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2/7-혼슈정복 신무왕2-나니와왜, 나라조>
신무왕의 혼슈 정복, 나니와왜[낭화조(浪花朝)] 세움과
숭신왕의 나라[나량조(奈良朝)] 세움
☯ 신무왕의 맹렬한 혼슈[본주(本州)] 동정(東征)
신무는 곧 군을 다시 정비하여 축자국(筑紫國)의 강수문(岡水門)을 거쳐 길비국(吉備國)에 상륙, 3년간이나 머물렀다.
그 후 다시 나니와[난파(難波), 낭화(浪花): 지금의 대판(大阪, 오사까)]를 공격하기 위하여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무오년(戊午年) 봄 2월에 길비(吉備)를 떠나 나니와로 작전을 개시하였다.
군의 선단이 낭속국(浪速國)을 지나자, 물의 흐름이 대단히 빨라지며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므로 그 이름을 ‘낭화(浪花, 나미하나)’라 하였으며, 난파(難波, 나니와)라 함은 틀렸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무왕의 동부정복경로》0012
신무와 그의 동정군(東征軍)은 나니와[대판(大阪),오사까)에 무사히 상륙하여 거점(據點)을 마련하고, 즉시 주위의 반항 세력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신무군은 선주 세력인 하이족(鰕夷族)의 현지 집단을 추방하고, 계속 동진(東進)하여 부현(富縣)과 고미장읍(高尾張邑) 지역에 도착하였다.
☯ 원주민 즈치구모[토지주(土蜘蛛)]족의 최후
그런데 그곳엔 즈치구모[토지주(土蜘蛛)]라고 하는 특수한 종족이 있어 강하게 저항해 왔다. 이들은 수족이 몸에 비하여 길고, 몸은 털투성이며, 키는 히기비토[주위(侏偉): 난쟁이]족과 비슷하였다. 이들은 태곳적부터 아이누족과 함께 살아온 왜 열도의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평소에는 유순하지만,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결사적이어서, 자기들의 생존(生存)이 위협당하는 상황이 닥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신무군(神武軍)은 즈치구모를 완전히 포위하여 그들의 탈출을 철저히 봉쇄하고, 바람을 이용하여 큰 불을 질러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붙인 다음, 즈치구모의 탈출로에 미리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칡넝쿨로 만든 그물을 덮어씌워 잡아 죽였다. 조직적인 전쟁을 해 본 일이 없는 즈치구모들은 우왕좌왕 하며 날뛰다가 마치 사냥이나 하듯이 즐기는 신무군에게 죽어갔다.
♬(말풍선)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한다! 어차파 우리에겐 골치 아픈 존재들이니까.” (신무)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왜열도(倭列島)에는 진화가 덜 된 종족인 즈치구모족이 살고 있었다. 신무(神武)의 병사들이 닥치는 대로 죽이는 바람에 결국 멸종되고 말았다. 이 대학살극에 신무군은 칡[갈(葛)]넝쿨로 그물을 만들어 썼으므로, ‘칡’의 왜어(倭語) ‘가즈라’를 따 그곳 지명을 ‘가즈라기’[갈성(葛城)]라고 불렀다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 신무왕 혼슈[본주(本州)] 정복, 나니와 왜를 세워
드디어 주위의 정복전을 끝마친 신무(神武)는 아직도 동쪽에 광활한 옥토가 있지만, 그곳에 선주하고 있는 하이족(鰕夷族)은 즈치구모가 아니라, 옛 쥬신제국의 유민(流民)들과 본토를 빼앗기고 망명해온 옛 마한(馬韓)의 유민들이 가우리[고구려(高句麗)]의 지원을 받으며 버티고 있어서, 그가 이끄는 신군(神軍)만으로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나니와[낭화(浪花)] 지역 확보에 전력을 다해 강원궁(橿原宮)을 지어 드디어 나니아왜[낭화왜(浪花倭)]를 세웠다.
《신무의 동정과 나니와 왜 설립까지의 경로》0014
신무(神武)는 곧 ᄀᆞᆷ나루의 천황께 나니와왜[낭화왜(浪花倭)]의 설립을 보고하여 담로왕[첨로왕(檐魯王)]으로 공식적인 임명을 받고, 주위의 민심을 모으면서 새 나라의 정부를 조직하기에 바빴다.
☯ 왜의 역질 퇴치 숭신왕, 나라[나량조(奈良朝) 세워
그러나 대륙에서 새로 진출해 온 신무왕과 그 신군들은 오랜 세월 대륙과 격리되어 살아 온 원주 왜인(倭人)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이주민들이 가져온 수많은 병균, 특히 천연두 따위에 대한 아무 면역성이 없는 원주민들이 이에 감염되어 속속 희생되어 갔던 것이다.
갑자기 펴져 나간 역질(疫疾)들은 주로 원주 왜인들을 희생시켰으니, 순식간에 인구의 반 이상이 역질에 시달리고 그 반수 이상이 급사(急死)하였다. 신무왕이 나니와왜를 건설하자마자 닥친 엄청난 불행으로, 민심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는 일단 잘 알지 못하는 병이 생기면 우선 귀신이 붙었다고 생각하였으니, 귀신을 쫓으려면 무당이 필요하였다.
신무왕은 급히 ᄀᆞᆷ나루 천황에게 보고하고, 하늘과 삼신(三神)의 제사를 집행해줄 단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일의 심각성을 깨딜은 ᄀᆞᆷ나루의 천황정부는 즉시 신수두의 대단군인 숭신왕(崇神王)을 파견하여 국신(國神)에 제사하고, 역질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숭신왕을 ‘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이라 하였으니, ‘모실 사이 자빠져 크게 쉰 굿을 벌인 단군’, 즉 신(神)을 숭상한 단군‘의 뜻이 된다. (김인배金仁培 풀이)
숭신왕(崇神王)은 역질(疫疾)의 피해가 유난히 심한 나니와[낭화(朗話)]의 이웃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 단군이 통치하는 나라[나량(奈良)]를 세우니, 그곳이 오늘날의 나라[나량(羅梁)]이다.
《나니와와 나라의 위치》0015
숭신왕은 신수두의 국사(國社)를 세우고, 신사(神社)에 제사(祭祀)를 올리니, 때마침 원주 왜인들의 반수 이상을 죽인 역질이 종식되었다. 이로써 민심을 크게 얻자, 나니와조[낭화조(浪花朝)]의 숙적이던 하이족(鰕夷族)마저 스스로 항복해 와 숭신왕의 백성이 되었다.
때마침 풍운아 신무왕(神武王)이 죽자, 숭신왕은 나니와조[낭화조(浪花朝)]마저 흡수하여 기내(畿內)일대를 완전히 통일하고, 나라조[나량조(奈良朝)]의 시조가 되었다.
숭신왕은 나라 안 여러 곳에 신사(神社)를 세워 삼신(三神)에 제사하도록 하고, 나라 안의 인구 조사를 최초로 실시하여 백제 천황에게 보고하였고, 조세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박 제조에도 힘을 쏟아 본국 백제와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악질(惡疾)을 종식시키고 신수두의 신사(神社)를 세워 백성들의 안녕을 비는 대단국 숭신왕에 대한 신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가우리[고구려(高句麗)]의 지원을 받는 하이족들이 스스로 숭신 단군의 나라 정부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숭신왕이 죽고 태자 수인(垂仁)이 왕위에 오르자. 사정은 돌변하였다. 원래 민족의 종교의식인 신수두의 대단군 말에 단결하였던 하이족들이 백제 천황의 담로왕에 불과한 수인의 통치를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
2020.5.10.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