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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 `한쓰'와 함께 고은
애마(愛馬) `한쓰'와 함께
오늘 새벽, 수수잎새 같은 옷을 걸치고
나는 사세마(四歲馬) `한쓰'를 타자 마구 달렸다.
처음 곡식을 거둔 빈 밭에는 채일 것이 없다.
내가 달릴 때 말이 먼저 요왕교부(敎父)네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내 귀는 말의 귀에 대고 어렴풋이 들었다.
아직 주홍(朱紅)꽃신을 제품에 안고 내 외동딸은 쌕쌕거리겠지,
내가 돌아오면 네가 처녀가 되어 있으면, 첫째 `한쓰'가 놀라리라.
어느덧 우리는 하얀 길을 달리는구나.
말 고삐를 나꿔채지 않아도
`한쓰'는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
새벽 길은 남은 가을 끝이 여기저기 잠들었고
침착한 대기(大氣)뿐, 캐비지밭을 끼고 밤은 지새었구나.
모처럼 외동딸을 피해, 어린 시절의 마을 장님 노래와
대만(臺灣)까지는 이틀이면 갈 바다와 박쥐들과……
내 `한쓰'는 그런 것을 내게 주면서 달린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두 다리는 말의 옆구리에 맡길 뿐이다.
그러면 `한쓰'는 새벽꿈이 주인 때문에 끊겼다고 투덜대다가 비는구나.
몇 십년(十年) 동안 농부는 밭에 있으나, 아직 새벽 밭은 비어 있고,
지난 여름 하늘의 곰별자리 밑께로 `한쓰'는 멈춘다.
내가 앞으로 가슴이 밀리다가 내리고 안장은 따뜻한 채 기다리리라.
그러나 파리가 뜯어먹은 흉터장이 `한쓰'야, 우리는 어서 돌아가자
이제 신 한 짝이 품에서 내려지고 외동딸이 깨일 아침이구나.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어둠과 더불어 고은
어둠과 더불어
만권(萬卷) 책이 눈을 감았다.
술 취한 새벽 세시!
내 방의 어둠만으로 살 수 없다.
문을 열자
문을 열자
모든 어둠놈들이 들어와서
어떤 먹 그믐밤 개구리 운다.
문을 열자
문을 열자
모든 어둠놈들이 들어와서
벙어리귀신 가슴앓이.
새벽 세시 몇분!
내 방의 어둠만으로 살 수 없다.
관음보살(觀音菩薩), 나에게 천수천안(千手千眼) 어둠 놈들을 보내다오.
입산, 민음사, 1977
어린 잠 고은
어린 잠
가만
가만
귀 기울여 보세요
어느 놈의 천하장사도 못당할 힘으로
우리 어린것들 잠자는 숨소리에
큰 벼랑 무너지는 괌소리 들려요
아가
아가
네가 옳아요
어린것들 깨어나면
임진강 스무나루 이쪽저쪽 오가는 배에
고려 뱃노래 물도 울려 온몸에 들려요
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
어머니 고은
어머니
하루내내 뼈도 없고 뉘도 없는 만경강 갯벌에 가서
그 아득한 따라지 갯벌 나문재 찾아 발목 빠지다가 오니
북두칠성 푹 가라앉은 신새벽이구나 단내 나는구나
곤한 몸 누일 데 없이 보리쌀 아시 방아 찧어야지
도굿대 솟아 캄캄한 허공 치고 내려 찧어 땅 뚫는구나
비오는 땀방울 보리쌀에 뚝뚝 떨어져 간 맞추니
에라 만수 그 밥맛에 어린것 쑥 자라나겠구나
여기말고 어디메 복받치는 목숨 따로 부지하겠는가
이 땅의 한 아낙의 목숨이 어찌 만 목숨 살리지 않겠는가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삐그덕 가마 타고 시집 온 이래 그 고생길 이래
된장 간장 한 단지 갖추지 못한 시집살이에 몸 담아
첫 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 밥 해서 이고 나가니
산후 피 펑펑 쏟아 말 못할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다
그러나 바지랑대 걸음걸이 한번 씨원씨원해서
보라 동부새바람 따위 일으켜 벌써 저만큼 가고 있구나
갖가지 일에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고 보리고개 봄 다 가고
여름 밭 그대로 두면 범의 새끼 열 마리 기르는 폭 아닌가
우거진 풀 가운데서 가난 가운데서 그놈의 일 가운데서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연장 무덤 고은
연장 무덤
만경강 염전에 해일 나서
그 천지개벽에
염전 일 하러 갔던
수길이 아저씨
설장고 잘 치던 아저씨
그만 해일에 떠내려가
몸뚱이는 커녕
신발 한 짝 찾지 못했다
수길이 아저씨네 형제들
시집간 자매들
의논키를
빈 무덤이라도 써
거기에
수길이 아저씨 쓰던 연장
괭이 뿔괭이 삽 쇠스랑
나무자루 빼고 넣어서
수길이 아저씨네 종중산에 묻었다
연장 무덤이었다
마을 아이들 어쩐지 그 무덤에는 가지 않았다
어쩐지 그 헛무덤이 무서웠다
그런데 3년 뒤
이게 웬일인가 수길이 아저씨 살아 돌아왔다
형제들 처음에는 등골이 오싹하여 물러났다
수길이 귀신이었기 때문이다
나 귀신 아니다 아니다 하고
살아 온 수길이 아저씨 한참 외치고 나서야
서로 얼싸안고
이게 꿈이여 생시여 하고 울고불었다
해일에 떠내려가다가
한정없이 떠내려가다가
웬 나무토막 만나
그놈에 목숨 부지
칠산바다로 떠내려가다가
거기서 배 만나
뱃놈이 말하기를
목숨 구해준 값으로 일 좀 해주고 가라 해서
3년이나 배 안에서 밥 짓는 일 해주다가
법성포에서 도망쳐 왔다 살아 돌아왔다
수길이 아저씨 무덤 파서
연장 꺼내어
거기에 새 자루 맞춰 끼워
흙 한 번 찍어보더니
너도 살고 나도 살아 일복 또 터졌구나
만인보 2, 창작사, 1986
열매 몇 개 고은
열매 몇 개
지난 여름내
땡볕 불볕 놀아 밤에는 어둠 놀아
여기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아침이슬, 1980
오늘의 썰물 고은
오늘의 썰물
우리는 기억하리라
이 세상을 폭풍우로 두들겨패야 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을 성난 해일로 덮쳐야 할 때가 있다
비록 흰 거품 물고 물러서지만
오늘의 썰물로 오늘을 버리지 말자
오늘이야말로 과거와 미래의 엄연한 실재 아니냐
우리는 기억하리라
기억해 자식에게 전하리라
오 끝없는 파도의 민족이여
그러나 이 세상을 한밤중 우는 아이로 달랠 때가 있다
역사가 아버지가 아니라 내 자식일 때가 있다
오늘을 내 자식으로
멀어져 가는 썰물의 파도소리로 잠재우건만
그뿐 아니라 이 세상을 온몸으로 참회할 때가 있다
참회란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한 일을 끝내 해내는 데 있지 않느냐
지금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
우리는 파도치면서 젊은 밀물로 돌아오리라
우리들의 생존 몇천 년이 오늘이 되어
바다 전체로 온 누리로
우리들의 밤을 하나하나 드높은 별빛으로 기억하리라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우물 고은
우물
그 집 안에는 우물이 있어요
열 길도 넘는 우물이 있어요
그윽한 분례네 집
분례 어머니 박꽃처럼 환한 분례 어머니하고
어린 분례하고 옥잠화하고
단 두 식구 살고 있어요
젊은 과수댁이라
말 한 마디도 삼가고
한여름 등물도 한 적 없어요
그 분례 어머니가
열 길 우물에 묵직한 두레박 내려뜨려
길어 올린 검푸른 물
그 물의 고요와 그 무서움
심부름 가서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온몸 떨려요 두근두근대어요
만인보 2, 창작사, 1986
을파소 고은
을파소(乙巴素)
밤이 깊어서 길은 깨어 있다.
우리를 위하여 멀리까지 깨어 있다.
다친 조랑말 을파소(乙巴素)야
서둘지 말고 가자.
우리는 후회한 다음 태어나서
후회할 일도 없다.
하늘에는 캄캄하게 거미줄이 자라나고
때때로 별빛이 걸려 내려온다.
아무리 큰소리로 불러도
별을 부를 수도 없고
우리는 흔들리는 수레에 실은
빈 그릇에 밤을 담았을 뿐이다.
길은 몇갑절이나 친하여
네 부지런한 흉년의 방울소리는
지나는 길에서 잠들 때도 있다.
서둘지 말고 가자.
마음이 바쁘지 않으면
어둠은 차례차례 비켜나서
우리가 온 뒤를 따라온다.
이제 바람 자는 풀밭길을 지나서
불 꺼진 외딴 마을과
중국 과부네 넓은 야채밭길도 지나왔다.
죽어가는 노인은 죽음을 서둘지 않고
우리도 서둘지 말고 가자.
먼동이 틀 때 까지는 도달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기다리다가
추운 집이 달려오리라.
서둘지 말고 가자.
내 가난은 언제나 네 가난이고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고
이 세상에 네가 왔지만
길은 잠든 것들이 버린
어둠에 깨어 있다.
왜 이렇게 죽음에 익숙한지,
너는 내 마음을 잘 알아서
잠든 술집을 지나갈 때는
뒤를 돌아보며 늦추는구나.
그러나 지나가 버리자.
밤이 깊으면 술보다 밤이 좋구나.
내가 죽음을 생각하면
또한 너도 생각한다.
서둘지 말고 가자
가서 네 마굿간에서 함께 쉬자.
을파소(乙巴素)야 이제 절반을 넘어
네 쉰 꼬리가 한번 영(嶺)을 치는구나.
문의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이 만조에 노래하다 고은
이 만조(滿潮)에 노래하다
제주 만조(濟州滿潮)여, 그대는 떠나는 배를
조금만 늦게 떠나게 하고
어제 밤 배들을 돌아오게 한다.
어떻게 지킬 약속을 실어오는지,
한 척의 거룻배도 삐걱거리며 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만조(滿潮)여, 그대는 한 물새가 조상(弔喪)할 것을 조상(弔喪)하게 한다.
돛받이에 다친 어부는 키 잡은 손을 풀고
온갖 그물코에 별들을 걸어야 한다.
잠깐이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여인이 낳을 것이다.
오늘까지 살아온 자는 그대 앞에 있고,
언젠가 오랜 땅보다도 오랜 바다를 소망하리라.
만조(滿潮)여, 누군들 그대 앞에 한낱 어린 길손이리라.
그러나 만조(滿潮)여,
그대가 이 마을을 가득하게 할 때
산지포(山地浦) 노인의 지는 숨은 빨리 지고
새 갓난애와 별똥이 탄생한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자도 오는 자도
그대가 이 마을을 가득하게 할 때인지라
먼 곳으로부터 썰물 때는 서두를 수 없으리라.
저 북쪽 바다에는 동정녀(童貞女)의 어화(漁火)를 수놓게 하고
한 물결만큼 바람을 쉬게 해도 물결은 찬란한 살로 일렁인다.
만조(滿潮)여, 고기떼는 좀 남아서 자지 않을 것이고,
여러 물새들은 제 날개를 재워야 한다.
제주 만조(濟州滿潮)여, 이제 그대가 이 마을을 떠나려 할 때,
저 어둔 바다는 새끼아지와 소라를 키우지 않고
잠시 신(神)을 키우지 않으리라.
이미 돌아온 배는 비어 있으나
어느 작은 갑판 위에 인기척이 남고
마지막 배가 죄없이 돌아온다.
만조(滿潮)여, 저들 어부(漁夫)에게 목 축일 술을 허락하라.
그리하여 이 마을은 조심스럽게 썰물을 기다리게 하라.
모든 것은 가득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떠오른다.
밤은 깊다. 그러나 만조(滿潮)여,
오늘 이 마을 일은 다 끝났다.
저 북쪽 바다는 더 넓어질 것이고
그러나 제주만조(濟州滿潮)여, 오늘밤 꼭 떠나갈 배를 내일 떠나게 하라.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인당수 고은
인당수
흰구름 달려가는 북소리 울려라
몽구미나루 세찬 물결
너와바윗장 뜯어내어라
이팔청춘 아가씨야
인당수 짙푸르더라
아비 눈 뜨는 공양미 삼백석
그런 놈의 공양미 아니어라
목구멍 거미줄 걷어내고
하얀 이밥 한 그릇의 꿈이어라
매야 매야
성날수록 네 발톱 감추어라
아리따운 아가씨야
쌀 삼백석에 몸 던진 아가씨야
네 몸이 저승이어라
네 몸이 용궁이어라
네 몸이 바다 위 연꽃이어라
네 몸이 매 떠오른 하늘이어라
네 몸이 아비의 눈이어라
새 세상 가득찬 새 눈이어라
싸우는 아가씨야
몸 하나로 죽어서
쌀과 임금과 싸우는 아가씨야
치마폭 쓰고 해진 바다에
네 몸 던져
네 몸이 뭉구미나루 북소리여라
소용돌이치는 싸낙배기 물결이어라
그 물결 속의 끝없는 조기떼여라
온 백성 연장 들고 달려가는 싸움터여라
매야 매야
이팔청춘 물귀신 된 아가씨야
수령방백 모가지 할퀴는 아가씨야
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고은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재철이 어머니 고은
재철이 어머니
재철이 어머니는
죽산서 시집 와서
뜬 20년
아수룩아수룩
아들 셋 쪼르르 나서
내년이면 큰놈이 공주사대에 갈지도 모르니
치통도 좀 수그러져야지
20년 동안
땡볕에 농사짓느라
낭떠러지 자식 짓느라
열 바가지가 플라스틱 바가지 되어
기껏해야 60리 길 친정 한번도 못간 세월
사발농사 안 지으려고
평택장은 고사하고
친정 한번 못간 세월
이내 발밑 꿩 날으듯이
친정 아버지 어머니
세상이나 떠나야 그때나 부랴부랴
20년 전 새색시로 흰 머리 풀고 울며 가야지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저녁 논길 고은
저녁 논길
벌써 별 하나 떠 이 세상이 우주이구나
마른 풀냄새 한철인 마을에도
아껴 쓰는 전등불빛 여기저기 돋아난다
나는 돌아가는 저녁 논길을 외오 걸으면서
달겨드는 밤 물것 이따금 쫓고
한편으로는 엊그제 흙에 묻힌 남동이 영감을 생각한다
죽음이 산 사람의 마음을 깊게 하는지
나도 그 영감 생시보다는 손톱만치 달라져야겠구나
어둠에 더욱 정든 논 두루 돌아다 보아라
지난 해보다 도열병 성해서 얼마나 품도 애도 더 먹었는지
여든 여덟 번이나 손이 가는 농사가 1년농사 아니냐
아무리 쌀 농사 헛되고 빚지는 가을이건만
가을은 가을답게 부지깽이도 덤벙대도록 바쁘다
진정코 여기서 떠날 줄 모르고 놀 줄 몰랐다
살아 보면 세월은 사람에게 큰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가장 작은 것이다
돌아가는 길 저녁 논길이 오늘따라 으리으리하게 조용하구나
가물에도 뒷장마에도 병충해에도 실컷 커서
말없이 이삭 팬 벼가 우리에게 어른이 아니고 무어냐
어서 가자 가서 매흙냄새 나는 이 몸으로
내 새끼 한 번 겨드랑 받쳐 번쩍 어둠 속에
들어올렸다 넉넉잡고 한 나라로 내려놓자꾸나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저녁 숲길에서 고은
저녁 숲길에서
어느날보다도 일찍 미자르 별*이 뜨고 나는 일을 마쳤다.
내 말이 방풍지대(防風地帶) 너머로 달려 가서
해산(解散)하는 메밀밭을 버려 놓았기 때문에
나는 말을 끌고 사과하러 가야 한다.
그러나, 한두 번 잘못하는 일은 아름다움일까.
내가 가는 것은 뜻밖의 슬픔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밭 주인네 집은 숲 저쪽의 오지(奧地)에 있다.
버린 메밀밭은 저문 뒤에 더욱 역력하구나.
나는 따라 오는 말더러 핀잔을 주지 않고
오직 숲길로 접어 들자 말했을 뿐이다.
`이제 다 왔다. 네가 좀더 겸손해지면
나도 또한 겸손해지리라.'
우리가 숲으로 들어가자 누가 뒤에서 일어서는 것 같다.
자꾸 돌아다보아도 말 꼬리에 채이는 것은 어둠이다.
저녁 숲길은 밭 주인의 자취가 가득하고
나는 탄주(彈奏)하는 주인에게 할 말을 연거푸 연습해 본다.
`잘못했습니다. 제 말은 운 뒤 몹시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화를 낼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밭 주인의 막내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상하구나, 내 사과하는 손길이 굳어진다.
아무래도 그 애의 혀에 이끼가 끼고 곧 죽으리라.
나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집을 하직(下直)하였다.
그 숲 속의 집에서 너무나 멀리까지 야채(野菜) 썩은 냄새가 따라온다.
내 걸음은 훨씬 더디고 말 얼굴이 슬픔을 뿌리친다.
어서 나는 바시해협(海峽)* 쪽으로 늙은 말과 돌아가야 한다.
오던 길이 아니었다. 내 눈은 오던 길을 사납게 찾는다.
그러나 낯선 길에서 마음이 쭈뼛쭈뼛 모지는구나.
말도 유가족(遺家族) 오여사(吳女史) 흉내를 내며 따라 온다.
어디선가, 개울물 소리가 혼자 중얼거리고
단 한 번 죽을 까치가 별빛처럼 운다.
`이제 다 왔다. 밭 주인 딸은 곧 죽으리라.'
내가 겨우 들리도록 말하자 말은 엉덩이를 낮춘다.
이 세상 일은 죽음과 닿아 있고
우리들이 사과하고 오는 길에도 닿아 있다.
저녁 숲 속은 어둠이 바다 흑조(黑潮)로부터 돌아온다.
또한 그애의 죽음이 몇 번인가 숨바꼭질도 하는구나.
어느날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나는 잘못을 사과하였다.
우리가 돌아오는 길은 밭주인네 집에서 멀어지고
이상하구나, 내일 일들이 많은 지류(支流)가 되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갑자기 영전(靈前)에 선 것 같이 말은 느끼고
오늘밤에 제 마굿간에서 함께 자기를 바란다.
어서 가자. 집에서 누가 손을 씻는 소리가 나고 그 위에서 미자르 별이 기다린다.
* 미자르별: 북두칠성(北斗七星) 중의 한 별
** 바시해협(海峽): 대만(臺灣)과 필리핀 사이의 바다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제암리 고은
제암리
발안장터 술 먹고
국밥 사먹고
손톱 발톱이 젖혀지도록 일도 못한 사람아
이 세상에서는 일 안하는 놈이 가장 나쁘다
손에 보따리 하나 안들고
노는 놈은
놀면서 으시대는 놈은
나쁜 일 하는 놈보다 더 나쁘다
내가 바로 그런 놈이다
딸국질이나 동무삼아
제암리 가서
살아남은 여든아홉
전동례 할머니
눈발 날리는 날
할머니 할머니
불타 죽고 총맞아 죽고
다 죽고
할머니 하나 남아서
한평생 놀아본 일 없이
3․1절 65주년도 추운 보리밭에 계신데
나는 쪽발이 앞잡이보다 나쁜 놈이다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때문이라고
과민성 대장염 중증이라고
나는 펑펑 쏟아지게 놀고만 있구나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제주의 D단조 고은
제주(濟州)의 D단조(短調)
당신을 표현하기에는 언제나 형용사(形容詞)밖에는 없다.
바하로부터 바하까지 돌아온
G선상(線上)의 여수(旅愁)와 같다.
싱그러운 눈의 외로움
등뒤에서 비오는 소리
또한 햇무리 흐르는 계단(階段)의 정적(靜寂)
어떤 기쁨에라도 슬픔이 섞인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여자를 잉태한 젊은 어머니의 해변(海邊)
오늘, 저 하마유꽃이라도 지는 흐린 날,
어제의 빈 몸으로 떠나는구나.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진천장에서 고은
진천장에서
40년 동안 내 고향을 등졌다
나의 생애
초근목피의 조국아 너는 알겠지
무슨 짓이라도 용서해 주는
조상의 무덤이 싫었다
봄이 와도
진달래가 피지 않았다
진달래 뿌리 다 캐어다
겨울내내 떼어버렸다
어린 시절의 모교 국민학교가 싫었다
몇십 년 동안
K-8 최신예 전투기들이
내 고향의 하늘을 차지했다
고향 떠나 준엄한 삶으로 살지 못한
나 자신의 수많은 이유들이 싫었다
날마다
날마다
오늘을 빈 몸으로 등져버렸다
진천 장날
새로이 나는 갈데올데 없구나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라 고적한 핵에 불과하다
나의 사회
여기서는 너무 멀구나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참 고은
참
요즘이야 들에 메나리 한 가닥 없네그려
그저 허튼 소리 몇 마디로 일하다 반벙어리 되네
참 때 되니 그때에야 참 먹세하고 물에서 나와
내 마누라 볼기짝 같은 논두렁에 궁둥이 두고
술참 다음 샛밥 먹세그려 본논 일 시작이 반일세그려
멀지도 않지 저 장호원 길 칠장사 길에는
그놈의 관광버스만 줄 대어 놓고 달려가네그려
이 바쁘나 바쁜 판에 들판에
서울사람들 노는 것 하나는 어느 놈한테 질세라
참 먹세 참 먹세 우리에게는 참이 금강산 아닌가
아침 한 참 일하고 나와 엉거주춤하게도
아홉시에 막걸리로 목 축이고 꺼진 배 불리고
한 참 일하고 나와
열시 반 국수나 뭐나 샛밥으로 요기하네그려
또 한 참 일하고 나와
낮 한시 앗 뜨거운 햇볕 무릅쓰고
눈부시네그려 풋고추 갈치도막에 점심 먹고
제기랄 논두렁 잠 한 소금에다가
에라 일하세 일하세 놀러 왔던가
세시에는 라면 후루룩 넘기고 나서
또 한 참 일하고 나와
한 번 쉬어 담배맛에 기대었다가
뉘엿뉘엿 여섯시 막걸리로 허기 몰고
자 하루 일 다했네 다했어
이렇게 세월 가노라면
고된 일에 참 안 먹고 어이 배겨내던가
이렇게 저렇게 세월 가노라면
번쩍 마흔살이 호강하는 사람들 일흔이네 일흔 두엇이네그려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천은사운 고은
천은사운(泉隱寺韻)
그이들끼리
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위에도
그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그이들은
밤 솔바람소리,
바위보아
비인 산 허리.
가을이 오데.
바위를 골라
나앉아 우는 추녀 끝
뜰에 떨어지는 풍경소리에,
그이들끼리
살데.
그이들은 늙데.
돌아와 한번 잊은제
도로 가고 싶은 그이들의 얼 바람 진
산 허리.
그이들은
살데.
피안감성, 청우, 1960
초추 고은
초추(初秋)
아우여 서쪽으로 울을 치지 말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쪽이다.
돌아온 아우여
살아가면서 아는 얼굴은
몇 잔의 술로 취하여
가을이 오면 가을 뿐인 것 같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서쪽
나무가지 사이로 서쪽이 멀어서
가을 저녁을 기다린다.
가을이 저물 무렵은
이 세상의 나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도 저문다.
아우여 네가 돌아와
쓰러지도록 울을 치고
다시 살아가려는 아우여,
이제 세상을
너에게 맡기고
오늘처럼 떠나려고
저문 서쪽으로 길을 찾는다.
문의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추수 이후 고은
추수 이후(秋收 以後)
삼가 재(齋)를 올린다.
어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다 불러들일 수 있겠느냐.
이 나라의 내 어린 여행(旅行)의 길,
추수(秋收) 뒤의 빈 들에
한꺼번에 모여드는 어둠일지라도
길 가의 여러 곳에는
어디에도 태어나지 못한 넋들이 나타난다.
이 나라의 마른 상수리나무 잎새로
저문 십년송(十年松) 잎새로
모든 풀이 잠든 산 기슭에 떠도는 집 없는 넋들이
그 어둠 가운데서 희끗희끗 나타난다.
삼가 재(齋)를 올린다.
빈 들이 빈 마음을 만들지라도
그 마음으로 불러서,
집 없는 넋들아
이 나라가 아무리 떠돌게 할지라도
그리하여 그대들이 곧 이 나라일지라도
빈 들이 저무는 것을 보라.
또는 다 모인 어둠 속에
내 어린 소리로 불러서
그대들의 넋이 된다.
삼가 재(齋)를 올린다.
삼가 재(齋)를 올린다.
부르면 대답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추수(秋收) 뒤의 빈 들이 어둠 속에서 달려온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도 개자(芥子) 씨앗이므로
삼가 재(齋)를 올리면서
이 씨앗을 심는다.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집 없는 넋들아
내 어린 울음소리로 재(齋)를 올린다.
문의 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큰집 고모 고은
큰집 고모
우리 집안 아낙네와 가시내들과
가운데오촌네 집 뒷방에 모였다
가마니틀 아래
큰집 고모 오복녀 데려다가
모시개떡 해서 나눠 먹었다
간도가 어디인가
간도로 가는 오복녀
모시떡은 고사하고 언제까지나 울음바다 이루어서
집안 가시내들도 울음바다 이루어서
동네가 떠나가는데
누가 나서서 말리지도 못했다
간도가 어디인가
그렇게 울고 나서
다음날 새벽 보따리 하나 들고
큰집 막내오촌 따라 간도로 가버린 뒤
거기는 오줌 싸면
오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어서
활이 되어 걸리는 추운 곳이라지
거기 가서 어찌 사나
그 어여쁜 오복녀 고모
웃으면 오목하니 볼우물 쌍으로 열리는 고모
자주고름 접은 가슴 오복녀 고모
이 땅에서 가지고 갈 것이 무엇이랴
가장 많은 눈물 가지고 간 고모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투망 고은
투망(投網)
최근 나에게 비극(悲劇)이 없었다.
어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새벽마다
동해(東海) 전체(全體)에 그물을 던졌다.
처음 몇 번은 소위(所謂) 허무(虛無)를 낚아올렸을 뿐,
내 그물에서 새벽 물방울들이 발전(發電)했다.
캄캄한 휘파람소리,
내 손이 타고 내 온몸이 탔다.
그러나 새벽마다 그물을 던졌다.
이윽고 동해(東海) 전체(全體)를 낚아 올려서
동해안(東海岸)의 긴 줄에 오징어로 널어 두었다.
한반도(韓半島)여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내 오징어를 팔지 말라.
문의 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편지 고은
편지
지금 나는 넓은 후면(後面)을 돌아다 본다.
길들이 재회(再會)한다. 하나의 길이 굽이친다.
누가 저 길로 반짝이며 올 것인가,
새가 잘못 날을 때 죽음이 여기저기서 메아리 친다.
가장 멀리까지 들릴 새 소리 밑으로 나는 가야 한다.
그리하여 상회(上廻)하는 하늘에서 편지를 받는다.
받은 편지는 한 번 죽는다. 그리고 태어난다.
어떤 여자가 첫 인사의 길을 묻고
함께 가다가 어의(語意) 때문에 헤어진다.
새가 나 대신 떨어져 죽는다.
다 마친 일 속에 남은 일이 있다.
마침내 반짝이는 편지 속에 새가 운다.
지금 나는 밭에서 흙 묻은 손과 이야기한다.
편지의 구절들이 살아서 내 말이 된다.
저만큼 남은 처녀지(處女地)까지 가기 전에
귀빈(貴賓)인가, 먼 곳에서 지진(地震)이 지나간다.
그러나 내 앞으로 올 날들이 서두르고
하늘은 무엇인가를 자꾸 시키면서 높아진다.
편지는 저 너머의 것을 이 땅에 가지고 온다.
새가 죽은 뒤의 극약(劇藥) 묻은 가지에서
언젠가 날으고 잊어 버린 우뢰 아래서
곧 무너질 근조(謹弔)의 언덕에서
편지는 비처럼 내 일들을 적신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뜻으로 비가 왔는가.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폐결핵 고은
폐결핵(肺結核)
□ 1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하이드라짓드 병(甁)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木蓮)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기인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 버린다.
오늘 하루의 이 오후(午後)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은 기도(祈禱)와
아래 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언제나 실크빛 연애(戀愛)나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
누님이 보고 있다.
누님이 치마끝을 매만지며
화장(化粧)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 2
형수는 형의 말씀을 해준다.
형수의 묵은 젖을 빨으며
고향의 병풍(屛風)아래로 유혹된다.
그분보다도 이미 아는 형의 반생애(半生涯),
나는 모르는 척하고 눈 감아 버린다.
영웅(英雄)이 떠오르며
영웅을 잠 재우는 미인(美人),
형수에게 드넓은 우리 농지(農地)를 물어보려 한다.
쓸쓸히, 고개에 녹아가는
눈 허리의 명암(明暗)을 씻고 그분은 나를 본다.
혓바닥 작은 카나리아 핏방울을 구을리며
자고 싶도록 밤이 간다.
형의 사후(死後)를 잊는다.
형수는 밤의 부엌 램프를
나에게 맡기고 간다.
피안감성, 청우, 1960
풀을 베며 고은
풀을 베며
풀을 베다가 담배 한 대로 양성 쌍봉솔밭을 바라본다
바라보면 으레 바라보는 그곳이 얼마나 거룩한가
니기다소나무 숲 윗도리는 스스로 진한 그늘져서
마치 김장철 배추포기에 양념 차듯이
그늘이 소나무 가지마다 꼬옥꼬옥 채워졌다
해설피 오늘 낮일도 한 참밖에 남지 않았으니
땡볕 비껴났다고 누가 제멋대로 쉬라 하더냐
담배맛에서 문득 마른 풀냄새 아득하다
아 이 세상이 온통 풀인데 담배조차도 풀이었구나
베자 베자 어서 베허 풀과 함께 집으로 가자
오늘까지 베면 퇴비풀 스무짐째인가
어찌 풀 한 짐이 쌀 한 섬 아니라더냐
우거진 냇둑풀 추석 무렵 이발하듯 말끔히 베허
이것 한 짐 경운기에 싣고 돌아가면
경운기 소리에 하늘 아래 몸뻬 입은 내 아내가
새 사람처럼 울 밖으로 내다보리라
그렇다 내일 아침 푸짐한 이슬 내려앉기 뭣하리라
퇴비풀 베고 난 데 지나서 이번에는 쇠꼴을 베허야지
풀이 억셀 때는 영양가 없으니
이삭 나오기 전에 젊은 풀 베허 말려야지
올 가을걷이 마치면 빈 들 너그러이 건너
오랜만의 처가 늙은 처남에게 내 늙은 얼굴
기꺼이 기꺼이 마주하리라 도다녀오리라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하계학교 고은
하계학교(夏季學校)
십칠년전(一七年前) 오교실(五敎室)의 그 영원한 복도.
아베교장(校長)의 사나운 슬리퍼 소리.
창마다 넓은 마당이 펼쳐 있었다.
한 구석에
내가 몰래 묻은
개구리와 생일(生日)떡의 송장도 있으리라.
그리고 내 동무가 자귀로 끊은 도막 손가락도 있으리라.
이제 쇠털 공을 빼앗긴 슬픔은 갔다.
동무는 죽었고 나는 비를 맞으며 살아 있다.
십칠년전(一七年前) 하얀 이년생(二年生).
여름이 제일 두려웠다.
병후(病後)의 어머니 털을 보았다.
보리가 거둬지면
문둥이는 떠난다.
빈 밭으로 울면서 달아났다.
화재(火災) 속에서 무너지는 우리 집.
트래흠의 여름.
내 고치가 차일을 치고 팬티를 세 개나 입었다.
여름이 제일 두려웠다.
새 집의 담을 넘은 도둑놈.
한낮의 텅 빈 뜰에 퍼붓는 소나기.
나자레노․예스스.
그 뒤의 성난 매미소리들.
건넌 마을 모깃불,
아아 일조(一條)의 수직(垂直)의 어둠.
나의 첫 내면(內面)은 학교(學校)였다.
`학교(學校)는 어쨌을까?'
`학교(學校)는 어쨌을까?'
저녁때 비가 왔다. 뱀이 자꾸 들킨다.
옥수수 가루 포대를 쓰고
빈 방학(放學)의 학교(學校)로 갔다.
바야흐로 울창한 진드기풀이 마당을 덮었다.
내 교실(敎室)의 구슬픈 거미줄.
문은 삐걱삐걱하며 겨우 열렸다.
낯선 공간(空間).
습자시간(習字時間)의 대표작(代表作)들.
내 동무의 공동묘지 그림.
그리고 붉은 해의 미개(未開)의 얼굴.
군가(軍歌)를 불렀던 원족지(遠足地) 가사메 바다의 그림.
하얗게 늙은 먼지속의 교탁(敎卓).
내 벌(罰) 받는 걸상.
방앗간과 일본(日本)사람이 목을 맨 떡갈나무가 멀리 보인다.
몇 번이고 닦아야 할 흐린 창(窓)으로……
문득 동무들의 작품(作品)이 두려웠다.
그들이 다 죽어서
저 글씨로
저 그림으로
저 바깥 풍경으로 부활(復活)한 것이 두려웠다.
`아악!'하고
문 위에 부딪쳤다.
내 떨리는 발등에 피방울이 떨어진다.
푸르른 피.
그때 나는 모든 것을 새로 탄생시켰다.
당직(當直) 요네여선생(女先生)의 가슴에 나는 박혀 있었다.
그네의 젖 설사똥 제린 냄새.
그네의 하늘 속 두 눈
그네의 왼쪽 눈
그네의 눈, 눈, 눈……
나는 양파 구근(球根)처럼 구을러서 흐느꼈다.
그네의 깊은 가슴 소리의 뭉클한 골짜기.
눈 부신 기쁨.
허리 타는 슬픔.
아아 흙을 파 먹는 외로움
`……요네 선생님!'
빈 학교전체(學校全體)가 퇴학(退學)이었다.
내가 그 품 안에서 죽거나 해일(海溢)에 떠나려 가거나……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할아버지 고은
할아버지
아무리 인사불성으로 취해서도
입 안의 혓바닥하고
베등거리 등때기에 꽂은 곰방대는
용케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
어쩌다가 막걸리 한 말이면 큰 권세이므로
논두렁에 뻗어 곯아떨어지거든
아들 셋이 쪼르르 효자로 달려가
영차 영차 떠메어 와야 하는 사람
집에 와 또 마셔야지 삭은 울바자 쓰러뜨리며
동네방네 대고 헛군데 대고
엊그제 벼락 떨어진 건넛마을
시뻘건 황토밭에 대고
이년아 이년아 이년아 외치다 잠드는 사람
그러나 술 깨이면 숫제 맹물하고 형제 아닌 적 없이
처마 끝 썩은 낙수물 떨어지는데
오래 야단받이로 팔짱끼고 서 있는 사람 고한길
그러다가도 크게 깨달았는지
아가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란다
옛날 충무공이 일본놈들 혼내줬단다 기 죽지 말어라
집안 식구 서너 끼니 어질어질 굶주리면
부엌짝 군불 때어 굴뚝에 연기 낸다
남이 보기에 죽사발이라도 끓여먹는구나 속여야 하므로
맹물 끓이자면 솔가지 때니 연기 한번 죽어라고 자욱하다
삼 년 원수도 술 주면 좋고 그런 술로 하늘과 논 삼아
8월 땡볕에 기운찬 들 바라본다
거기에는 남의 논으로 가득하다 작년 도깨비불도 떠오른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
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
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
실컷 배웠으므로
실컷 배웠으므로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해연풍 고은
해연풍(海軟風)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다.
저녁 풀밭이 말라서 비린 풀 냄새가 일어나고
처음부터 말떼는 조심스럽게 돌아온다.
여러 산들은 제가끔 노을을 받아 혹은 가깝고 혹은 멀다.
또한 마을처녀가 밭에서 숨지는 햇살을 가장 넓은 등에 받고
이 고장에서 자라 이 고장에서 시집갈 일밖에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어제의 뭉게구름이 그토록 아름다왔을지라도
그 구름은 오늘 바라볼 수 없으며 벌은 날아가다 죽는다.
이 땅에 묻힌 옛피가 하루하루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아직 밭 일꾼과 귀 작은 소떼와 처녀들이 돌아오지 않은 채
화북(禾北) 마을의 갈치배는 희미꾸레한 돛을 올리고
제 마음에 따라 다른 바다를, 그러나 한마음으로 떠난다.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으며,
바다는 좀더 북쪽 별 나타날 곳으로 기울었는지
성산포(城山浦) 우도(牛島)배와 마주친 배들은 나비처럼 떠나간다.
그러나 먼 상하이는 밝을 것이고 서쪽 바다의 지평선엔
가까스로 돌아오는 애월(涯月)배들이 날카롭게 솟아 있고,
지는 해를 등지며 때로 바다는 오늘같이 인자하구나.
저 저녁 바다로 떠나지 않고 밭에서 돌아온 자여, 맞이하라.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노는 애들과 그대 적막한 가슴 앞을 적시고
이 고장의 질긴 협죽도(夾竹桃)꽃들을 마지막에 적시리라.
어느 돌담 앞에나 옛 노래인양 감태 잎새와 소라 껍데기가 있어도
가장 풍요한 빈 손으로 이 땅을 떠나지 않게 하고
저 깊은 밤 바다 위에서는 이미 별이 빛나기 시작하며
어여쁜 갈치 아씨가 잡혀 하느님처럼 실려 오리라.
밤은 알리라. 더구나 저 바다의 밤은 알고 있으리라.
어제는 사시나무였고 오늘은 마른 살 가죽에서 저물고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아득한 밤배 불빛을 씻어 오리라.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햇볕 고은
햇볕
어쩔 줄 모르겠구나
침을 삼키고
불행을 삼키자
9사상 반 평짜리 북창 감방에
고귀한 손님이 오신다
과장 순시가 아니라
저녁 무렵 한동안의 햇볕
접고 접은 딱지만하게 햇볕이 오신다
환장하겠다 첫사랑
거기에 손바닥 놓아본다
수줍은 발벗어 발가락을 쪼인다
그러다가 엎드려
비종교적으로 마른 얼굴 대고 있으면
햇볕 조각은 덧없이 미끄러진다
쇠창살 넘어 손님은 덧없이 떠난 뒤
방안은 몇 곱으로 춥다 어둡다
육군교도소 특감은 암실이다
햇볕 없이 히히 웃었다
하루는 송장 넣은 관이었고
하루는 전혀 바다였다
용하도다 거기서 사람들 몇이 살아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돛단배 하나 없는 바다이기도 하구나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햇빛사냥 고은
햇빛사냥
집집마다 신부(新婦)가 있다. 얼마나 기다렸느냐.
나는 제 길을 두고 멀리멀리 원주(圓周)를 돌아왔다.
늙은 말이 천둥소리를 미리 알 때
비로소 히뜩히뜩한 번개가 떨어진다.
아아 이 세상은 너무나 오래 되었다.
그리하여 햇빛이 산 너머 하늘에서 오고,
이제 내가 왔다. 이제 마을을 벗어나서
여의주(如意珠) 양파 밭을 넘어가면
그곳이다. 모든 햇빛이 모여 있는 곳은.
아무리 그대와 내가 달음질 쳐도
겨우 이르는 곳은 좀 더 아득하구나.
신부(新婦)여 눈을 감아라. 햇빛이다.
저 멀리까지 그대는 기다리고
내가 멀리멀리 돌아온 길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그대가 칠백이만(七百二萬)크샤나*의 순간들을
내 아우성의 일생(一生)에서 빼어 버린다.
어느 나라에도 없다. 이 팽팽한 줄의 햇빛은 없다.
그대는 늙지 않고 나를 버린다.
오랜 이야기들이 다 죽는다.
신부(新婦)여 그대에게 햇빛 뿐이다. 햇빛 뿐이다.
* 칠백이만(七百二萬)크샤나[刹那]: 이십사시간(二十四時間)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허허벌판 고은
허허벌판
가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온 길 삼천리(三千里)
서러운 약수삼천리(弱水三千里)
어느 세상에 꽃 하나 보랴.
뉘엿뉘엿 해 지면
나온 새 까막까치도 돌아간다.
가자.
하늘 아래 억겁(億劫) 그믐이로다.
잠 못 이룬 별들이라면
내 가문 가슴에 재워주마.
피리젓대 무엇하랴
한 마디 가락 아직도 남았다면
부는 바람에 버리고 가자.
가자.
가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참다운 이 이 땅의 벙어리로다.
백도라지야 백도라지야
너 어느 세상에 피어있느냐.
만(萬) 원혼(怨魂) 잠든 벌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입산, 민음사, 1977
호박꽃 고은
호박꽃
그동안 시인 33년 동안
나는 아름다움을 규정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것은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반역이다라고 규정해왔다
몇 개의 미학에 열중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 미학 속에 있지 않았다
불을 끄지 않은 채
나는 잠들었다
아 내 지난날에 대한 공포여
나는 오늘부터
결코 아름다움을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규정하다니
규정하다니
아름다움을 어떻게 규정한단 말인가
긴 장마 때문에
호박넝쿨에 호박꽃이 피지 않았다
장마 뒤
나무나 늦게 호박꽃이 피어
그 안에 벌이 들어가 떨고 있고
그 밖에서 내가 떨고 있었다
아 삶으로 가득찬 호박꽃이여 아름다움이여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화양동 서원 고은
화양동 서원
물님 좋구나 골짜기님 바위님 좋구나
화양동 서원
송시열 섬기는 서원이
서른여섯 개나 된다는데
그 가운데서 화양동 서원이
세도 으뜸이었다
심지어는
서원 하인배가 포졸 눈깔 다 빼어
한 놈만 한 쪽 눈알 남겨서
눈깔 빠진 장님 포졸 데리고 가게 했다
나는 새도 잡고
뛰는 짐승도 잡았다
순조 12년
평안도 90만
황해도 50만
강원도 17만
함경도 40만
경기도 7만
그 다음해
전라도 69만
충청도 18만
경상도 92만
이 지경으로 굶주린 백성 널리는데
이 백성의 도탄에 눈 딱 감고
묵패로 백성 잡아다가
족치고
볼기 쳐
온갖 것 다 빼앗아들이니
이 무슨 선비러냐 막된 짐승 아니냐
이런지라
대원군 세도 잡아
서원 7백 개 다 태워 버리고
마흔 일곱 개 남겼으니
대원군 가로되
충청도 사대부만치 나쁜 사대부 없고
평양 기생만치 나쁜 기생 없고
전주 아전만치 나쁜 아전 없다 했는데
이따위 서원 선비들
걸핏하면 헐고 뜯는 상소
복합상소
이거이 무슨 수작인고
이거이 무슨 지랄인고
이거이 무슨 언로이고 심로인고
만인보 2, 창작사, 1986
황사 며칠 고은
황사(黃砂) 며칠
겨우 우리 봄이 개나리꽃 진달래꽃
슬픈 진달래꽃을 피우려 하는데
무엇하러 청도(靑島) 장산(長山) 부황(浮黃)난 바다 건너
우리에게까지 무더기 무더기 몰려오는가.
우리 봄이 어떤 봄인지 아는가. 어떤 봄 어떤 아이들인지 아는가.
한 되 술 차라리 마시지 않고 가슴팍에 퍼부어 울었느니라.
가슴마다 가슴앓이 그믐달 넋을 묻어두고
우리 봄의 애비 에미 바다에 뜬 아지랭이로 울었느니라.
무엇하러 우리에게까지 몰려와
하룻밤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도 모자랄 봄을 덮어버리는가.
참담하구나. 너희들의 경기(京畿)땅 북경(北京) 천진(天津)이나 황하(黃河)벌판이나 덮어서
석양머리 호적(胡笛)소래 틀어막으면 되었지 무엇하러 몰려오는가.
우리 봄이 어떤 봄인지 아는가. 우리 계집들이 몸을 팔아서
몇 만(萬)의 몸으로 얻어온 봄인 것을 아는가.
우리 여말(麗末) 한말(韓末) 애비들의 철천(徹天)의 한(恨) 땅에 묻고
우리 아이들이 그 땅에 쓰러져서 이룬 봄인 것을
대륙(大陸)아. 너희들은 모르리라. 우리 개나리꽃 진달래꽃을 모르리라.
아아 머리에 인 것은 황사(黃砂) 뿐! 창대비 쏘내기 맞아
이 흉흉한 황사(黃砂)바람 다 씻어버려도
우리 울음 우리 울음의 가슴팍 씻게 못하는 것을.
또 무엇하러 우리에게까지 몰려와서
우리 하늘 우리 땅
우리들이 돌아오는 어둑 어둑한 모퉁이들을 다 덮어버리는가.
입산, 민음사, 1977
황토 고은
황토(黃土)
우리는 유사 이래
하늘보다
황토 위에서 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역사를
이와 반대로 써 왔습니다
민중이란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일하는 사람입니다
정든 쇠스랑 박고 바라보면
재 너머로 넘어가는
끝없는 황토길이 우리 절경입니다
저만치서
말없이 살고 있는
아버지 황토무덤이 우리 절경입니다
우리가 먹을 황토 있는 한
상여 떠나
우리가 송두리째 묻힐 황토 있는 한
한 삽으로 가득 뜬 황토 들어올려서
아메리카여 시베리아여
우리는 여기에 진리 있습니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