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5,1-8; 마르 9,41-50
+ 오소서 성령님
지난 연중 제6주일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들었는데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집회서 말씀은 이 예레미야서의 말씀과 비슷하다고 하겠는데요, 하느님 외의 다른 것, 특히 재산에 의지하며, 자기 자신, 자기 힘,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누가 나를 억누르리오?”라는 오만함은 반드시 그 죗값을 치르게 됩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다”라고 말하는데요, 주님께서 자비로 분노를 늦추시는 것이지, 악에 대한 심판을 하지 않으신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첫 번째 부분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이와 반대로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경고인데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하느님이 원수들이 받는 형벌(탈출 14,28; 느헤 9,11; 스바 9,4; 묵시 18,21)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하느님의 원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연자매는 본래 ‘당나귀 맷돌’이라는 말인데요, 당나귀가 겨우 끌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맷돌을 뜻합니다.
이어서 손, 발,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들은 차라리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이 우리를 죄짓게 한다(마르 7,20-23)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신체 부위를 잘라버리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각오로 죄를 멀리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여기서 ‘몸’이 개인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 말씀은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는 이단자를 교회 안에 두지 말고 파문시킴으로써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 번째 부분은 소금에 대한 세 가지 말씀입니다. 첫째,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이 말씀은 어제의 제1독서 말씀처럼 시련과 정화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곡식 제물로 바치는 예물에 소금을 쳐야 한다”(레위 2,13)는 레위기의 말씀과 연관해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소금에는 보존하고 정화하는 특성이 있으며, 또 소금의 맛은 변하지 않으므로 하느님의 약속이 영원하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곡식 제물에 소금을 쳤습니다. 그런데 ‘불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시련을 통한 정화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제자로서의 본분을 잊는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콜로새서에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 4,6)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엊그제 복음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자신을 녹이는 겸손이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대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주님만을 섬기며, 죄를 피하고,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제자라 해 놓고 다른 것으로부터 배우면서 살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합니다.
나자렛의 맷돌
출처: Millstone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