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94호 상급을 바라보는 자는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 (마19:27~30)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편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고 말해서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갔고, 스데반은 예수를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천국에서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스데반이 좀 억울하지 않을까요.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누가 주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순교하겠습니까? 죽기 전에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면 되는데요.
세상의 어느 단체든지 상벌제도가 있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이치가 적용됩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우수상, 모범상, 개근상 등이 있고, 회사에서도 성과급과 진급이 있고, 스포츠계에서도 메달과 순위대로 포상이 있습니다. 왜 이런 제도를 마련해놨을까요? 상 주려고, 돈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일 잘해서 성과 내라고, 열심히 운동해서 기록을 깨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궁극적인 축복, 최고의 축복은 딱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생이고, 둘째는 상급인데, 영생의 기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임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롬10:10). 정말 쉽지요.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그런데 상급의 기준은 다릅니다. 100% 우리의 행위대로 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하나님은 왜 그러신대요? 이 세상에서도 사람 위에 사람이 있어서 괴로웠는데 적어도 천국에서는 공평해야 옳은 것 아닌가요?” 하십니까? 여러분, 늘 말해왔지만 천국은 철저한 계급사회입니다. 그나마 이 땅에서는 노력 여하에 따라 상황과 형편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한 번 정해진 계급에 절대 변동이 없습니다. 이 땅, 살아있을 때 일한 대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전도자가 말한 겁니다. 살아있을 때만 상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전9:4~5).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얇은 냄비 같지 않습니까? 은혜받았을 때야 방방 뛰지만, 그게 바로 식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걸 힘들어하고, 나태해지지요.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우릴 얼마나 잘 알고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상급제도를 둬서 그것을 에너지 삼고, 동력 삼아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지 말고, 힘내서 주의 일을 하라고 상급제도를 두신 겁니다.
여러분, 누구나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놀 줄 알고요, 저도 세상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못 들을 소리 들어가면서, 평생 안식년 한 번 못 누리면서 스스로 예수님의 종을 넘어 노예로 자원하며 살까요? 그날에 받을 상 때문입니다. 저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22:30)는 큰 상을 원합니다. 예수님과 한 상에 앉아 심판하는 수준의 상급이 대충해서 얻을 수 있을까요? 수석 졸업을 아무나 합니까? 그 상을 바라보기에 늘 힘이 넘치고 지치지 않는 겁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에 “이번 시험에서 1등 하면 아빠가 너희 반 전체에게 파티해줄게.”라고 약속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 녀석이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하더니만 진짜 1등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약속한 대로 파티를 해줬습니다. 상이란 게 이런 겁니다.
이시대 목사 손자 녀석이 ‘성경을 다 읽으면 네가 원하는 것 한 가지 해줄게.’라는 할아버지 말에 밤늦도록 성경을 읽어서 4개월 만에 성경 2/3를 읽었다지 않습니까? 녀석이 원하는 것은 핸드폰인데 벌써 받을 핸드폰 모델까지 다 정해놓고 밤이 되도록 성경을 읽는다지 않습니까?
상이란 것이 어린 아이도 뛰게 만든다는 겁니다.
여러분, 상을 바라보고 뛰는 것이 유치하거나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태릉선수촌에서 맹렬히 운동하고 있는 선수들은 올림픽과 국제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기 위해서입니다. 그에 따른 포상과 대우가 대단하거든요. 그게 저급한 일입니까? 목적한 바만 바라보고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고 집중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라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속물 같은 놈~, 지옥 갈 너희를 구원해줬으면 감지덕지해야지, 뭘 더 원해?” 그러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8~29)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옥에 갇히고 수없는 매를 맞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헐벗으면서도 그 길을 간 것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빌3:14)을 바라봤기 때문이었고,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지난 것도 그가 받을 상 때문이었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히11:26).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자 정의감에 불타 싸움에 임하기도 했지만, 아울러 승리했을 때 받을 혜택도 생각했고 챙겼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삼상17:26).
여러분, 이처럼 상을 바라보는 자는 담대해집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면 어마어마한 상금과 대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기에 선수들이 몸을 사리지 않는 겁니다. 제가 위협을 당하고, 만물의 찌끼처럼 여김을 받으면서도 담대히 이 길을 가는 것은 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3~35).
우리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의 마음과 우리를 구원하는 사명 플러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히12:2), 즉 상을 바라보셨기에 넉넉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뭡니까?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가 당신 앞에 복종케 되는 권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아시고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빌2:9~11).
봉사하는 분들이 겨울에도 새벽부터 종일 봉사하고, 주일이면 성가대가 종일 수고하는 것,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상을 알기에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컷 봉사하고 헌신하고 헌금해놓고 상을 못 받는 경우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한 것은 상이 없답니다. 예전에 제가 사업할 때 교회 일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했는데 다 떠벌이면서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사장님, 이사장님’ 하니 으쓱했지요. 그런데 나중 꿈에 보니까 제 하늘창고가 텅 비어 있더라고요.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공력을 시험하십니다. 진실되게 했는지,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했는지 다 판단하고 상을 주십니다(고전3:12~15).
요즘 신앙생활이 시들시들합니까? 눈이 자꾸 가자미눈처럼 세상으로 돌아갑니까? 교회 일에 미적거립니까? 상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상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분명히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열 고을을 다스리고, 다섯 고을 다스리고, 더는 예수님과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상이 여러분 앞에 열려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마세요. 그것을 늘 상기하세요. 내 생활패턴을 하늘의 상에 맞춰놓으세요. 그러면 그날 상을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 공짜가 없거든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할렐루야!
꿈과 목적이 있는 자는 지치지 않는다
졸업장만 받지 말고 우등상을 받는 자가 되자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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