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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체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말로 자주 임신했다. 그러다보니 거동도 불편하여 방에만 박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잦은 출산으로 인하여 몸이 무척 허약해 있었다. 병치레가 많았지만 모차르트는 별로 살뜰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넉넉치 못한 살림이었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가 임신으로 몸이 무거운 것을 기화로 친구들과 함께 밤이면 밤마다 술이나 마시며 놀러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콘스탄체는 비엔나에 와서 어머니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하였으므로 세상물정에 대하여 어느정도 숙달해 있었다. 콘스탄체는 정부로부터 남편 모차르트의 연금을 받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에 모차르트를 후원해 주었으며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까지 도맡아 치루어준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을 통하여 레오폴드 황제를 알현하여 황제로부터 연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모차르트는 한 때 궁정악단에서 일했기 때문에 공무원으로 간주하여 연금을 받아낼수 있었다.
반 슈비텐 남작은 모차르트의 추모음악회를 주선하여 주었다. 콘스탄체는 추모음악회를 통하여 상당액의 수입을 보았다. 쉬카네더도 뷔덴극장에서의 하루치 공연을 콘스탄체를 위해 마련하여 입장료 전액을 전달한 일이 있다. 콘스탄체는 남편 모차르트의 유고들을 출판하는 사업을 펼쳤다.
그리하여 빚도 갚고 생활도 여유있게 되었다. 콘스탄체는 어린 아들 칼과 프란츠를 프라하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프라하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낸 사람으로서 모차르트와 친분이 두터운 프란츠 사버 니메체크의 집에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칼 토마스는 1794년에 니메체크의 집에 가서 3년 동안 살았으며 동생 프란츠 사버는 1795년에 가서 6개월 동안 살다가 돌아왔다. 니메체크는 아버지 없는 두 아이의 대부 역할을 하였다. 콘스탄체는 니메체크와 협동하여 처음으로 모차르트의 자서전을 작성하기도 했다.
소피아(톨스토이의 부인)
톨스토이의 아내 ' 소피아'
러시아가 낳은 역사적인 대문호 톨스토이 그리고 18살차이의 아내 소피아. 그녀가 아니었으면 톨스토이는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요상한 논리로 그녀는 3대 악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여든 두살이란 나이에 가출하여 객사한 그 때문에 그를 죽인 살인자처럼 낙인 찍힌 그녀.
그녀는 귀족의 딸로 배울만큼 배우고, 악필이었던 톨스토이의 글을 대필하고, 아이도 13명이나 낳아(그중 6은 죽었지만)유모 없이 길러낸 여인입니다.
2살에 톨스토이의 어머니가 죽고
모성에 배고픈 그는 젊은시절 이상한 여성편력으로 여자들과 하룻밤을 우습게 하는 호색한 이었습니다. (귀족이었던 그는 손쉽게 하녀들과 원나잇을 즐길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다 나중에는 친구의 딸 로리타마저 탐을 내는 지경에 이르렀지요.(인도주의를 내세웠던 그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지주였던 남편을 둔 소피아.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다손 쳐도 이런 상태의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줄줄이 낳아 길러준 그녀에게 돌을 던진 자는 누구냐~ 하고 외치고 싶은정도 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 톨스토이는 지주 생활을 청산하고,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폭탄선언을 합니다.…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아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반대하였다고 휙하니 가출을 하여 거리를 헤매다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역에서 객사한 톨스토이.
그렇게 남편을 보낸 아내 소피아..
그러나,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바라본다면, 인고의 세월을 눈물로 참아냈던 평범한 아내였던 것입니다.
크산티페(소크라테스 부인)
우리에게 알려진 악처의 끝판왕은 역시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가 아닐까?
친구 좋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들 앞에서 바가지로 머리에 물을 쏟아 부은 사건은 유명해서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벼락 뒤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지.” 라는 명언이 유명하게 전해져 온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몇 개의 명언이 또한 유명하다.
“새미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라든지, “꼭 결혼하세요. 좋은 아내를 가지면 행복해 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가지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잘 해내면 누구와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슬프지만 가슴에 와 닿는다.
물을 붓든 말든 달관한 표정의 소크라테스.
크산티페는 정말 악처였을까??
소크라테스는 좋은 지아비였을까?
여자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소크라테스는 50이 되어서야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은 해도후회, 안해도 후회란명언(?)을 남기게된 요인일 수도있다.
그때까지 그는 군인이었는데 장교가아닌, 귀신잡는 해병이었고,중무장 보병이기도했다.
그가 사랑한 동성애자 알키비아데스가 전쟁터에서중상을입었을때 목숨을 걸고 그를구해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을위해서는 목숨도 걸수있는 사내이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명령체제가 분명한 시민군이었다는 것은
‘악법도법이다.’란말을 남길수 있었고,묵묵히 독배를 마시게되는
기 본정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많아 결혼한 어린 아내에게는 어떻게했을까?
그는 아내에게 생활비 한푼 가져다 준적이 없다고한다.
밖에서는 제자들이나 시민들을 상대로 청산유수의 언변을 토하다가도 집에만들어오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체로 장터에나 또는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며 가르쳤다고한다.
지금의 학술토론회를 의미하는 ’심퍼지엄(symposium)’의
어원은 그의 ’대화’로부터이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는않았으니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거리를 걷다가
자기집앞을 지나게되었다.
크산티페가
남편에게 뭐라고 소리를질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들은 척도 안하고 제자들을 상대로 이야기만 계속했다.
화가난 크산티페가들고 있던 항아리의 물을 남편에게 끼얹었다.
여자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을 것이다.
집안 걱정은 눈꼽 만치도 안하면서 허구헌날 밖으로만나도는
남편이 왜 밉지않았을까!
이일로크산티페는 무려2,400년동안을 악처의 대명사가되엇다.
구정물을 뒤집어쓴 소크라테스가 그랬다고 한다.
‘천둥이치더니 하늘이 기어이 소나기를 쏟아붓는구나.’
내생각엔 ‘이마누라가미쳤나?’하면서
화를 벌컥냈다면 더 인간적이었을것 같은데
철학자라서 무언가 다르긴 다르다.
그의 동성애자 알키비아데스가 ’도데체
그런 여자를 어떻게참고사느냐?’ 물으니
소크라테스 한다는말
‘유익한바가 없지않네,
이런 마누라를 경험하고 나면 한마리야 생마를 길들이고 난것 같아서
웬만한 달변가는 다휘어잡을수 있다네.’여자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역시 얄미운 대답이다싶다.
크산티페는 50세나 먹은
늙은 소크라테스에게
시집와서 아들만 3을 낳았다.
람프로클레스,
스프로니스코스,
메네크세노스,
남편은 돈한푼 안들여오는데 젊은 여자가 아이셋을 어떻게키우며 가정을 꾸려 나갔을까!
돈한 푼벌어오지않으면서
밥은 먹었을테고
옷도 입었을것이며, 세수도하고, 발도 씼었을텐데…
크산티페는 무슨 짓을해서 가정을 꾸렸을까?
요즘 같았으면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소크라테스는 ’무능한남편’이라며 집에서 쫓겨나 노숙자가 되지않았을까!
나같은 세대는 바가지를 몹시 긁으면서도 어떻게해서라도
자식 먹이겠다고 길바닥에 좌판도 펴고,
남의집 일도 해주면서
어떻게하든 가정을 지키려 했겠지만
이혼까지 이르게 됐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혼했다는 말은 못들었다.
크산티페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며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얼마나 컸었으면 구정물을 부었을까. 생각하면 내마음도 쓰리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지식이란 네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것이다. ’라고. 젊은이를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토론하며 인정을 받았지만
아내 한사람의 인정을 받는데 실패함으로 도리어 그녀가 악처가되는데 크게 기여를 한셈이다.
크산티페는 정말 악처였을까?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실때쯤 막내 아들은 아기였다고한다.
늙어 결혼하여 아들을 셋이나 낳았다면 부부사이가 그다지 나쁜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난다.
그러니까 크산티페는 약간의 생활비를 가져다 주었어도 바가지 긁는 여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시대의 바람직한 여인상이란 그저 얌전히 집에서 아이들을 잘기르고
살림잘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현모양처가 될수 있는 그녀가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 때문에 악처의 누명을 쓰게된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것이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받고 있을 때 이소식을 들은 크산티페가 달려와 울며 ‘영감,무고한 당신이
무슨 죄를지었다고 죽음을 자초하는거에요?’
그녀는 남편으로써 아비로서는 무심했더라도, 남편이 죽을만한 죄를 지은 죄인은아니라고
생각하며 그의 아내로 살아온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소크라테스는…
‘그럼 당신은 내가 무슨 죄를짓고 죽기를 바라나?’ 또, 얄미운 대답이다.
죽는 마당에’ 미안하오!’라든가.
‘자식들을 부탁하오!’라든가.
그렇게 말해주면 어때서 끝까지…
크산티페가 악처의 대명사가 된데에는 후세사람들의 과장이
너무 심했던 이유도 있다고 하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더욱 빛나게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크산티페를 새롭게 조명하고자하는 사람들이있고,
사실은 악처가 아니라 남편에 대한 깊은사랑과 눈물겨운 희생정신
남편의 무관심에도 끝까지 가정을 지킨 현처였음을 인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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