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립국악원 설립 30년사
-나의 프로필- 최정순
1995년 5월, 국악원 선배로부터 권유를 받고 처음으로 국악원 문턱을 밟게 되었다. 당시 내 나이 쉰한 살이었다. 그 무렵 IMF경제위기를 맞았지만 삼남매 모두가 취직하여 서울, 경기도, 경상도로 뿔뿔이 흩어져 엄마 품을 떠났다. 눈만 뜨면 일곱 개나 되는 도시락 반찬 걱정과 수북한 빨랫감으로 맨날 동당거리며 살았다. 그러다 갑자기 손발이 편해지니 나도 모르게 “빈 둥지 증후군”이 스멀거렸다.
이런 내가 무슨 용기로 국악원 문을 노크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가상하다.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을까. 학창시절 못 이룬 성악의 꿈을 찾고자하는 내재된 갈등의 폭발이었을까. 아무래도 좋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때 맞춰 타이밍이 적중한 것이다. 그저 국악원에서의 모든 것들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자기키보다 큰 가야금을 메고 유유히 나타나는 언니가 우아해 보였고, 민요며 고수, 쥘부채를 들고 목청껏 질러대는 판소리, 칼춤과 부채춤, 한량무를 덩실덩실 추워대는 무희가 부러웠다. 고민 끝에 많은 과목 중에서 한국무용반(금파)에 접수했다. 같은 해 12월엔 한국무용기초과정 수료증을 받기도 했다. 그 뒤 고수(이성근)기초반을 거쳐 판소리(송재영)반에 이르게 되었다. 집안일로 몇 년간 쉬기도 했지만, 다시 시작하여 10여 년이 넘게 일편단심으로 판소리(김미정)반에서 배우고 있다.
그럭저럭 국악원 문턱을 밟은 세월이 자그마치 20년에 이르지만 지금도 내로라할만한 소리꾼도 못되고, 판소리대회에 나가 본 일도 없을 뿐더러 반대표 상 한 번 받아본 일도 없다. 앞으로 남고 뒤고 밑진다는 장사꾼의 말처럼, 앞에서 배운 대목 한참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누가 나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또 묻는다 해도 소리가 좋아서 “그냥 배운다.”라는 말밖에 딱히 할 말이 없다.
본래 게으른 성격은 아니지만, 국악원에 다니면서부터 더 부지런해졌다. 집안일은 물론이고 갱년기에 들어 펑퍼짐해가는 중년아줌마의 마음을 다잡아주었으며 건강도 좋아졌다. 판소리는 나에게 에스트로겐 같은 것이었다. 가사를 외우면서 판소리에 대한 상식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섯 바탕이니 바디니 아니리니 추임새 등등, 예를 들어 오정숙, 안숙선 명창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니 얼마나 무식했던가. 제 2의 인생,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조금씩 찾아갔다. 그러면서 겉멋만이 아니라 내면의 멋도 조금씩 몸에 배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머리모양부터 바꿨다. 보글보글 라면머리에서 쪽머리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스타일을 바꾸지 못하고 쪽진 머리를 고집하고 있다. 요즘은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즐겨 쓴다. 이런 나를 사람들이 멋쟁이란다. 그러면 쑥스러워 멋쟁이가 아니라 쩨쟁이라고 응수하고 만다.
세월은 흘렀다. 이렇게 배운 판소리가 내 어깨에 날개를 달아줄 줄이야! 2008년, 판소리와 수필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왔다. 국악원도 다니면서 수필공부도 하기 시작하여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2008년 7월 15일 대구에서 열린 전국 수필의 날 행사 때의 일이다. 450여명의 수필가들 앞에서 식전행사 때 소리를 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겁도 없이 춘향가 중에서 “춘향모친이 나온다.”라는 대목을 불러 그때부터 내가 국악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날이었던가. 그날의 감격을 생각하니 나를 이끌어주신 ‘판소리’ 김미정 교수님과 ‘수필’ 김학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교수님! 정말 감사 합니다.” 그 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어느 면소재지 수박축제에서부터 작게는 50여 명이 모인 노인복자관 등 여기저기 공연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꽤 이름난 명창과 같은 무대에 서게 되었다. 명창을 보는 순간 주눅이 들어 얼마나 떨었던가. 무대공포증에 휘말리면 가사고 뭐고 생각이 달아나 버려서…. 공포증을 없애려고 내 나름대로 몇 가지 주문이 있다. 판소리는 판을 깨는 노래다. 나는 명창이 아니고 중창이다. 잇속이 좋다며 치아를 드러내고 함박웃음으로 그 장소에 맞게 너스레를 떨었다. “쇼맨십을 발휘하자. 옷이라도 화려하게 입자. 얼굴가득 미소를 짓자. 틀려도 자신 있게 틀리자.” 그러다보니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신명이 났다.
아파트에서 살기 때문에 이웃 눈치 보느라 장롱 문을 열고 연습도 해봤다. 이웃이야 그렇다 치고, 남편의 채근이 더 참기 힘들었다. 돼지 목 따는 소리만 지르지 말고 안숙선 명창처럼 해보란다. 강약도 감정도 없고 소리만 질러대지 말라며 개인레슨 선생님처럼 지적한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려니 싶다가도 말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은 귀명창이다.
이렇게 배운 판소리 실력으로 7년째 노인 일자리사업에 참여하여 유치원, 방과 후 교실, 지역아동 센터 등에서 재능기부를 나누고 있다. 때로는 싫증이 나기도 하지만 보람이 더 크다. 소리를 잘한다는 칭찬은 못 들었지만 분위기를 띄운다는 칭찬은 많이 들어봤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배운 대로 정확하게 새싹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점만은 자랑하고 싶다.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겨레만의 독특한 음악 “판소리” 누구나 빨리 접근할 수 있는 소리던가. 판소리를 즐기고 그 가치를 잘 살려나가야 하리라. “사철가”를 꼬맹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오늘도 “소귀에 경을 읽었다.”면서 혼자 웃기도하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병아리들처럼 삐악거리는 어린이들이 귀엽기만 하다. 먼 훗날에 가서야 할머니가 가르쳐준 사철가의 뜻을 알게 되겠지.
내 나이 겨우 일흔 둘이다. 결석하는 날이 잦지만 “평생대학”으로 생각하고 국악원을 다닐 것이며, 불러만 주신다면 재능기부도 나눌 생각이다. 끝으로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항상 문이 열려있는 전라북도립국악원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2016년 5월
판소리반 최정순
나의 프로필
一向 최정순
* 46년 12월 18일 전북익산출생
* 전라북도립국악원 한국무용기초, 고수기초과정 수료
* 전라북도립국악원 판소리 전문과정 수강
* 계간문예지《대한문학》수필 신인상 수상
* 행촌수필문학회, 안골은빛수필, 대한문학회,
영호남수필, 전북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윈
* 제 7회 행촌수필문학상 수상
* 수필집 《속 빈 여자》출간
* E-mail : reena3155@hanmail.net
* 주소: 덕진구 진버들5길10 대우2차아파트 205동803호
* 폰번호 : 010-7760-4541 063-288-4541
첫댓글 20여 년의 국악인생, 언제나 호라짝 웃는 해바라기 되어주세요.
이제사 봤어유.
회장님!
때~~~~땡큐입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