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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성경의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복음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게 되면....
복음서보다 더 복음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는
예수님의 생각, 그 자체로 완전한 것 같습니다.
바울의 의식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복음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완전성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바울의 예수 사랑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깊은 은혜의 감동으로 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바울의 의지적 노력이나
성령 충만한 은혜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광신적인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는데도
누구의 기도를 후원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고.....
은혜의 믿음으로 성령 충만한 사도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였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바울 자신의 고백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은혜로 되어졌습니다.
바울의 사도인 표적으로 나타난 사도행전에 기록된 희한한 능력들은
바울 자신의 삶으로 담아낸 예수님의 복음적인 이해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의 복음적인 이해와 성령의 충만함은
로마의 감옥에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로마의 감옥 쇠사슬에 묶인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일으키며 4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하면서 가졌던
사도적 역할을 활동적으로 수행할 때 보다 더욱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임한 성령의 내적 충만입니다.
사도바울의 옥중서신을 살펴보게 되면
성령의 내적충만이 얼마나 가득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쇠사슬에 묶인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며 항변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잡혀 고난을 겪는 자신의 억울함을
로마의 시민권으로 호소하며 강력하게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복음화 할려는 원대한 바울의 선교 비전은
억울한 감옥살이로 계속 이어졌고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순교하였습니다.
성경의 바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고....바울 복음의 정수를 탄성으로 깨닫게 됩니다.
순교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정수를 담아낸 바울은
그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똑같은 복음의 정수를 깨닫게 합니다.
바울의 로마 감옥은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더욱 충만하고 완벽한 이해를 하게 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
갇힌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기뻐하며 은혜로 감사하는 확고한 믿음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주님 되심과 하나님 되심의 복음적인 은혜가 믿음으로 역사되어 지는
신본주의적 믿음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는
예수님을 이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이후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 하였지만
그리스도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바울은 죄인의 괴수로 은혜와 긍휼을 입은 것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인내와 믿음으로
영생얻는 교훈의 본이 되기 위해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본이 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도로서 성공신화를 이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사도 가운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요,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고백하고
죄인의 괴수인 자신을 당당하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죄인에게 임하는 빛난 옷입니다.
바울은 말과 글로서뿐만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낸 것입니다.
바로 죄 용서 받은 죄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은혜의 본질로 전파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이며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고난의 흔적으로 가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로 가득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 보기 아주 힘든 것 같습니다.
마치 예레미야의 시대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면서
예레미야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웁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심판을 눈물로 지켜 보아야만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은
예수님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며
예수님께서 종말론적인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에 관한 비유를 베푸시며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은 택한 자들의 밤낮 부르짖는 소원을 들어 주시겠지만
이 땅에 다시 올 마지막 때에 유혹의 욕심으로 사단의 미혹을 따르는 자가 많을 때
참된 믿음을 보겠느냐는 묵시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택한 백성이라도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에 집착하게 되면
예수 믿는 믿음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방편으로서의 기도는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내는 신앙심의 중심이 되지만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는 유혹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에 결국 믿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성경의 하나님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성도의 소원은 다양하여 결국은 마음의 욕심을 궁극으로 이루게 됩니다.
바울이 죄인의 괴수로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낸 것은
오늘날 번영과 성공의 소원 성취를 기도하는 한국교회의 성도들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구원의 관점을 인생의 성공신화가 아닌
오직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예수님 중심으로 본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잘 살아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바울 신앙을 완전 역행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진리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의 관점으로 신앙의 성숙을 가지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기도가 될 때 바울 신앙을 본받고 따르는 자가 되지만
비전과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는 종교적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바리새인의 후예입니다.
복음과 기도가 하나가 될 때에 믿음이 온전하게 되지만
복음과 기도가 분리되면 그대로 기복적 민간 신앙과 현세적 무속 신앙으로 타락합니다.
기복 주의와 무속신앙은
철저하게 현세적 복을 누리는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기도를 강조하면서 기도의 위험성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행사 가운데 가장 비복음적인 요소로 가득한 것이
바로 기도하는 모임입니다.
인본주의 기도는
복음적인 신앙과 반비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에서 벗어날 때
선로를 탈선한 기차와 같습니다.
뛰어 내리는 자는 살고....
기도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평생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새벽 기도를 목회 생명으로 여기는 대다수의 목회자들과는
너무나 의식의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는
새벽 미명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 예불을 드리는 블교적 영향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종교적 자기 성찰을 이루기 위한 불교의 새벽 예불이......
한국 교회의 신앙 아이콘으로 굳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와 불교의 새벽 예불은
종교적 경쟁 관계의 틀을 형식적으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종교 사업을 위한 미신적 민간신앙의 형식의 갖춘 것 뿐입니다.
새벽 기도 때 무엇을 기도합니까?
당연히 불교 신자들이 부처 앞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기도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혼합기도를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언약적인 기도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울의 신앙을 본받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기도의 시간과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복음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불당에서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여질 것이요,
기도의 내용이 비전과 소원성취로 간절하다면 교회당에서 기도하지만
무속신이 현세적 복으로 조롱할 것입니다.
실제로 양산의 통도사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야산에서
신앙 고백적인 기도를 하여 보았습니다.
영험하다는 통도사가
아주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통도사를 둘러싼 아름다운 소나무 숲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 창조적 은혜를 감격스럽게 느껴 보았습니다.
성경적인 신앙의 사람은
기도의 장소와 양보다 내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교회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율법화 시키고 시스템화 시키는 사람들은
기도의 위험성을 완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를 벗어나면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동기가 되어 기도하는 이방인의 기도가 되어 버립니다.
차동차를 사서 고사를 지내는 사람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똑같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동기가 되어 행하는 종교적 의식입니다.
둘 다 미신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미신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된 기독교 민간 신앙에 젖어 있는 사람입니다.
새집을 사서 집들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미신을 지키는 사랍입니다.
개업을 하여 고사 대신 예배를 드리는 사람
역시 기독교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돌 잔치를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예배의식을 행하는 것은
미신에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성묘 가서 무덤 앞에서 절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며.....
조상에게 제사하는 대신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 모두 비복음적입니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여 예배 드리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며 비기독교적이고 복음 정신에서 완전 위배되는 것입니다.
복음과 기도의 중요성은
참된 예배로 이어집니다.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근거하여만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이 기원의 성격을 가지면
은혜와 복음을 고백하는 방편으로서의 기도에서 탈선하여
민간신앙으로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기원의 성격을 가지게 되면
예배는 고사가 되며,,,교회는 무속신앙의 터전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의 솔로몬은 자신이 건축한 성전지대에 이방 신전을 세워 놓고
그것에 절하며 섬겼던 사실은 오늘날 예배를 고사로 지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잃어 버리게 될 때.....
감사와 영광의 예배를 개인의 사욕의 위하여 잘못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복음의 본질은
기도와 예배라는 믿음을 신본적 신앙으로 갖게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으면서
다양한 미신적인 행위를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지난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혼합주의 바알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혼합주의 바알 신앙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을 온전히 믿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흔히들...개티들이 말하는 "개독인", "먹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단에 빠져 있으면서 이단이 아니고
사이비를 신봉하면서 사이비가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는
참된 언약적 복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복주의 미신과 신비주의 무속 신앙을
흔적으로 갖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주님의 주님 되심의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의지적 민간신앙으로 바꾸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열광적이고 광신적인 바알 신앙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은혜되게 하지 못하며 예수의 복음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이해로 가득한 복음 신앙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 안에 충만히 거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복음적인 고찰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깨달은 말씀의 은혜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기도를 하여도
일생이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크기는
유사이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담고도 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알고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자기 의식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기도의 소원으로 체면화된 광신적 기도는
영적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맹신하는 인본주의 신앙의 사람은
기복주의 민간 신앙과 무속적 성령 체험 신앙을 갖기 위한 광신적 기도에 빠져 있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아 지고 믿어지는 사람은
신앙 고백적인 거룩한 기도를 일평생 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복음적인 이해는 바울에 미치지 못하지만
바울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따르는 참된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