들이 전사하고 필경 이 전쟁 이후 고구려의 영토였던 산서성을 唐에게 내주고 하북으로 밀린것으로 보인다.
현재 하북성 찬황의 북쪽에 있는 석문(현 석가장)의 위치지도이다.
또한 서남방향에 석문구(石門口)라고 표시되어있다.

중국 하북성지도 석문(石門)
이 싯점부터 약 260년이 흐른 936년 신라국 경순왕이 고려국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기전 慶州 회담에서 오랜동안 많은 외적에게 영토를 겸병당하여 영토가 줄어들었다고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북 석가장이 아니라면 하북 당산 근처 일 수 있다.
심제 글.
첫댓글 짝짝짝!~!
古來로부터 山西(태항산맥 서쪽) 땅 둔유(屯有=屯留)지경이었던 대방(帶方)의 들(野)이라 기록된 석성(石城)을
소생 역시 탁장하 최하류 지경의 석성(石城) 즉 석성진(石城鎭)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자료를 검토하니 의외로 지금 개봉에서 서쪽일대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백수성의 경우도 요나라와 송나라가 전쟁을 벌였던 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한번 다시 되짚어 보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어렵지요? 기록이 아주 적어서 안개속에서 더듬는 것 같읍니다. 신라군은 대방에 진을 쳤는데, 본인은 대방을 현 산동성 연성시로 추정합니다. 그 서쪽에 당군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 천성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차를 줄이기 위해서 원을 크게 그려보면, 현 하남성 안양시가 들어옵니다. 산해경 해내동경에 따르면, '조선천독'이 나오는데 현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진서에 따르면 어양군과 광양군이 나오는데 천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천주가 어양군의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서 현 하남성 안양시와 중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석문=천성=천주로 추정합니다. '석'은 '釋'을 바꿔서...
중국지도에 나오는 석성, 직리주.
담기양의 역사도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