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지는 의령 남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남이흥장군문화재’가 열리는 마을인데요. 오늘은 애국,충절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었던 근대학교 도호의숙 우물터와 마을의 풍년농사를 책임지던 고래샘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도호의숙 우물터를 찾아 도이1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는데요. 도이1리는 벼농사를 주로 짓는 농촌 마을이지만, 대호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한 농어촌마을이었다고 합니다. 마을 앞바다에는 꽃게, 실치 등 어족자원이 풍부했고, 쌀이 귀해 보리밥을 먹던 시절에도 바다에서 잡히는 해산물이 풍부해 반찬 걱정은 없이 살았다고 하네요.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는 의령 남씨 충장공파의 400년 터전입니다.
도이리가 남이흥 장군가의 터전이 된 것은 장군의 증조인 참판공 남세건이 1536년(중종 30)에 충청관찰사로 관내를 순시하다가 이곳을 둘러본 후에 자손들이 대대로 살 곳으로 점지함에서 비롯된다고 전해오고 있는데요. 차자인 이요당 남응룡이 이곳을 휴양지로 삼아 자주 왕래하였고, 그 후 충장공의 장자 의풍군 두극 공이 어머님을 모시고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이 일대의 13개 마을이 남유, 남이흥 부자의 사패지로 하사됐다고 하네요.
일제강점시기 신동저수지를 축조하기 전엔 바다와 접한 도촌 동리의 끝에 썰물 때에는 물이 빠지면서 연륙이 되고, 밀물 때에는 물이 들어와 섬으로 되는 낮은 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낮은 산에 의풍군이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풍광을 가꿨는데요. 그것이 유래되어 인근에서는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의 의령 남씨를 ‘도리(桃李)섬 남씨’라 부르는 것은 물론 도이리 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도이1리 마을회관에서 승산리 방면으로 100m쯤 가면 도호의숙 우물터 표지판이 보이는데요. 도호의숙은 애국·충절을 바탕으로 한 민족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시작됐다고 합니다.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강당(講堂)골에 있던 도호의숙은 의령 남씨 종중에서 그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종숙으로 시작되었다고 해요.
종숙은 남이홍의 8대 종손이며, 남석구와 그의 조카 남보영, 남계옥에 의하여 1850년대 초에 이루어 진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남보영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과 급제자 남규희와 백파 남택희가 그 뒤를 이었는데요.
이후 문호를 개방하면서 타성(他姓)도 함께 교육할 수 있도록 하여 도호의숙(桃湖義塾)으로 개편했다고 합니다.
개편후 유진하와 그의 제자 이철승 등 유학자들을 초빙하여 한학을 비롯한 민족 교육을 실시했는데요.
남이흥의 후손 20명이 무과 등과자로 배출되었고, 이후 일제 강점기 대호지 4·4 만세 운동의 주역으로 이어집니다. 뒤이어 도호 학당으로 학맥을 이어오다 일제의 강압으로 폐쇄된 후 도이리 강습소로 이어 왔는데요. 이 마저도 1930년에 폐쇄됐다고 합니다.
도호의숙은 한학 뿐만 아니라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으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는데요. 가학리 출생으로 성균관장을 지낸 이재서와 한학자 이병태를 비롯하여 의령 남씨 삼학사 삼명창이 도호의숙 출신이라고 하네요. 또한 남상락, 남계창, 남주원, 남상돈은 파고다 공원 3·1만세 운동 참여한 후 천의 장터에서 4·4만세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도호의숙에서 수학한 남상혁이 김복한 문하에서도 수학하면서, 김복한과 그의 제자 한용운, 김좌진 등도 당진 대호지면 사성리·도이리를 많이 왕래했다고 해요.
도호의숙에서 교재로 만들어 사용하던 화서집·성제집·지산집·직암집·여인 교육 유인집·송자대전 등 수 많은 분량의 서책, 간찰, 시문 등이 있습니다.
현재 명문 도호의숙에서 교재로 만들어 사용하던 교재들은 대호지면 도이리 충장사 경내 모충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하네요.
도호의숙의 교실로 사용하던 도이리 강당(講堂)은 없어지고 강당골에는 민가와 지명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도호의숙 앞에 있던 옛 우물을 기념해 도호의숙터로 보존하고 있다고 해요.
대호지는 문화역사 자원도 많지만, 마을의 평안과 주민의 안녕을 위한 지리자원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농경사회에서 꼭 필요한 지리자원 중 하나인 장정리에 있는 고래샘으로 이동했어요.
장정리는 원래 신라 경덕왕때부터 큰 우물이 있어 정곡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고래샘은 옛적부터 마을 주민들의 식수나 빨래터로 활용되었는데요. 주민들은 고래가 물을 뿜듯이 물이 잘 난다고 해서 고래샘이라 불렀다고 해요.
고래샘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당진시 일대가 가물었을 때도 가뭄을 모르고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농사짓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지만, 경지 정리할 때 마을의 상징인 고래샘을 없애지 않고 정원을 조성해 쉼터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래샘은 땅 아래에서 물이 솟는데 샘 옆을 지나가다보면 퐁퐁 솟는 물줄기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하네요.
한여름의 고래샘은 물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한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합니다.
또한 신기하게도 가뭄에는 마르지 않고 한겨울에는 얼지 않는데요. 폭설로 인해 주변 농경지에 얼음이 얼었지만 고래샘에서 퐁퐁 물줄기가 퐁퐁 솟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고래샘에는 지금도 다슬기, 우렁, 가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고 깨끗한데요.
방문한 날 고래샘에 생물이 다니 흔적이 있어 자세히 살펴 봤더니 우렁이가 보였습니다. 어릴적 보던 우렁이가 반가워 고래샘에 손을 넣었는데 정말 물이 따뜻한데요. 물이 깊어 우렁이를 눈으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
장정리 주민들에게 고래샘은 마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샘이라고 해요.
어린 시절엔 빨래를 하던 어머니가 찾던 곳이며, 동네친구들과 첨벙첨벙 물놀이를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또한 여름밤이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시원하게 멱을 감던 곳인데요.
1973년 지하수개발에 의해 물이 감소하고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1997년에 고래샘은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을의 상징인 고래샘을 보존하자는 마을 주민들의 한마음 한뜻이 모아져 오늘날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 옛날 3만 5천평의 논에 농업용수로 큰 역할을 해왔다는 말처럼 고래샘은 지금도 물이 부족한 논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도 해 마을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샘이라고 합니다.
대호지에는 지름이 산자락 따라 3개의 샘이 마을마다 하나씩 있었다고 해요.
석산개발로 지금은 지름이산이 다 파였다고 합니다. 그 영향인지 옆 마을 2개의 샘은 모두 말라 사라지고 고래샘만 남았다고 하네요.
고래샘의 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마을주민은 지름이산이 사라져서 고래샘의 물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는데요.
바닥까지 보이는 투명함을 자랑한다는 신비한 고래샘이 마을사람들에게 언제나 변함없이 고마운 수호천사로 함께 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