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했종교개혁은 유럽에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며 등장했던 개혁운동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17,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도 넓은 의미로는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면죄부,성유물 판매 등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에 대해 루터가 비판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많다. 우리의 눈에는 면죄부나 성유물 판매가 심각한 부패로 보이지만, 그 정도 부패는 이전 시대의 부패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부패에 대한 비판이 곧장 교리의 개혁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성직자들의 부패가 문제라면 부패한 성직자들의 행위를 비판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부패의 원인을 신학에서 찾았다. 루터에게 있어 교회의 부패는 잘못된 신학의 여러 결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종교개혁이 단순한 교회 정화운동을 넘어 사상사적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 시기를 기준으로 중세와 근대를 구분한다. 종교 개혁의 결과로 카톨릭에서 분리된 교회들을 통틀어 개신교라고 부른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은 영국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배경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적인 대립에서 야기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가 영국을 로마 카톨릭으로 바꾸기 위해서,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을 정부의 요직에 앉히고,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극심하게 박해하고, 영국 의회의 결정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찰스 2세가 왕정을 복구한 후, 정치적인 안정을 기하면서 청교도들을 극심하게 박해하고 프로테스탄트들도 박해하고, 로마 카톨릭을 우대하는 정책을 구사하면서, 제임스 2세는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더욱더 친 카톨릭적으로 회귀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1688년 영국의회가 네덜란드 윌리엄과 힘을 합하여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윌리엄과 그의 아내 메어리를 윌리엄 3세와 메어리 2세로 왕위에 옹립한 것이다. 이것이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교체를 순탄하게 이룩했다고 해서, 역사에서 명예혁명이라고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퇴위를 당한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을 가게 된다. 1688년, 윌리엄 3세는 왕위에 오른 그 이듬해에 권리장전을 발표하고, 영국 역사의 이정표를 놓았다. 의회 민주주의가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왕이 의회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이다. 1543년 폴란드 출신의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행성들이 태양을 돌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웠고,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십 년 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했다.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난 그는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관측했다. 이를 통해 지동설이 맞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로마 교황청이 그를 종교 재판에 넘기기도 했다. 이어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케플러가 천문학 혁명의 중심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정·발전시켰다. 케플러 법칙은 그 후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
케플러 우주선과 케플러 우주만원경으로 유명한 케플러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리니쿠스의 주장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유럽의 과학발전은 독일계 유대인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졌다. 그는 광양자설, 브라운운동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하여 발표했고,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연구가 미국의 원자폭탄 연구인 맨해튼계획의 기초가 되었다.
# 1,588년 , 영국의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16세가 말 스페인은 신대륙의 황금과 보물을 독점한 최강의 해양제국이었고,영국은 상대적으로 약한 해군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스페인의 식민지인 네델란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해적들을 이용해 스페인 상선들을 공격했다. 이런 배경에서 스페인은 영국을 침략하기 위해 도버해협에서 해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세계3대 해전의 하나인 칼레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것이다. 이는 세계권력의 이동이자 해상권 장악을 뜻했다. 그간 스페인 제국의 기세에 눌려 살았던 영국이 이를 계기로 중상주의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그들 영해에서만 스페인 배를 몰아낸 게 아니라 미국과 인도 항구에서도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쫓아내 버렸다.이로써 영국은 북미에 많은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사의 분수령이 된 계기가 된다. 스페인 제국이 지고 영국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항해조례를 통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 탄생 ,그리고 훗날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준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 1,760년 ,영국의 산업혁명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기 개량을 시작으로 한 기술 혁명으로,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 사이에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 수공업에 기초한 작업장들이 기계설비를 갖춘 큰 공장으로 전환되었으며,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었다. 산업혁명은 19세기 유럽을 넘어 북미, 그리고아시아로까지 확산되었다. 독일의 사회주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엥겔스는 시대 구분으로서 1760~1840년대에 진행된 제조업, 공업의 기계화와 공장화를 처음으로 '산업 혁명'이라고 지칭했으며, 역사학자 토인비도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대중화되었다. 모든 역사가들이 근, 현대의 많은 성취와 문제가 이 산업 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현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회 제도의 거의 모든 것이 산업 혁명 시기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양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15세기와 21세기를 비교하자면 인구는 5억에서 80억으로 늘었고, 전 세계 총생산은 2,500억 달러에서 103조 달러로 불어났다.
#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1700년대에 미국은 유럽 열강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식민지 국가로 존재했다. 식민지 주민들은 지역 통치에서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누렸지만, 유럽 국가들이 행사하는 전반적인 통제는 분명했다. 세계적인 무역, 상업, 문화적 교류는 미국의 식민지를 유럽의 식민지와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정착민들이 무역에 제한을 받고, 대리인 없이 과세에 직면하게 되면서 마찰을 일으켰다. 동시에 프랑스와 스페인을 비롯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도 북미에 독자적인 거점을 구축하려고 노력하면서 복잡한 지정학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미국과 유럽 간의 유대를 약화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이 겹치면서 긴장감이 올라갔다. 1765년 인쇄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법이 시행되자,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격렬히 반대했다. 보스턴 대학살과 차사건은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 시민 불복종 행위로 이어졌다. 1774년, 영국의 억압에 대항하는 식민지인들의 단합된 입장을 반영하는 최초의 대륙의회가 소집되었다.
1775년, 렉싱턴 전투와 콩코드 전투는 무력 충돌의 시작을 알렸다.미국이 독립을 향한 길을 굳건히 다진 결정적인 계기는 독립선언서였다. 열렬한 결의의 분위기 속에서 작성된 이 문서에는,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과 열망, 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이상이 담겨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선언문의 주장은, 식민지 주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전 대륙에 울려 퍼졌다.미국 독립선언서 작성 과정에는, 훗날 미국의 상징이 되는 인물들이 참여하여 공동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토머스 제퍼슨은 문서의 기본 문구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퍼슨의 설득력 있는 산문은 독립, 인권, 자치에 대한 식민지 주민의 요구를 구체화했다.
1776년 7월 4일, 대륙의회는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상징하는 독립선언서를 승인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선언문의 서문은,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영원한 선언이 되었다. 자결권을 주장하고 영국 폭정의 굴레를 벗어던지자는 선언문의 핵심 메시지는, 미국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미국 독립선언서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자유, 평등, 행복 추구라는 선언의 원칙은, 억압에 맞서 싸우는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
에서는 이 선언이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주어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였다. 19세기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혁명 역시 ,미국 모델에서 영감을 얻어 자치와 자율을 옹호했다. 이 선언은 전 세계적으로 입헌주의와 민주주의 체제 확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국민 주권과 제한적 정부라는 개념은, 여러 대륙의 헌법과 정치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정부가 피지배자의 동의로부터 권력을 얻는다는 선언의 주장은, 권력 역학 관계와 정당성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시켰다.선언의 영향력은 정치의 영역을 넘어 사회와 문화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선언은 개인이 억압적인 제도에 도전하고, 정의를 옹호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 민권 운동가들은 이 선언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했다. 선언문의 원칙은 문학, 예술, 음악에도 스며들어 낭만주의의 꽃을 피우고 개인의 자유를 표현하는 데 기여했다. 이 선언은 유럽의 통치로부터의 결정적인 단절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유, 평등 자치의 원칙에 기초한 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 유산은 오늘날까지 미국과 전 세계의 지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