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받아들이기까지..<독서큐티 365 묵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신뿐만이 아니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며,
또한 우리가 그 사실을 완전하게 믿고 실천에 옮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골방에서 만나는 하나님, 앤드류 머레이
내 시간의 매니저<내려놓음 365 묵상, 이용규>
나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움직이는 훈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이 내 시간의 매니저가 되어주셔서
이곳에서의 나의 삶을 이끌어주신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15:13)
최정예 병사<기도명언 365 묵상, E. M. 바운즈>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베푸신 최고의 은혜이다.
기도라는 무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최정예 병사들이며,
주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유능한 지도자들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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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삶 처럼
험한 세상에서 구별되기 위하여!
<직장인 5분 묵상, 방선기 원용일 직장사역연구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6:14-16)
크리스천들은 세상 속에서 생활합니다. 때때로 세상 속에서 살면서 너무 고지식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인간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을 봅니다. 술자리가 벌어지는 회식에는 잘 참여하지 않고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동료들의 경조사에 참석하는 일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크리스천 직장인들의 생각에는 한두 번 동료들과 어울리다보면 세상의 풍조에 동화될까봐 염려되어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문제는 있지만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크리스천다움을 잃어버린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비록 세련되지는 못하더라도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세는 바람직합니다. 한두 번 술자리에 어울리고 밤새워 치는 고스톱이나 오락에 빠지다 보면 세상과 짝하여 동화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당신의 일터 환경에 비추어서 잘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기준을 정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식 때 1차 식사하는 모임(물론 그 때도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요.)에는 참석하고 노래방 도우미나 밀실에서 엉뚱한 짓 함께 하는 ‘공범’을 만드는 단란주점은 가지 않는다고 나름의 기준을 정하면 어떻겠습니까?
일터의 기도 †
직장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지혜와 결단력을 주시옵소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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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도육한 목사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 잃어버린 시간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이 존재할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완전한 분이시지요.
그 앞에 존재하는 모든 사건과 시간은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린 2년의 시간도 결코 낭비된 세월이 아닙니다.
사람은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채 보내버린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한탄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전하게 이끄시고 최상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드디어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시간이 임했습니다.
그 기가 막힌 하나님의 손길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41장 1절에서 16절 말씀 읽겠습니다.
요셉을 바로 앞에 세우신 하나님
1절은 만 2년 후라는 시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지 2년이 지난 것입니다.
어느 날 바로는 일관성이 있고 뚜렷이 기억되는 두 개의 꿈을 연속해서 꾸게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살찐 암소 일곱이 흉하고 마른 일곱에게 먹히는 꿈을 꾸고 깨어납니다.
다시 잠에 들어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가늘고 마른 일곱 이삭에게 삼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꿈이기는 했지만 너무나 생생한 그런데 악몽이었습니다.
그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침이 되자 애굽의 모든 점술가와 현자들을 불러들여 꿈을 말해주었지만 그 꿈을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당연합니다.
바로의 무의식 세계에 이 같은 꿈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이집트의 모든 학술과 경험으로도 풀지 못했고 신적인 존재인 바로 그 자신도 이 일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답을 찾을 수 없었을 그때, 비로소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 속에 한 사람이 떠오르게 됩니다.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선량한 사람 요셉, 자신이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울 때 소망을 준 그 청년을 새카맣게 잊어버린 그 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12절에서 1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2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자신의 꿈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해 주었던 히브리 청년이면,
바로의 꿈도 해석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긴 것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왕궁에 화려한 삶의 젖어 들어 2년을 보냈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누리는 영광에 취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나 저제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줄로 기대하며 기다려왔던 이 요셉의 감옥 생활 2년은 그야말로 끔찍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잊혀진 것 같았고, 형통의 복을 누렸던 그의 삶도 무채색처럼 담담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때가 찾아 그분의 시간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요셉에게도 그의 미래를 위해서도 가장 완벽한 시간에 주님의 개입이 시작된 것입니다.
만일 술 맡은 관원장의 도움으로 요셉이 2년 전에 풀려났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요셉은 보디발의 집의 성실한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바로 이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쓰임 받지 못할 잊힌 존재가 될 수도 있었겠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시간은 언제나 정확합니다.
내가 조급한 것이지요.
우리가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리시는 이 승리의 맷돌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따라 움직이고 거기서 나오는 성취의 가루는 늘 곱고 아름다운 최상품이 됩니다.
요셉에게 잊혀졌던 것처럼 느껴지는 지난 2년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광야는 우리를 더 단순하게 만듭니다.
거추장스러운 것 그동안 불필요한데도 너무 애지중지했던 모든 것 내려놓게 만듭니다.
그 광야가 넓어 보이고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광야 학교의 과정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이 그 광야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광야 어디쯤 걷고 계십니까?
목마르십니까? 지쳐가고 계십니까?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광야를 보지 말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여기까지 동행해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견뎌온 12년에 또 다른 2년이 얹히더라도
피곤하여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러면 거두게 될 것입니다.
광야의 끝에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양할 때까지,
믿음의 걸음, 소망의 걸음을 계속하고 끝끝내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로는 꿈을 꾼 후에 누구에게 해석을 요청했나요?
드디어 무명의 히브리 청년이 대제국의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만남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애굽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던 히브리 목축하는 사람과, 신으로 추앙받던 바로가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무명의 청년과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던 바로 왕의 대면입니다.
바로 곁에는 애굽의 모든 철학과 점성술에 능했던 최고의 지성들이 둘러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앞에 선 청년 요셉은 학문도 종교적 배경도 없는 혈혈단신입니다.
그러나 꿈을 들어주고 해석을 주도해 나가는 사람은 바로가 아니라 무명의 청년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요셉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15절 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아멘
인간의 제국을 대표하는 바로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요셉의 만남은 결코 이 세상적인 힘의 우위로 사건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치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목동 다윗처럼
칼과 단창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승리, 그것을 우리는 목격하는 겁니다.
바로는 말합니다.
'들은 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이 푼다 하더라'
그러나 요셉은 주저하지 않고 답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바로가 꾼 꿈의 내용을 듣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2년 전 두 관원장의 꿈을 계시로 해몽하셨던 하나님께서 바로의 꿈도 풀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요셉은 지혜나 능력, 자신의 것을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난 2년 전, 술 맡은 관원에게 하소연하고 의지하던 요셉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 한 분만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확신이 요셉을 대제국의 권력자 앞에서도 두렵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예수의 제자 된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위축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무엇이 우리로 박탈감에 빠지고 스스로 열등감을 갖게 만들고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믿음 안에 분명한 것이라면,
우리 눈앞에 있는 세상의 권력 이 땅의 그 부 능력 그 지혜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땅의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위대한 선언입니다.
약속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삶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고백할 일은 무엇인가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의 지혜와 능력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이 몰라주고 우리를 잊어버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기억하심을 깨닫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