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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신기한 모습으로 한참을 구경하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본 것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할머니 한 분이 쏙 들어갔는데,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젊고 예쁜 여인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할아버지는 곁에 있던 손자의 손을 잡고 뛰었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라고 묻자, “너희 할머니도 저 속에 넣었다가 꺼내야겠다”라고 답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가 할머니를 젊고 예쁜 여인으로 변화시키는 기계로 생각했던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할아버지가 청년이 되고, 할머니가 젊고 예쁜 여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이렇게 불가능한 일이 가능으로 변화되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나라가 부강해서, 주변의 이방국들이 침범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이방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벗어남으로 이방의 포로가 되어서, 약 70년이라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포로생활을 해 온 이스라엘은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에스겔을 환상 속에서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과연 살 수 있겠니?”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에스겔은 선뜩 대답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아십니다”라며, 아리송한 대답을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행하지 않으시고, 에스겔에게 대언하라고 하시며, 에스겔이 대언할 말을 주십니다. 에스겔이 조심스럽게 대언을 하자, 그대로 행해지면서, 결국 마른 뼈들은 커다란 대군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화된 현상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에스겔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에스겔이 나라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지난 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풀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던 겁니다. 이것은, 본문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성도된 우리의 현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어렵고, 고통 속에서,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우리에게 조금의 희망도 없다고 인정되는 현실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 곳에 희망이 있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이스라엘의 생각이었고, 에스겔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낙심 속에 있을 때,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찾으며,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 때, 우리에게 오셔서, 희망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능력만을 앞세우기에, 하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른 뼈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힘들고 고되다 할지라도,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반대로, 내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나를 앞세우지 말고, 나의 상황을 앞세우지 말고,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앞세우고, 하나님만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놀라운 가능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합니다. 현실이 절망적이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인도하여 마른 뼈들로 가득한 골짜기의 한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는 망했고, 민족적으로는 이방 땅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기에, 마치 죽은 자와 같아서 다시 회복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를 되살리는 것처럼, 절망 속의 이스라엘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여,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의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곧, 임마누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품는 다는 것은, 평안한 현실 속에서 품는 것이 아니라, 그 희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기에, 품는 겁니다. 도저히 희망을 가져볼 수 없는 마른 해골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대적인 절망과 비극 속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으며,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통한 구원과 희망을 간절하게 구하게 되는 겁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말이야 대통령 탄핵이다. 계엄령 선포가 웬 말이냐? 대통령이 내란을 일으켰다고 야단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가 되면 나라 상황이 더 나아질까요? 여당이든 야당이든 너무 말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아니라, 여당과 야당 모두가 내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국내에서도 부족하여, 해외에서까지도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교민들까지도 대통령 탄핵을 외치기 때문입니다. “한강”작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는데, 대통령을 위시하여, 여당과 야당 그리고, 해외교민들은 국제적으로 국가 망신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해외에서 “환전거부” 사례가 있고, 사우디 왕자의 방한 일정이 취소되고, 우리나라를 여행하고자 했던 각 나라의 여행객들에게는 “여행 주의보”가 발령되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크나큰 손해이며, 국제적으로 부끄러움입니까? 왜? 작은 불씨를 크게 키우는 걸까요? 대통령 한 사람을 탄핵하기 위해 이렇게 세계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떨어뜨려야 할까요? 이것이 “정의”입니까? 여당과 야당의 위원들이 해야 할 일이고, 각 국에 있는 교민들이 해야 할 일이며, 날마다 광장에 모여 소리를 높일 일입니까? 여당과 야당의 위원들이 이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대통령의 잘못도 아니고, 여당과 야당의 잘못도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잘못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전쟁으로 세계가 긴장 속에 있기에, 국가의 평화와 세계의 안정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속히 종전되도록 하나님께 소리 높여서 기도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기독교인들의 잘못입니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정은 대통령이나 여당과 야당의 위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기독교인들은 광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마른 뼈들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마른 뼈들이 되살아 날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평안을 되찾고, 국제적으로는 위상을 드높이며, 경제적으로 물가가 안정되어, 서민들이 평안함 속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시 23: 4을 보시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합니다. 국가 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 속에도,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생하거나 생각지 못한 일이 터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성도된 우리는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 소리는, 사람 앞에서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소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야농성도 하고, 투쟁도 하고, 단식도 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여러분, 절망 자체가 끝이 아닙니다. 절망 끝에는 희망과 새로운 역사,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믿음 안에서 늘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우리의 희망이 성취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를 되살리는 비결을 알려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생기”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마른 뼈에게 들어가는 겁니다. 이로 볼 때, 성도된 우리는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 자신을 복종시키는 겁니다. 마른 뼈들이 성령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면,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성령이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지 않았다면,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성령께서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심으로, 마른 뼈가 살아나 하나님의 커다란 군대 곧, 대군으로 변한 것입니다. 본문 5 - 6절을 보시면, “너희가 살아나리라”는 말이 2번이나 반복됩니다. 히브리어에서 두 번 이상 반복되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는 별표체크와도 같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로 인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 앞에 도착했을 때, 누가 홍해를 열었습니까? 모세입니까? 출 14: 13을 보시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그들은 소리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누가 행한 겁니까? 이스라엘이 외친 소리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겁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실 줄 압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고함을 치기 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수 6: 16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합니다. 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까? 삼상 7: 7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지시에 의해 미스바 광장에 비무장으로 모였습니다. 이 정보를 획득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전멸시키기 위한 좋은 기회라며, 무장하고 공격했지만, 결국에는 벧갈 아래까지 도망갔습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에벤에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열어주시면 열립니다. 본문에서, 마른 뼈를 살리신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평화와 안정으로 회복시키며, 우리의 인생길도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실 겁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믿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절망의 순간에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대언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순종으로 행하자, 골짜기의 수많은 뼈들이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소리가 나고 움직이기 시작하며, 뼈가 맞아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여 생명을 가진 형태로 세워지게 됩니다. 절망에서 새로운 소망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대한민국에 선포하고, 우리 자신에게 선포할 때, 이루어집니다. 시 42: 5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여 네가 어찌 낙심하며,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네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대한민국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고, 우리의 인생을 환한 빛으로 비추며 이끌어가는 것은, 사람과 환경을 향한 우리의 외침이 아니라, 본문에서 생기에게 명하신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6절 후반부를 보시면,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대한민국이 살아나고, 우리가 살아나며, 희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말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파멸로 이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의 삶이, 가정이, 교회가, 사회가,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고 회복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시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본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마른 뼈들, 절망의 골짜기에서 뒹굴고 있던 뼈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열국 중에서 선택한 이스라엘도 얼마든지 마른 뼈가 되어 절망의 한 복판에서 뒹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현실에는 캄캄한 절망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 마른 뼈가 스스로 살아나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거기에 저절로 힘줄이 생기거나 살이 붙거나 생기가 들어가는 일도 없습니다. 에스겔이 마른 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더니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죽음의 자리에 있는 마른 뼈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대규모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사 41: 10을 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합니다.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서도 성도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도저히 가망이 없고, 소망도 없는 마른 뼈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시자, 마른 뼈가 살아났습니다. 절망의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 부활의 골짜기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이지만, 하나님께는 가능입니다. 이제, 대한민국과 우리의 염려, 근심, 걱정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앞에서 큰 소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대한민국과 우리 안에 성령이 찾아오심으로, 놀라운 회복의 역사, 소망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일어남으로, 마른 뼈가 일어나 큰 군대가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은혜,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