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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지역 지연작전
제 1 절 작전 개요
동해안지역 지연작전은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주축이 되어 1950. 6. 29일부터 7월 13일까지 북한군 제5사단과 동해안으로 상륙한 제766부대, 제945육전대의 남진을 축차적으로 저지시킨 공방전이다.
동해안은 강릉-옥계-삼척-울진-영해-영덕으로 해안선을 따라 전투가 이루어지는데 내륙은 태백산맥의 높은 준령이 동서를 구분하고 있다.
6월 27일 강릉을 점령한 북한군 제5사단은 동해가도로 남진하기에 앞서 상륙부대인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를 울진 방면으로 선행하게 하여 제5사단이 포항으로 신속하게 진출하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반면에 국군은 6월 28일 제8사단이 강릉에서 제천방향으로 전환시키고 대신 부산에 있는 제3사단을 투입해 지연 저지하도록 한다. 그러나 서부전선의 수도권 방어가 무너지자 제22연대를 수도권 방어에 투입하고 제23연대 1개 연대로 동해안을 전담토록 하였다. 이에따라 제23연대는 기차로 대구를 경유하여 포항에 도착한 다음 29일 차량으로 울진 남쪽의 왕피천까지 진출하였다.
따라서 7월 1일에 울진을 점령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병행하면서 동해안 60km의 공간에서 지연전을 수행한다.
그러나 북한군 제5사단은 1개 연대를 산악기동토록 하여 스스로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진출속도가 지연되어 사전에 침투한 육전대와의 협동작전이 원활하지 못해 그들의 작전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국군과 미군은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에서 지연전이 실시 되고 있었다.
제 2 절 북한군과 국군 현황
1. 북한군 상황
북한군 제5사단은 사단장 소장 김창덕부터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보병 3개 연대 연대장 모두가 같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는 총참모부의 직접 통제하에 운용되는 부대로 개전 당일 임원진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88여단 출신 오진우 총좌가 지휘하는 부대로 주로 남로당원 및 강동 정치학원 출신으로 편성되었으며 상륙 직후에 일부 병력은 일월산-영양-청송을 향하여 태백산맥으로 들어갔으며 일부가 울진 방면에 죽변에 위치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후방에서 무장폭동을 유발하고 사전 침투한 유격대(*제주 4.3사건의 주범인 김달삼이 이때 들어와 보현산 일대에서 활동후 울산 신불산지역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전사에는 정선 고양산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 되고 있다.)와 지방 공비와의 연계를 꾀하면서 철도와 수송시설을 파괴하고 국군의 퇴로 및 증원부대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제945육전대는 개전초기에 정동진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1경비여단과 합동으로 강릉 북방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고 동해가도를 따라 포항으로 진격하는 임무였다.
가. 북한군 전투 편성
동해안지역에는 제5사단과 유격부대인 제766부대, 해군의 945육전대가 투입되었다. 북한군 제5사단은 3각 편제로 3개 보병연대(제10.11.12연대), 포병연대 예하의 3개 포병대대, 대전차대대, 중기관총대대, 공병대대, 교도대대, 기동정찰중대, 정보소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제766부대는 유격부대로서 3개의 보병대대, 포병대대, 통신대대, 강 . 표대대로 편성되었다. 제945육전대는 3개의 상륙 경보병대대와 1개 통신중대, 1개 후방근무대로 편성되었다.
제5사단의 화력은 122mm곡사포 12문, 76mm 사단포 및 연대포 36문, 76mm자주포 16문, 대전차포 48문, 120mm박격포 18문 등 130문이었다.
동해안 지역의 주요지휘관은 제5사단장 김창덕 소장(조선의용군 출신), 제766부대장 오진우 총좌(88여단 출신), 제945육전대는 미상이다.
나. 공격준비태세
서을을 점령함으로서 제1단계 작전을 완료한 북한군은 주력의 재편성과 함께 6월 30일을 기해 제2단계 작전에 돌입한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신속히 한강을 도하하여 국군의 잔여병력을 포위 섬멸하고, 북위 37도선인 평택-충주-울진선으로 진출하여 미군의 전투전개를 좌절시키고자 하였다.
북한군의 공격 목적은 새로운 물자 및 부대들이 한국으로 집결되는것을 봉쇄하는 것으로써, 그 목표를 부산과 울산, 포항 등 한반도 남쪽의 주요 항구를 신속히 장악하는 것에 두었다. 북한군 지도부는 주력을 수원-대전-부산과 원주-안동-포항 방면으로 집중한다. 그리고 태백산맥으로 인하여 내륙과단절된 동해안지역에는제5사단을 주축으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여 영덕-포항을 공략하고 부산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1) 북한군 제5사단
북한군 제5사단은 개전 초기 제1경비여단에 배속되었던 제10연대가 6월 29일에 복귀하였다. 6월 29일과 30일에 강릉에 집결하여 제2단계 임무를 부여받는다. 제11연대가 국군 제8사단을 추격하고, 제10연대와 제12연대가 동해가도를 따라 영덕-포항을 조기에 점령하는것이다. 7월 1일부터 작전에돌입한다.
(2)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
이 부대들은 총참모부에서 직접 통제하는 부대였다. 개전 당일 임원진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 상륙 직후 일부병력이 일월산=영양-청송을 향하여 태백산맥으로 들어갔으며, 일부가 울진 북방의 죽변에 위치하였다. 제766부대의 임무는 전선 후방에서 무장폭동을 유발하고, 철도와 수송시설을 파괴하며 국군의 퇴로 및 증원부대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제5사단이 신속히 포항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있엇다.
제945육전대는 개전 초기에 정동진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1경비여단 예하부대들과 합동으로 강릉 북방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동해가도를 따라 포항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다. 전투력 수준
동해안의 북한군은 제5사단이 약 1만 1,000명,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가 약 3,000명 수준이었다.
라. 인접부대 상황
동해안지역 우인접 부대는 개전 초기 인제-홍천 축선을 통해 횡성과 원주로 진출하는 제12사단이었다. 제12사단은 제1단계 임무가 종료된 이후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았다. 즉 원주-제천 방면과 원주-충주 방면의 2개 방면으로 국군을 추격하는 것이였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제12사단은 제30, 32연대가 포병연대(-)의 화력지원 아래 제천-단양 방면으로 진출하고, 1개 포병대대와 사단포병 예하의 2개 포대로 증강된 제31연대가 원주-충주방면으로 공격을 담당하였다.
2. 국군 상황
가. 제3사단 현황
동해안 지역 지연작전 상황도
소곡리
적766-1개 대대 죽변
정림리
국23-2대대
고산성
국23-1대대 울진
신림리
국23-2대대
국23-1대대
왕피천
광천 수산리 국23-3대대
소천면
게
적766-1개중대 릴
재산면 라
준
청기면 동
지
역
평해
영양 독립제1대대
동천
영해
반면 국군 제3사단은 '47. 12.1일 부산에서 제3여단으로 창설되며 이때 부산주둔 제5연대, 대구 주둔 제6연대, 제주도 주둔 제9연대를 기간으로, '48년 제주 4.3사건, 여순 10.19사건, 대구 6연대 반란 사건이 발생하자 진압부대로 차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9연대를 제5여단에 편입시키고 새로이 3개연대(제15,16,18연대)를 창설하여 제15연대는 '48. 11월 25일에 제5여단에, 제18연대는 '49. 2월 1일부로 제2여단에 각각 편입되었다.
이어서 '49. 3월 15일에 반란 사건에 연류된 제6연대가 해체되고 4월 15일에 제22연대로 개편되고 6월 20일에는 제23연대가 창설되고 제16연대가 제2사단에 편입 되었다. '49. 5월 12일에사단으로 승격 되면서 '49. 7월 10일에 제5연대를 제2사단에 편입시키고 예하에 22,23연대만을 보유하였다. 따라서 제22연대는 대구에서 제23연대가 부산에 위치하면서 '50. 6월 25일에도 태백산 서쪽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계획을 광주의 제5사단과 합동으로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면남침으로 이 작전을 중지되고 명령에 의거하여 제22연대와 사단 공병대를 서울로 올려 보내고 6월 27일에 적이 강릉을 점령하자 사단은 명에 의거 6월 28일부로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 병력을 사단에 배속 시켰다. 독립 제1대대는 일명 서울유격대로 '48. 12월에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북한의 남파 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창성된 부대였다. 그리고 영등포학원 부대는 '49. 2월 29일에 서북청년단원 367명을 기간으로 하여 유격전 임무수행을 위해 창설되었으며 창설 당시에 단대호는 호림부대였으나 '49. 8월 13일에 영등포학원으로 개칭하였다.
주요지휘관은 사단장은 유승렬 대령에서, 7월 10일부로 이준식 준장이, 참모장에는 우병옥 중령에서 7월 7일부로 최석 대령이, 제23연대장은 김종원 중령이고 독립 제1대대장은 김종순 중령, 영등포학원 부대장은 홍성준 소령이었다.
나. 전투준비태세
제3사단은 개전초기에 사단 사령부와 제22연대가 대구에, 제23연대가 부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쟁이 발발하여 6월 25일 제22연대와 제23연대의 대전차포 중대 및 2개의 중화기 중대가 한강선 방어를 위해 차출됨으로써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제3사단장은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의 배속을 요청하고, 공비토벌 및 주요 산업시설 경계에 분산배치되어 있던 제23연대 병력을 부산으로 집결시켰다.
이와 더불어 사단장은 6월 25일 12:00시부로 경상남.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산. 대구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300대의 트럭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북한군이 해상으로 침투하는 것을 조기에 포착하기 위하여 죽변(울진 북동쪽 7km)이남의 해안마을 청년방위대를 중심으로 해안감시망을 급히 편성하였다.
제23연대는 6월 28일 출발해 29일 울진의 왕피천 남안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였다. 제23연대 출동 이후에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 병력이 포항에 집결되었다.
다. 전투력 수준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 영등포학원 등으로 병력은 약 3,400명이었으며, 장비는 1개 중화기 중대가 보유한 박격포와 2.26" 로켓포를 제외하면 대부분 소화기만을 보유하였다.
라. 인접부대 상황
제3사단의 좌인접 부대는 제8사단이었다. 제8사단은 6월 27일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철수한 후 육본 명으로 7월 2일 제천으로 철수한 후 7월 3일 신림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충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따라 7월 5일 제천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대구를 경유 목적지로 이동과정에 다시 이동명령이 철회되어 단양으로 복귀하였다.
단양으로 복귀한 제8사단은 제21연대를 단양읍-고수리에 이르는 10km의 남한강변에 배치하고, 제10연대를 예비로 단양주변의 경계와 북한군의 기습에 대비코자 하였다.
제 3 절 울진 전투
1. 전투 개요
울진 전투는 국군 제3-23연대가 북한군 제766부대와 7월 1일부터 7월 2일까지 울진을 중심으로 치른 공방전이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오미산(1,071m), 통고산(1,067m), 일월산(1,219m) 등 1,000m 이상의 준령이 이어지고, 동쪽은 200m 전후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바다에 이른다. 하천은 남대천, 왕피천 등이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동해안의 요충지인 강릉이 북한군에게 피탈되고, 국군 제8사단이 대관령을 넘어 제천으로 후퇴하게 되자, 강릉에서 울진에 이르는 92km의 지역은 무방비 상태로 북한군에게 개방되었다. 이 지역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에 올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군 제3사단은 제1차 저지선을 편성하기 위하여 제23연대를 이 곳에 투입하였다.
6월 28일 부산을 출발한 제23연대는 열차편으로 대구를 경유하여, 29일 10:00시에 포항에 집결한 후 제1대대를 선발로 하여 울진으로 향했다. 7월 1일 제23연대는 울진시가지 공격을 시도하여 울진 북쪽 해안도로와 울진 시가지 확보에 주력하면서 남대천과 왕피천을 이용하여 제2, 제1, 제3대대(-)순으로 북한군의 남하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죽변으로부터 남하한 북한군의 공격을받아 제23연대는 방어진지 편성 3시간 만에 울진을 포기하고 제2차 저지선인 평해로 철수하게 된다.
2. 전투 경과
가.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의 울진 점령
(1) 제23연대의 북상
동해안의 요충지인 강릉이 6월 27일 북한군에 피탈되고, 국군 제8사단은 대관령을 넘어 제천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동해가도는 무방비 상태로 북한군에게 개방된다.
이에 육군본부는 6월 28일에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권을 제3사단에 배속시켜, 제3사단에게 북상하여 적을 포착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에 제3사단은 이미 제22연대와 사단 공병대, 사단 통신대를 차출하여 서울로 이동시킨 상태로 가용 병력이 제23연대와 배속된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 병력뿐이었다.
이로한 상황에서 사단장인 유승렬 대령은 제1차 저지선으로 삼척을 고려했으나 적의 남하정도르 고려할 때 울진이 선택하였다. 제23연대가 열차로 부산을 출발할 때 제3사단 미고문관인 에머리치 중령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이 제23연대를 엄호하기 위해서 17:00시까지 포항에 집결되었다. 원래는 이 배속된 부대를 사단장은 대구와 부산지역 경비 업무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6월 28일 제23연대는 열차편으로 부산을 출발하여 대구를 경유하여 29일 10:00시에 포항에 집결하였다. 이어서 차량편으로 울진으로 북항하게 되는데, 당시 제23연대는 제22연대에 1개 대전차포 중대와 2개 중화기 중대를 차충당함으로서 지원화력이 국히 열악하였다.
선두로 진입하던 제1대대 제1중대는 울진 남쪽 2km,지점인 수산리부근에서 피난민과 일부 지역주민으로부터 북한군이 이미 울진시가지에 진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제1대대는 수산리 서북쪽 122고지를 점령하고 제2대대가 읍남리, 제3대대가 노음리에 각각 배치되었다. 6월 30일 07:00시에 수산리의 제1대대 제2중대가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 유격대 12명을 포착하여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한 결과, 울진을 점령한 병력은 250명 안팎이며, 6월 25일 해안으로 침입한 유격대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제5사단이 도달할 때까지 울진을 확보하는 것으로 국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울진교를 비롯하여 남대천 연안에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당시 동해안지역으로 유격부대인 제766부대와 육전대인 제945부대가 각각 임원진과 정동진을 비롯한 해안 곳곳에 상륙하였다. 미극동군사령부 정보에 의하면 동해안 4개 지점에 3,200~3,800명의 북한군이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문진에 400~600명, 호산(삼척시 원덕읍)에 2,000명, 울진에 400~600명, 구룡포에 400~600명 등이다. 여기서 주문진에 상륙했다고 하는 병력이 정동진에 상륙한 제945육전대이고 나머지 지역은 제766부대였다.
제766부대는 6월 25일 03:00시경 주문진 앞바다를 통과하여 07:00시경 강릉 남쪽 임원진에 상륙하여, 국군의 증원부대 차단, 후방교란 주력 부대의 공격촉진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다.
임원진리 왕바위 해변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무방비상태인 마을을 점령한 후 태백산맥, 삼척, 울진 등 3개 방면으로 침투하엿다. 이들이 울진을 점령한 것은 26일 자정 무렵이었다. 6월 27일 09:45분에 제3사단은 울진경찰서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적이 계속 남하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울진을 점령한 상륙부대는 제766부대의 선발대로서, 이들은 전쟁 발발 전부터 통고산, 일월산 방면에 할동중인 게릴라들과 결합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북한군 제766부대는 6월 30일에는 북상하는 제23연대 병력과 교전을 벌리기도 했다
한편, 제945육전대는 6월 25일 정동진에 상륙한 후 1개 대대규모가 강릉을 목표로 산두곡쪽으로 북항하고, 1개 대대규모는 일부 병력이 밤재를 차단하고 일부가 부근의 흑연광산을 점령하여 트럭과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보급품을 하역하고 옥계를 목표로 남하한다. 이들의 임무는 동해가도를 차단하여 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전선부대들과 합동으로 강릉 북방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륙 후 강릉으로 북상 중에 군선강 유역에서 제8-21연대와의 교전으로 많은피해가 발생하고 그 들 중 일부가 동해가도로 남하하였다.
당시 북한군 제5사단은 6월 29일과 30일에 예하 3개 연대가 강릉에 집결하여 제2단계 임무를 부여바든ㄴ다., 제11연대가 국군 제8사단을 추격하고, 제10.12연대가 동해가도를 다라 영덕-포항을 조기에 점령하는 것이다.
제23연대장은 각 부대에 수색대를 운용하여 적정을 파악한 결과, 북한군 주력이 아직 울진시가지에 돌입하자 못한 것으로 결론내고 7월 1일 04:00시를 기해 울진 탈환작전계획을 시행한다.
(2) 제23연대의 울진 탈환전
울진 탈환전 상황도
죽변
적766-1개 대대
고산성 양정동
적 1개 중대 울진
남대천
국23-2대대
국23-1대대
수산리 왕피천
국23-3대대 국23연대
제1대대는, 당시에 남대천이 불어난 상황에서 울진교를 확보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으나 정찰결과 유일한 접근로였다. 교량을 중심으로 구축된 800m의 제방을 공격개시선으로 하여 공격한 결과 제1소대 절반이 전사 도는 부상을 입는다. 그러나 읍남리 방면에서 측면으로 공격을 개시한 제2대대가 남대천 도하에 성공함으로서 북한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2대대는 울진시가지의 서북쪽으로 남대천 너머에는 고성리(울진의 북쪽 500m)의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따라서 정찰결과 강폭이 넓어지는 만곡부의 수위가 가슴에 닿을 정도라는 것을 확인하여 도섭장소로 선정하였다. 중대규모가 도하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대응은 전혀 없었다. 고성리 야산을 목표로 돌진하는 시기에 적의 대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특공조가 투입되어 북한군 진지를 파괴함으로서05:30분경에 고성리 야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3) 제23연대의 울진시가지 점령
제2대대가 남대천 도하에 성공은 울진교를 통한 시가지 점령임무를 받은 제1대대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여, 제5중대가 울진초등교 일대의 북한군 산병호를 탈튀한 후 강변을 따라 울진교 방면으로 진출한다. 이에 제1대대가 울진교를 장악, 07:00시경 울진시가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연대는 이번 작전에서 생포한 15명의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이들은 동해안에 상륙한 부대의 일부로서 이날 중으로 주력이 동해가도를 따라 남하할 것이라는 첩보를 얻었다.
이에 연대는 수색대를 죽변으로 진출시키고, 교량 폭파에 대한 대책을 수립했으나 이미 사단 공병이 서울로 차출되어 감으로서 울진교와 수산교는 파괴가 불가능하여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제1대대장이 울진교 폭파를 건의했으나 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불가함을 알리고 대대에 처리를 위임한다. 당시 연대장은 방어의 축을 울진시가지보다 왕피천의 수산교와 그 이남의 개활지에 두고 있었다. 이에 연대지휘소를 제3대대 지휘소와 같이 145고지(수산교 남쪽 2.2km)에 설치하여 왕피천을 중심으로 저지진지를 확보하였다.
나. 북한군의 반격과 제23연대의 울진 철수
제23연대의 경계부대인 제2대대가 양정리-138고지간의 고갯길을 중심으로 방어 배치를 완료한 것은 7월 1일 08:00시경이었다. 이때 수색대가 죽변 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북한군 상륙부대의 주력이 울진으로 남하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당시에 북한군은 패주했던 병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주력이 6대의 장갑차를 동원하여 동해가도를 따라 진출했으며, 고갯길에 배치해 있던 국군 제23-6중대는 북한군의 출현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교전 15분 만에 진지를 탈취 당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을 울진에서 견제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인데 이곳에 배치되었던 제5중대마저 제대로 조준사격도 제대로 못한 채 물러났다.
이렇듯 초전에 북한군에 밀리는 상황에 제2대대장은 병력보전을 위해 남대천 이남으로 철수해야한다고 연대에 건의하였으나, 연대장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틸 때까지 버티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참모진의 건의로 제2대대의 철수가 승인되었다. 울진시가지 탈환한 지 3시간만인 10:00시경에 다시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또한 우회하는 적에게 퇴로를 차단당 할 위기에 처하여, 연대장은 제1대대에 제2대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아날 12:0시까지 전 병력을 왕피천 이남으로 철수하도록 하여 전투한번 없이 왕피천 북쪽 지역을 비어주고 말았다.
이후 제23연대는 울진을 점령한 북한군이 왕피천 남안으로 진출하자, 7월 2~3일 평해를 거쳐 영해로 철수하였다.
3. 전투 결과
제23연대는 종래 공비토벌작전만 수행해 오던 부대로서 정규전에 대한 경험 및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상급부대로부터 적에 관한 정보를 받지 못하던 연대는 적을 공비토벌작전ㅇ에 상대하던 유격병력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울진 전투에 투입된 북한군은 비록 정규사단은 아니지만 종전의 유격대와는 규모나 훈련, 그리고 장비 면에서 월등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정규전 수준의 전력이었다.
적정이 불명확하고, 대전차포 중대와 중화기 중대를 제22연대에 차출해 줌으로서 장갑차로 무장한 북한군의 공격에 불과 15분 만에 붕괴되었으며, 병사들은 제대로 대응 한번 못하고 울진에서 철수를 강요당했다.
3시간만에 울진을 적에게 내준 제23연대는 전열을 재정비한 후 해군의 지원하에 울진에서 영해까지 60km의 공간에서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제 4 절 영해 부근 전투
1. 전투 개요
영해 부근 전투는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와 해군포항경비부 육전대가 북한군 유격부대와 7월 3일부터 7월 13일까지 평해-영해를 중심으로 치른 공방전이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백암산(1,004m), 통고산(1,067m), 통깅산(1,007m), 오미산(1,071m)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이 많아 동서간의 교통이 불편하다. 반면에 동쪽으로는 200m 전후의 구릉지대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바다까지 이른다. 하천은 광천, 매화천, 평해천 등이 있으나 하천의 폭이 좁고, 수심도 얕아 방어선으로서 역활은 그다지 크지 않다.
7월 1일 제23연대가 울진시가지 공격을 시도하여 울진 북쪽 해안도로와 울진시가지 확보에 성공했지만 점령 3시간 만에 죽변으로부터 남하한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평해를 향해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제23연대는 평해에 전방지휘소를 설치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한편, 일월산.백암산. 주왕산. 등징에서 활동하는 유격대를 토벌하는 비정규전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해군포항경비부 소속의 육전대가 투입되어 구암산 지역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7월 1일 울진 전투에서 처음으로 정규전을 경험한 국군 제23연대는 상급부대 지원을 받지 못한 가운데 울진에서 영해까지 60km의 공간에서 지연전을 수행하였다.제23연대는 사단의 주력이 한강방어선에 투입되고 7월 5일에 국군의 재편성에 따라 제3사단이 해체되어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밖ㅇ에 없엇던 상황임에도 울진에서 북한군을 저지함으로서 포항의 조기실함을 막는데 깅여하였다.
특히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로 포항에 대한 위기가 점점 고조되자, 7월 7일 미극동군사령관이 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영덕방어와 영일비행장 경계를 강조함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이 지역에 대한 유엔 해. 공군의 지원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 제23연대와 북한군 제5사단은 7월 13일부터 쌍방이 내륙지역의 금강-소백산맥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임과 때를 같이하여 또다시 영해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2. 전투 경과
가. 제23연대와 해군 육전대의 평해-영해지역 대비정규전
울진을 점령한 북한군이 계속하여 왕피천 남안으로 진출하자, 제23연대는 평해 방면으로 철수한다. 7월 2일 05:00시에 제1대대와 제2대대를 기성리(울진남쪽 22km)에, 제3대대(-)를 평해에 집결시켰다.
제23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하여 사단장 유승렬 대령은 사단에 배속된 제1독립대대와 영등포학원을 배속시켰다. 이에 제23연대는 영등포학원을 제3대대에 편입시키는 한편, 독립제1대대를 기성리 북쪽 3km 지점의 하사리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 무렵 울진을 점령한 북한군 제766부대 병력이 남진을 계속하여 7월 3일 04:00시에 매화리(울진 남쪽 10km)에서 병력을 양분하여 오산리-망양리 방면과, 기양리-길금리-길곡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도한 칭보산. 등운산 등지에서는 상륙 직후 태백산 지역으로 진출한 제766부대의 일부가 재산 유격대를 규합해 아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7월 3일 하사리(망양리 남쪽 2.6km)-21고지(하사리 남쪽 1.3km)에 진지를 급편하던 독립 제1대대가 2개 중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기성리로 철수하자, 연대는 제3대대(-)를 어현리(기성리 남족 3.2km)에 추진시켜 독립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3대대마저 진지를 지탱하기 어렵게되자 제23연대장은 독립대대와 제3대대를 영해로 철수시켰다.
또한 제23연대장은 제2대대가 다투고개(평해 남쪽 3.2km)에서 지연전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1대대와 연대지휘소도 영해로 이동시켰다. 영해로 이동한 제23연대는 영해 북방 10km 지점의 등운산(767m) 일대에 준동하는 북한군 유격대 토벌작전을 실시한다. 당시 연대가 추정한 유격대 규모는 등운산-운서산(520m)-독경산(510m) 일대에 약 1,200명으로 추정하였다.
7월 3일 07:00시에 제1대대가 등운산지역에서 적과 교전하여 11:30분에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다.제3대대와 영등포학원 병력도 오천동-234고지-등운산고지에 대한 수색정찰을 실시했다. 이과정에 유엔군 항공기가 등운산지역에서 북한군의 기관총 공격을 받고 영일 비행장에 불시착하기도 했다.
제23연대의 수색작전은 7월 4일~6일까지 일대에서 계속되었으며 연대전방지휘소가 평해에 개설되면서 독립대대가 진출하고, 7월 8일 제1대대도 평해로 진출하여 망향리-신흥리간 산악지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7월 9일 09:00~10:00시경에 제1-1중대는 정면에 출현한 약 80명의 북한군 유격대와 6시간 교전을 벌여 적을 매화리 방면으로 격퇴시켰으며 , 제2대대장이 지휘하는 제6.7중대는 삼계동에 출현한 적 약500명과 교전을 실시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평해에 대기 중이던 독립제1대대를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온정리 부근으로 출동시키고, 영둥포학원 병력도 제2대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7월 10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는 미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이 병행되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영해 이남 지역인 포항의 죽장면 구암산 지역에서는 해군 육전대가 청송방면에서 포항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유격대와 치열한 교전을 전개 하였다.
해군 육전대는 7월 1일부로 포항경비사령부에 배속된 묵호경비부 대원들과 포항경비부 기지 근무 장병들로 7월 5일에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 중대 규모로 "용호대"라 불리기도 했으며, 7월 9일 진해에서 증원 병력이 도착함에 대대 규모의"강호대"로 증편된며, 포항에 본부를 두고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의 북한군 유격대 토벌작전을 전개 하였다.
이 지역 일대는 청송으로 우회한 북한군 유격대 일부가 경주와 포항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죽장, 기계, 안강 등지에서 활동 중에 있었다.
7월 11일 죽장 감곡리에 유격대가 출현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포항경비부 용호대를 안강지구로 출동시켰다. 여기서 용호대는 영천 구룡산 일대에 적 1개 중대가 잠입한 것을 포착하고, 7월 13일 04:00시에 구룡산 공격을 개시하여 8명을 사살하고 30명을 생포하였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에서는 이 지역 일대에 15~800명 규모의 친북한 게릴라 집단이 포항북서쪽에서 행동하고 있고 비록 지금 당장 국내 치안에 직접적인 위협은 안되지만 북한군의 군사적 승리가 계속된다면 이들 세력은 점차 커져 보다 더 위협적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나. 해군의 해상지원
1950년 6월 27일 미 해.공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 극동해군사령관 조이 제ㅐ독은 경순양함 주노함과 구축함 4척으로 편성된 한국지원전대를 동해안으로 출동시켰다.
일본 사세보항에 기지를 둔 한국지원대의 임무는 한국 해역 초계, 북한군 상륙 저지, 북한군 함정 격멸, 한국 지상군에 대한 함포지원, 철수작전 지원, 그리고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함선 호송 등이었다.
6월 28일 한국해역에 도착한 주노함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과 진지, 북한 해군 함선 등에 대한 함포사격과 해상 봉쇄작전을 수행하였다. 6월 29일 23:11분에 주노함은 한국 해군장교의 조언을 받으며 묵호 북방의 북한군 병력에 대한 30분 가량 5" 포탄 400여 발을 발사하였다.
이러한 해군의 함포사격은 7월 2일부터 주문진-삼척-울진 등 동해안 연안지역의 북한군과 관련 시설에 대해 대규모 포격으로 이어졌다.
7월 4일, 미 주노함은 영국 호위함 불랙 스완함과 함께 삼척, 주문진 연안을 왕복하며 교량과 해안도로에 대한 함포사격을 집중하였으며, 7월 6일에는 영국의 자마이커함과 불랙 스완함이 주문진 근방의 북한군 해안포대와 선박, 도로, 교량, 유류 탱크 등에 포격을 가하였다.
특히 울진 부근에 대한 함포사격이 집중되는데, 이는 동해가도를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 제5사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북한둔 제5사단은 7월 2일 삼척을 점령한 후 7월 8일 울진까지 국군으로부너 어떠한 저항도 받지않고 남진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7월 7일 14:30분에 미 순양함과 영국 어뢰정들은 임원진 남쪽 1km 지점의 도로에 포격하여 파괴하였으며, 20:00시에는 30분간 양양의 북한군 진지에 포격을 가했다.
미.영의 함포사격에 북한군도 해안포 공격으로 대응하였다. 7월 8일에 자마이카함.하트함. 스웬슨함 등이 울진 근해의 해안도로에 포격을 하던 중에 북한군 75mm 유강포로보터 반격을 받아 4명이 전사하고 8명이 부상했다. 특히 북한군은 울진과 임원진 사이에 120mm 포 10문을 배치해 유엔 해군의 해안 포격에 대응하였다. 이에 유엔 해군은 원거리로 이동하여 전자탐지장치에 의한 사격으로 해안포 진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맥아더는 북한군 제5사단의 동향에 비상한 관삼을 가지고 있었다. 영일 비행장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여 딘 소장은 당시 대구에 집결중이던 미 제19연대 제2대대를 비행장과 포항에 대한 경계를 담당하게 하였다.
미 극동해군에서는 동해안에 대한 함포사격과 상륙작전, 근접항공지원을 위한 기동함대 함재기의 출격, 북한 내의 중요 군사도시 공습 등에 관한 게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북한군 후방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미.영 해군은 7월 10 02:00~03:00시에 삼척항에 대규모 함포사격을 실시하고, 포격 범위를 북한지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북한군 제5사단이 7월 8일 울진을 점령한 후 계속 남하하자 7월 12일 국군 제3사단은 함포지원사격을 요청하였다. 7월 13일 미 포병장교 1명이 지상군 상황을 전하고, 함포사격의 표적을 지정하기 위해 주노함에 파견되었다.
당시 북한군 제5사단 병사들이 "울진에서부터 공습이 매우 심하여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쥐구멍을 찾았다"고 후술했듯이 해군의 해상지원은 북한군의 기세를 꺾는데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실제로 북한군 제5사단은 주간 행군을 포기한 채 야간에만 이동해 진출 속도가 매우 느리게 된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5사단이 울진을 점령한 것은 7월 8일이었으며, 이후 5일 이상이 걸려 7월 13일에 평해에 이르렀다.
다. 국군 제3사단의 영덕 방어선 형성
전선이 영덕으로 근접됨에 따라 동해상에 출동 중인 미 해군 제7함대 일부 함정의 함포지원과 함재기들의 출격에 제3사단은 강력한 지원화력을 수시로 요청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사단은 제23연대의 재정비와 한강선 방어를 위해 차출되었던 제22연대의 조속한 복귀를 요청한다. 7월 10일에 사단장이 경질되고, 동해안의 국군은 방어개념을 일신하여 영해-영덕간에서 종심 깊은 지연전을 단행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제22연대의 원대복귀와 사단장인 유승렬을 경남편성관구사령관으로 전보하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이던 이준식 준장을 신임사단장으로 보직하였다. 이는 포항을 고수하기 위하여 영덕-강구선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포항 항만과 영일비행장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동해안 전선에 지원 가능한 화력을 모두 동원하라고 진급 지시하고, 육군본부는 한국측 연락관으로 최덕신 대령을 사단에 파견하였다.
제23연대는 7월 12일 12:00시 목골재의 동쪽 2km, 지점에 위치한 망월봉 서쪽 산비탈에 제1대대와 제2대대로서, 제3대대로 목골재 서쪽 500m지점의 낮은 산지에, 독립 제1대대를 가미실재를 중심으로 배치하였다. 이날, 7월 12일 14:00시에 북한군 2개 대대 규모가 출현하게 되고 이에 영해 앞바다에 대기 중이던 주노함을 비롯한 미 함정들의 함포사격과 영일 비행장에서 출격한 미 제40전투비행대대의 근접항공지원이 병행 되었다.
3. 전투 결과
1950년 7월 1일에 울진을 탈ㅊ취한 북한군은 7월 12일에 영덕 북쪽 14km 지점인 평해까지 남하하였다. 그러나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과 함재기 공격에 진출 속도가 둔화되었다.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는 7월 13일 영해에서 철수하여 영덕 북쪽에 새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이 선에서 제22연대가 증원될 때까지 영덕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피아간에 전투력의 격차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제3사단은 7월 17일부터 8월 9일까지 영덕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제 6 절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1.울진 전투
이곳은 제23연대가 북한군 제766부대와 7월 1일부터 7월2일까지 울진을 중심으로 치른 공방전이다. 강릉이 피탈되면서 국군 제8사단은 지금의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평팡에서 제천-단양으로 이동해 가거 강릉에서 울진까지 92km는 무주공산으로 개방되었다.
당시에 미극동군사령부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동해안 4개 지점에 3,200~3,800여명의 북한군이 상륙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주문진에 400~600명, 호산(삼척시 원덕읍)에 2,000여명, 울진에 400~600명, 구룡포에 400~600명 등이었다. 여기서 주문진에 상륙한 병력이 정동진에 상륙한 제945육전대원이고 나머지 3곳이 제766부대였다.
임원진리 왕바위 해변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26일 자정에 선발대가 울진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울진의 남대천 연안에 배치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이미 사전 침투한 유격대와 통고산, 일월산 방면에서 결합하였다.
한편 , 육전대인 제945부대는 6월 25일 정동진에 상륙후 1개대대 규모가 강릉을 목표로 북상중 군선강 일대에서 국군 제8-21연대와 교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제23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7월 1일 새벽에 남대천을 도하하여 울진을 탈환키로 작전계획을 발전시키고 08:00경 점령하였으나 적이 곧바로 6대의 장갑차를 선두로 역습을 해옴으로써 점령 3시간만에 다시 남대천 이남 왕피천 차안상으로 축차 철수를 하게 된다.
"왕피천에 떨어진 미군기를 찾아라"
남대천에서 대안상으로 올라서면 불과 150m정도의 낮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아군이 기습하여 도하작전으로 북한군 제766부대 선발대를 척결한 장소로 사실 올라가니 개인호등 많은 전투 흔적은 없었다
.
또한 마을 분들의 제보역시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새벽녁에 국군이 들어오고 이어서 낮에는 북한군이 장갑차를 몰고 나타남으러써 국군은 바로 왕피천 이남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왕피천 남안에서 전투시는 미군기가 나타나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몰려드는 북한군에 기총소사를 하였는데 이 모습을 직접 목격한 분을 만났다.
"비행기 조종사는 어떻게 되어습니까?"
"비행기가 바로 저기에 곤두박질하고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는데 조종사는 이곳에 떨어졌는지 알지 못해요. 북한군들이 수십명 달라붙어 뭘 확인하는지 요란을 떨었는데 우리는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요."
"나중에라도 비행기 잔해는 어떻게 처리 되었습니까?"
"얼마동안 그대로 있다가 사람들이 달라붙어 떼어가고 뭐 북한군이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중에 군에 갔다오니 흔적도 없어요. 누가 말하기는 홍수가 나서 씻겨 내려갔다는 말도 있고."
"미군들이 이곳에 와서 찾지는 안했는지요?"
"왔지. 전쟁이 끝나지 않했는데 코쟁이들이 왔고 동네아이들이 우르르 따라 다녔는데 조종사를 찾으러 왔다는데 차지못했다고 해요. 조종사는 비행기 추락시 함께 떨어져 화염에 휩싸여서 타버렸다고도 하고 강물에 혼자 떨어졌는데 시체를 북한군이 건져 갔다는 말도 있고 잘 모르겠어요."
"매화리에서 만난 아주머니~?"
나는 의문점만 들고 걸어서 남대천 차안상, 왕피천 차안상을 거의 걸어서 지역주민을 만났고 전투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실제 개인호를 구축하여 정상적인 방어임무를 했다고 판단할 만한 것은 식별하지 못한체 지역주민들의 "총 몇방 쏘고 떠나갔다'는 이야기만 귓속에 담았다.
그러다 매화리를 지나는데 웬 아주머니가 좀 보자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주머니인데 상당히 단단하게 생기셨다.
"뭐 찾으러 그렇게 동네 아저씨들을 다 만나고 다니나요?"
"예 우리는 유해발굴팀인데 6.25전쟁터를 찾고 전사한 군인의 유해를 찾아 발굴하는 국가사업을 하는 군인들 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여기는 시간낭비입니다. 저 산골 속으로 들어가야 있어요."
"네? 산골이 어딘데 찾을 수 있다는 것인지 좀 알려주세요?"
"여기서 말하면 오래 걸리니 사달동에 가서 어르신을 만나세요."
우리는 사달동을 지도에서 찾았다. 매화리에소 매화저수지를 지나 정말 깊숙히 내륙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매화초등학교 갈곡분교가 있는 곳이였다. 함께 하고 있는 국방부 박인영 중령, 그리고 사계전문가라는 예비역 해병대 장교분이 말을 거들었다. 너무 길도 없고 외길인데 그런 곳에 전투가 있기보다는 게릴라가 숨어들어 은거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00년~) 솔직히 아무런 전사지식이 없다. 그저 전사책 한권(한국전쟁 요약본)을 들고 겨우 찾아보는 수준이다. 동해안 7번국도는 남북으로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길인데 이길을 벗어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북한군이 내륙으로 들어갈리는 없을 것 같은 판단이 나도 들었다. 결국 우리는 매화리에서 점심만 해결하고 평해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지나 나는 2006년도에 증평의 제67보병사단 및 제37보병사단의 포병 연대장(''03.5~'05.12)을 마치고 다시 국방부 유해발굴지역 조사팀 팀장으로 육본에 들어와 정덕이와 준화 2명의 중사를 데리고 전국을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는 영덕지구 전투현장을 조사 나오면서 동해안 축선을 타고 강릉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 과정에 다시 평해에 들어와 외선미리로 이동해 혹시나 이곳에 전쟁관련 비화는 없는지 확인해 보았으나 군인도 북한군도 별로 보지도 못했다 한다. 백암온천에 들러 한여름의 흐르는 땀을 싯어낸 후에 평해 기성리에 갔다. 기성리와 바로 위에 있는 사동리(하사동)는 제23-2,3대대가 축차적으로 방어하고 내려오는 것이고 그 내륙인 사달동은 같은 제23-1대대가 평해에서 추진배치 되어 있다가 후퇴한다는 기록에서다.
"또 다시 마주친 그 아주머니, 내가 당사자요"
하지만 전투 흔적이 없다. 주민들도 그저 왔다가 내려가고 북한군도 그저 왔다가 밑으로 갔지 별 전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몇해전 만났던 그 아주머니를 만났다. 내가 알아본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 복장을 보고 다가선 것이다.
"사달동에 가보셨나요?'
"예 갔는데 동네 어른들이 없어서 몇몇 물었는데 잘 모른다고 해 조사를 길게 못했습니다."
"아니 내가 그곳에 살았는데 창피해서 말 못하겠고만. 국군도 들어오고 북한군도 들어오고 집집마다 들어와 잠을 자고 먹을 것 다 빼앗아 가고 여자는 모조리 겁탈하고 갔는데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하니 내가 당자자인데 뭘 조사하는 거예요?"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우린 싸우다 전사한 군인을 찾는 거라... ."
"누가 몰라요, 요즘 TV에도 자주 나오는데. 우리동네 집집에 들어와 잠자던 군인이 북한군에 죽어서 그냥 집마당에 시체가 있기도 하고 20명도 넘게 죽어 동네에서 다 묻어버렸는데 모른다고?"
나는 빨리 그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있게 대답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언제 나고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는데 산골에 집이 한곳에 집단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뜸하게 있는 곳으로 들어온 군인들은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른다.
이미 전쟁전부터 북한군 일부 유격대들이 들락달락거렸고 전쟁중에도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온 유격대 선발들이 자유롭게 지나간 곳이다. 낮에 들어오는 군인 다르고 밤에 들어오는 군인 다르고 그나마 먹을 것도 없는데 봄에 뿌릴 씨앗까지 다 돌려가버려 동네는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여지들만 몇 남아 있던 동네다. 남자들은 걸어다닐만 하면 다 북한군인지 아군인지 모르지만 따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도 얼마동안은 들어가 살지도 못했다. 산속에 숨어있는 인민군 잔당들이 아예 제집처럼 죽치고 다녔기 때문에 주민들을 모두 소개시켰다 한다. 그래서 결국 어디서 왔는지 나중에는 여기저기 피난민들이 들어와 화전을 해서 끼니를 해결하는 동네였다며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그 실체는 확인되지 못했다.
2. 영해 부근 전투
영해 부근전투는 울진에서 전투를 한 제23연대가 해군포항경비부 육전대와 함께 북한군 유격대를 맞아 7월 3일부터 7월 13일까지 평해-영해를 중심으로 치른 전투다.
연대는 울진에서 철수하여 7월 2일 05:00에 평해에 도착하여 육군으로부터 배속받은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 병력을 받아 기성리 일대에 배치 하였다.
북한군 제766유격대는 계속하여 아군을 추격하여 오고 일부 병력은 내륙으로 들어와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사전 침투한 유격대들과 규합한바 칠보산(810m), 등운산(767m), 내륙의 운서산(520m),독경산(518m) 일대에 약 1,200여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연대는 내륙에 들어와 있는 북한군 유격대를 격멸하기 위해 산악지형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대에 유엔군의 항공 지원이 병행 되었다. 지휘소는 형해에서 영해로 다시 7월 7일에는 전방지휘소를 평해에 개설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준비하였다.
7월 9일 기성리 전방으로 북한군이 접근하였으나 격퇴되고 비행기 폭격으로 북한군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한편 영해 이남인 포항의 죽장면 구암산 지역에서는 해군 육전대가 청송방면에서 포항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유격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해군 육전대는 7월 1일부로 포항경비부에 배속된 묵호경비부 대원들과 포항경비부 기지 근무 장병을 기간으로 7월 5일 중대규모로 창설되어 일명 '용호대'라 불리다가 7월 9일에 진해에서 증원병력이 도착하여 대대 규모의 '강호대'로 증편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포항에 본부를 두고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의 유격대를 토벌하는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7월 13일에는 영천 북안면 구룡산(674m)에 1개중대 규모가 잠입했다는 것을 포착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8명 사살에 30명을 생포하기도 한다.
"경주 서쪽에 들어선 북한군 유격대 또는 친 게릴라부대"
사실 이 내용으로 보면 전쟁 당시에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이 전국 곳곳에 포진하고 있고 실제 전쟁전에 남파된 유격대들이 주요 목을 선점하고 있었으며 남침을 개시한 적 제12사단이나 5사단, 여기 제766부대원들이 팔로군에 소속되었던 조선의용군이나 남한에서 올라간 인원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정규군의 성격보다는 게릴라부대였다는 의구심이 든다.
그도 그렇것이 사실 이 동해안은 아무런 방어태세가 없었음에도 밀어붙이지 못하고 괜스레(?)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이나 하고 시간을 허비하여 서울에서 3일간 지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방어준비를 하도록 시간적 여유를 준셈이 된다.
따라서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정예군이라 하는 제12사단이나 5사단, 그리고 제766부대(총좌 오진우의 고향이 함남 북청이라하는데 어느 경주 지방 사람이 자기동네에서 태어나 북으로 갔다고도 함)는 남한 인원이 많아 혹시나 향수에 젖어있지는 안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우리도 보국대대니 영등포 학원이니 하는 구성원들이 북에서 월남한 인원들이 많았고 실제 그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 주로 남한에 투입딘 게릴라 토벌작전에 집어넣어 시험을 했다는 설과도 맥락이 비교 된다.
사실여부를 떠나 어쨌든 구룡산으로 침투한 게릴라를 소탕하는 등 해군 육전대의 활약등에 힘입어 북한군의 포항 영일 비행장을 조기에 무력화 시키려던 계획은 차질이 초래되며 미군은 7월 7일 미 제24사단장 딘소장에게 제19연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영일 비행장과 포항에 대한 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내가 해군 육전대로 구암산지역에서 싸웠다."
그러던 어느날에 한 참전용사께서 증언을 해왔다. 본인이 직접 전투를 했다고 하며 전사한 전우를 현장에서 화장하여 묻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우리는 해병대 유해발굴팀을 이끌고 있는 유소령과 협조하여 2009년부터 2012년 어간에 1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실제 몇구는 화장된 형태로 발굴 되어 그 증언을 밑받침하여 주었다. 그분의 이야기는 당시에 육전대가 격멸작전을 하러 들어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벌써 북한군 유격대가 들어와 산속에 머물고 있으면서 밤이면 내려와 약탈해 가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복작전을 감행에 야간에 망르에 내려오던 적들을 일망타진 하는 가운데 희생자도 생겼고 포로를 1명 잡았는데 본대가 구암산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했다 한다.
하지만 본대의 통제로 구암산 진격을 멈추고 바로 죽장면쪽으로 내려와 보현산 우측에 있는 수석봉일대에 대한 수색정찰을 강화하면서 포항으로 들어오는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한다.
"칠보산-등운산에 북한군만 왔다 갔지."
나는 전사적 사실을 확인하러 칠보산 일대를 탐사하려고 울진 온정에서 조금리-원수목이 경로를 택했다. 그러나 원수곡에 이르니 지역주민이 여기서 오르면 힘들고 동쪽 유금사란 절쪽에서 오르는 오르는 길이 있어 쉽게 탐사를 할 수 있다하여 다시 차릏 후포로해서 병곡면 금곡리로해서 유금천을 따라 들어 갔다.
물론 원수곡 일대의 주민들은 나중에 들어와 그런 흔적이나 이야기를 발견했거나 들은 적이 없다하였다. 이동하는 구간은 정말 산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집들 또한 별로 없다.
그러다 유금사가 가까워지는데 산능선이 완전히 동쪽에서 서쪽-남쪽으로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실제 들어가니 계곡이라기 보다는 조용한 산골마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정도 들어가니 삼거리가 나오고 밑으로 가면 칠보산 자연휴양림이 나오고 계속 앞으로 이동하면 유금사 들어가는 길인데 평야지대같이 공간이 넓게 펼쳐진다.
"무슨 전쟁이요?" 유금사 주지스님의 질문이다.
"전사에 이곳 칠보산-등운산에 많은 적 유격대가 들어왔고 우리가 토벌작전을 했다 합니다."
"전쟁은 없고 군인들이 길을 잘못들어 왔다가 바로 나가고 사실 능선에는 공산군만 왔다갔지."
동해안에서 함포사격이 이어지고 있어 인민군은 능선 너머 원수목이에서 삼계리로 빠졌고 국군은 다시 진출할 때에 길을 잘못 들어 이곳으로 왔다가 바로 나갔다는 것이다.
우리 탐사팀이 오라 실태를 확인결과 실제 능선에는 개인호가 별로 굴토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금곡리로 나와 이곳에서의 전투흔적을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지역주민들 이야기가 국군은 왔다가 바로 뒤로 밀려나가고 공산군도 바로 뒤따라 오지도않고 전쟁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인데 다만 바다에서 칠보산 쪽으로 매일 엄청난 포탄을 퍼부어 구경꺼리가 장관이였다 한다.
3. 해군의 해상지원
1950년 6월 27일 미 해/공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 극동해군사령관은 일본 사세보에 기지를 둔 한국지원전대를 편성하고 주노함과 4척의 구축함을 동해안에 출동 시켰다.
주노함은 개전이래 최초로 6월 29일에 묵호 북방의 북한군에 5" 포탄 400여 발을 발사하였고 7월 2일부터 주문진-삼척-울진 등 동해안 연안지역의 북한군 병력과 보급, 수송시설에 대규모 공격으로 이어졌다. 7월 4일에는 영국 호위함 블랙 스완함, 자마이커함이 가세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5사단은 울진에서부터 공습이 매우 심하여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쥐구멍을 찾았다고 하며 주간이동을 포기하고 야간에만 이동해 진출 속도가 느렸고 따라서 7월 8일에 울진을 점령하고선 5일 이상이 걸려 7월 13일에야 평해에 이르렀다.
4. 국군 제3사단의 영덕 방어선 형성
7월 10일에 사단장을 유승렬 대령에서 이준식 준장으로 교체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사단은 영해-영덕에 3중의 축차진지를 편성해 최대한 적의 진출을 저지하려 했다.
적은 아군 해상화력의 위력앞에 고개를 숙이고 내륙으로 분산됨에 따라 울진점령후 12일까지 별다른 공격을 못하고 국군은 이 시기에 재편성과 진지를 견고하 하여 적에게 맞서는 대비를 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한미 양군은 7월 5일부터 차령산맥의 평택-충주-울진에 연하는 전선에서 12일까지 약 1주일간 적을 지연하였으며, 금강-소백산맥을 잇는 방어선으로 작잔상 철수를 하여 미국이 금강선을, 국군이 소백산선을 도맡아 지연작전을 계속하게 된다.
제 7 절 이 지역의 민간인 피해 현황
강원도 지역의 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현황은 타 지역에 비해서 밝혀진 것이 적다.
1. 원주 형무소 학살 (1950. 6. 30, 원주시 뒷고개) : 경찰과 헌병이 원주형무소에 수감 중인 180여 명을 이감한다는명목으로 끌어내어 3~5인식 포승으로 결박하고 포승줄이 덜어지자 전깃줄로 묶어 트럭 6대에 싣고 원주읍 뒷고개로 끌고 가 총살했다. 재소자 학살은 주로 정치범이지만 일반 잡범도 기여잇는 경우도 잇고, 학살 이유는 인민군이 남하하면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원주시 문막읍(1950. 10월초, 세고개(속칭 쇠고개) : 1949년 11월 14일 도 경찰국에 자수기간에 보도연맹 관련자 2만 265명이 가입한다. 당시 문악은 제2의 모스크바, 원주는 우익으로 대립이 심했다. 이곳은 '50. 9월 30일 국군이 원주 수복 후에 빨갱이 색출로 이어져 보도연맹원과 국군 후퇴시 인민군에 협조한 혐의가 잇는 주민들을 색출하여 이중에 주민 약 20명을 심하게 고문 후에 원주로 이송한다면서 데리고 나가 세고개 숲속에서 학살했다.
3. 속초 인민군 가장 열성자대회 학살('50. 12월, 속초시 부월리 일대) : '50. 12월경, 중공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이 무성하고 국군이 후퇴하고 잇던 당시에, 국군이 인민군을 가장하여 열성자 대회를 열어 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에 열성분자로 나선 사람 수십 명을 추려내어 몸과 손을 전깃줄로 옭아매어 따발총으로 사살하고 그 시체를 백사장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