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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오순절 후 열아홉 번째 주일)
사무엘상 10:1~8
우리에게는 섭리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15세기 초,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신대륙 발견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1451-1506)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향했습니다.
결국 콜럼버스는 1942년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했던 대륙이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16세기 초에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람이 콜럼버스가 발견했던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이름을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얻어 합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거기서 그의 인생이 바뀌기는 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사울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든 파멸의 길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찾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또한 신중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사울이 태어난 베냐민 지파는 그 자신의 고백대로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일은, 그의 아버지 기스라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사람이었고, 사울이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로 머리가 하나쯤 더 컸던 훌륭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느 날 사울의 아버지가 사울을 불러 사환을 데리고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마음씨 착하고 순종적인 어린 사울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암나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결국 암나귀를 찾지 못하자 사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되돌아가자! 암나귀는 고사하고, 우리 아버지께서 오히려 우리 때문에 더 걱정하실까 두렵다!”
이렇게 말하는 사울에게 사환이 대답합니다.
“주인님, 이 성읍에는 하나님의 사람 한 분이 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아주 존경받는 어른이신데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고 다 들어맞는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그분에게 가면, 우리가 찾는 것을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을지 알려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울과 그 사환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성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비탈길을 올라가던 중에 마침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선견자가 한 분 계시 다지?”
“네, 그분이 저 앞에 가십니다. 오늘 산당에서 이 성의 제사가 있어 방금 도착하셨지요. 지금 성으로 들어가시면 그분이 먹기 위해 산당에 올라가시기 전에 곧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지 않고 그분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제물을 축복한 다음에야 손님들이 먹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올라가시면 곧 만나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성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이 성안에 막 들어서려는데, 사무엘이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다가 그들과 맞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을 셈으로 사무엘을 찾아 나섰지만, 사실은 사무엘도 사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날 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무엘이 어린 사울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너에게 말해 둔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사람이다.”
저는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에도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어떤 자매가 좋은 배필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다가 친구의 소개로 한 크리스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매의 귀에다 대고 “이 사람이 바로 너의 배필이다!”라고 속삭여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처럼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펼칠 때마다 그날 꼭 필요한 말씀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성도가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자신이 초신자일 때, 남편이 하도 속을 썩여서 과연 이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이분은 성경 지식이 없는 초신자인지라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성경을 잘 모릅니다. 제가 성경을 펴서 처음으로 보는 말씀은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겠사오니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이분이 성경을 쫙 펴서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말씀은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자매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남편과 이혼하지 말라는 뜻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위기를 잘 극복하고 지금은 아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어느 성도가 이 간증을 듣고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이 성도는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성도는 “하나님, 저에게도 당신의 뜻을 알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성경을 쫙 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유다가 가서 목을 매어 죽으니라(마 27:5).” 이 성도는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어? 이게 아닌데…” 싶어 다시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도 그와 같이 행하라”, “아니, 정말 이상하네? 한 번만 더 해 보자!” 이 성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속히 행하라!”
우스운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당신의 뜻을 명확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향해 “너는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누군데요. 저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저에게 어떻게 그런 황송한 말씀을 하십니까?”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사환을 귀한 연회에 초대했습니다. 사무엘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가장 귀한 넓적다리 부위의 고기를 사울에게 베풀었습니다. 또한 사무엘은 지붕에 올라가서 밤늦게까지 사울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고, 동이 트자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무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다음과 같은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첫 번째 표징은, 사울과 그 사환이 라헬의 묘실 곁을 지날 때 두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표징이었습니다.
두 번째 표징은, 그들이 다볼 상수리나무에 도착했을 때,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표징이었습니다.
세 번째 표징은, 사울이 산당에서부터 나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것이라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여 사울도 그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거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줄로 알고, 할 수 있는 일은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혹시 어떤 분은 초기 기독교회에 활동했던 영지주의자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영적인 지식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분들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거나, 혹은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 나라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왜 “세움을 받았다.”라고 표현하는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엄밀히 말씀드려, 사울은 자기 스스로 지도자가 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아 헤맸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찾았습니다. 사울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 얽매여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상적인 일마저 당신의 섭리를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다만 일상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사울 당사자가 몰랐을 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들마저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가장 좋은 재료일 수 있습니다.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린 것도, 그것을 찾기 위해 사울이 먼 땅을 여행한 것도, 사울이 사환의 충고를 듣고, 물길러 나온 소녀들을 만난 것도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 성읍에 들어갈 그때, ‘마침’ 사무엘이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마주나오고 있었던 점도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났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확증시켜 주는 표징(sign)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필연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섭리 신앙이 필요합니다.
“나의 일상에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들어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하신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섭리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울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고도 결국 실패한 왕으로 타락하고 말았을까요?”
여러분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종종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일까요?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고 심지어 표징까지 분명히 보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무엘의 말대로,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단(一團)의 선지자 그룹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크게 사울에게 임하여 사울도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사무엘상 10:11에 보면,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결국 사람들은 그들을 다스릴 현실적인 왕을 원했던 것이지, 또 다른 예언자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기들의 싸움을 대신 싸워 줄 왕을 원했던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양에 사로잡힌 사람을 원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경제와 군대를 책임져 줄 계획자와 예산집행자를 원했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을 위하고, 자기들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왕을 원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며 “호산나”(마 21:9)를 외쳤던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백성들은 이 땅에 정치적 해방과 경제적인 풍요를 선사해 줄 현실적인 메시아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그래서 훗날 사무엘은 “너희가 왕을 구한 일이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범한 일(삼상 12:17)”이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했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왕은 어떤 왕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여 섬길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를 받는 겸손한 왕을 원하셨습니다(삼상 12:14). 그러나 훗날 사울은 이 기준에서 낙제점을 받고 맙니다.
어느 날, 사울이 블레셋과 전투할 때의 일입니다. 블레셋의 군대는 병거가 삼만이고, 마병이 육천 명이고, 군사들은 해변의 모래처럼 많았습니다. 전황이 심상치 않자, 백성들은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어떤 사람은 굴과 수풀에, 어떤 사람은 바위틈과 웅덩이에 숨어 버렸습니다.
더구나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로 약속한 대로 칠 일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로인해 모든 백성이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다급한 사울은 오직 사무엘만이 드릴 수 있었던 번제를 자신이 직접 나서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번제가 마쳐지자, 곧바로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사무엘은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군인들은 하나둘씩 도망치고, 선생님은 정하신 때에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군사들은 코앞에 집결해 있는데,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득이’ 번제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울의 말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사울은 급박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사울 자신의 표현대로, 이것은 ‘부득이하게’ 드려진 제사였습니다. 상황만 놓고 본다면, 사울의 행동은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울의 행동을 망령된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했더라도,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사건은 사울이 아말렉과 전투할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가장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은 남겨두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신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사울 왕은 우리에게 하나의 반면교사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을 알고, 당신의 섭리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결국 사람들의 요구와 상황에 맞추어 살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실패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꺾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같이 오늘 우리도 일상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나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은 먼 훗날, 내가 성공한 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섭리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마 10:29).
또한, 우리가 섭리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섭리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의 요구와 상황과 관계없이, 나의 뜻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