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마루의 사계
빌미기에 터를 잡다
강현자
커피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모름지기 커피의 매력은 맛보다 분위기가 아니겠는가. 얼굴에 닿는 도도한 냉기와 가슴까지 적시는 따끈한 온기는 음양의 조화인가. 아슴아슴 피어오르는 비단실 같은 하얀 향기가 햇살을 그러안을 때의 그 분위기가 나는 좋다. 볕을 등에 지고 양지바른 벤치에 앉았다. 아, 아파트에서는 느낄 수 없던 이런 여유라니. 커피 한 모금에 마음까지 낫낫해지자 시선이 정원수에 머문다. 하늘에 잠길 듯 치솟은 매화나무의 도장지가 눈에 거슬린다. 그예 장갑을 끼고 전지가위와 톱을 들었다. 늘 이런 식이다. 커피를 들고 나올 때는 분위기 좋게 커피만 마시자 해놓고 결국 또 일손을 잡고 만다. 전원생활이란 것이 끝없이 손을 필요로 한다 해도, 그것조차 마다하지 않으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시골 사람이 맞나 보다. 햇살이 좋고 초록이 좋고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구름과 별과 달을 품은 하늘을 이고 사니, 아파트 생활을 접고 꿈에만 그리던 이곳 성산리로 이사를 온 것 역시 필연인지도….
성산리라는 마을 이름이 혹시 별과 산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마을 어르신께 여쭈었더니 원래 이름이 ‘빌미기’란다. 빌미기? 별뫼기를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오고 있었다. 별(星)이 보이는 뫼(山)의 터(基)란 뜻이리라. 참 예쁜 이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집은 마을에서도 언덕을 올라 마루에 있으니 당호를 별마루로 짓기로 했다.
별마루에 온 지 이제 2년이 되었다. 늦가을에 이사했는데 파란 잔디마당에 무더기로 피어있는 보랏빛 아스타와 노란 국화,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아름드리 향나무에 매료되어 한동안 마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작년 한 해는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일 년을 보냈다. 만물이 쇠락해가는 즈음에 이사를 왔으니 마당에 무엇이 심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른 봄부터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싹들이 무엇인지 몰라 그 좋은 보약을 잡초인 줄 알고 뽑아내기도 하고, 잡초를 채소인 줄 알고 키웠다가 튼실해진 뿌리를 뽑아내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과일나무 전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이웃 나무들이 달라진 것을 보고서야 아차 싶어 따라 할 정도였다. 잡초로 여겼던 샤스타데이지가 텃밭가에서 새하얗게 꽃을 피웠을 때는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었다.
한 줌 봄볕이라도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 제비꽃이 먼저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이왕이면 무더기로 피면 더 좋겠다는 소박한 욕심도 부려보았다. 이를 본 옆집에서 달려와 하는 말,
“언니, 저 제비꽃 왜 안 뽑아요? 나중에 감당 못 해요. 잔디를 금방 다 덮을 거예요. 언니가 제비꽃을 뽑아내지 않으면 그 씨가 우리 집까지 퍼져요.”
그런 거였다. 춘추전국시대 때 이야기로,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도 물고기가 그들을 보면 물속 깊이 숨고, 새가 그들을 보면 더 높이 날며 순록과 사슴이 그들을 보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고 했다. 사람 눈에 모장과 여희지 물고기나 사슴에겐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듯,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도 열심히 제비꽃을 뽑아야 했다. 옆집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데…. 그래도 마당 한구석에 미련을 조금 남겨 놓긴 했다.
서둘러 마늘부터 심고 다음 해 이른 봄에는 내가 좋아하는 완두콩도 심었다. 때맞추어 비료를 주고 약을 쳐야 할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순수하게 자연이 주는 혜택에 나의 노동력을 보태어 내가 먹을 만치의 건강한 소출이면 되었다. 별별 농약과 별별 비료가 내게는 어렵기도 했다.
의외로 텃밭은 내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 물론 시장이나 마트에서 만나던 그런 미끈한 상품은 되지 못하지만 비슷하기는 했다. 발가락 열 개와 손가락 열 개가 모두 있는 갓난아기를 보고 감동했듯이 마늘이 마늘답게 생기고 양파가 양파같이 생긴 것이 신기했다. 제법 어른이 되어 꼴을 갖춘 나의 바라미들을 보니 탄생과 성장이 우리네 사람과 흡사하다. 완두콩 맛은, 우와~ 마트에서 사 먹었던 것보다 더 맛이 좋다. 감자도 들쭉날쭉하기는 해도 더러는 씨알이 굵은 놈이 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신바람이 났다. 천생 농사꾼인가 보다. 농사를 처음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는 마을 분들의 칭찬에 나는 춤추는 고래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적표를 받아보니
해토머리부터 호미를 들고 나와 텃밭의 자갈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닐 거라 생각했던 일이 커지고 말았다. 몇 날 며칠을 눈만 뜨면 밭에 나가 단단한 흙을 부수고 돌을 골라냈다. 한곳에 모아놓고 보니 제법 무더기를 이룬다. 이제 흙도 숨통이 좀 트이겠다. 작물을 심을 위치를 디자인하며 작년보다 부푼 꿈을 심었다. 겨우내 황량했던 텃밭은 순한 봄볕을 받고 초록을 내놓았다. 그것이 잡초라 할지라도 연둣빛 초록에는 늘 설렌다. 이제 움츠렸던 어깨도 자연스레 펴고 작업복도 얇아졌다. 초록은 하루가 다르게 텃밭을 채워나갔다.
물론 태풍 카눈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동거하는 벌레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지만 옥수수도 그야말로 친환경 옥수수로, 맛은 장에 내놓아도 으뜸일 뻔했다. 아침마다 열리는 신선한 오이가 발걸음을 잦게 했다. 연한 가시마다 이슬이 맺힌 오이를 한입 툭 베어 물면 은은한 고소함이 싱싱함을 가득 물고 입안으로 들어온다. 일을 하다 덥고 지치면 방울토마토를 따서 팔목에 쓰윽 한번 문지르고는 그 자리에서 먹는 맛도 일품이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태풍의 위력을 보도하며 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어디까지가 최선인지 잘 몰랐다. 나름 한다고는 했지만 태풍이 지나간 자국은 처참했다. 키가 큰 늦옥수수는 여지없이 허리를 꺾고 서리태도 이랑을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처참하게 자빠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하다 하나하나 일으켜 세웠다. 아직 여린 줄기는 나의 손길이 억셌는지 오히려 더 꺾일 뿐이다. 하는 수 없이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마음은 그래도 눈길을 외면할 수 없었다. 구름을 가른 하늘에서 파란 속살을 내보이자 세상은 평정을 찾은 듯했다. 다시 텃밭으로 가보았다. 땅을 향해 고꾸라진 것들이 스스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손에 꺾인 것들만 일어서지 못한 채. 차라리 내버려 둘 것을…. 자연은 스스로 알아서 제 삶을 꾸려가고 있는데 하나라도 더 얻으려는 욕심의 손길이 화를 불렀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상담을 청해왔다. 일 년 전 큰 병을 앓고 난 후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진 아이를 바라보는 워킹맘의 마음이 오죽할까. 엄마의 걱정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성적이 자꾸 떨어지고 엄마에게 걸핏하면 대든다는 것이다. 엄마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엄마 말 좀 들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해도 그럴수록 아이는 점점 어긋난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아이의 눈빛은 증오에 가까워 아들과의 대화는 늘 유리잔 부딪치듯 아슬아슬 하단다. 다음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엄마가 하는 말 중 무슨 말이 제일 듣기 싫으냐고 물었다. 당연히 공부하란 소리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였다. 아이는 사랑이란 명목으로 간섭하고 구속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좌충우돌 실패하더라도 직접 경험해보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깨치고 싶은 사춘기 아니겠는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관심과 사랑으로 포장한 간섭은 오히려 화를 부른다는 것을 텃밭에서 배운다. 텃밭이 학교다.
태풍이 멈추고 작열하는 태양이 텃밭에 머물렀다. 대지를 달구기 전에 이른 아침 텃밭으로 나갔다. 세상에나! 옥수수마다 서리태마다 벌레가 진을 치고 있다. 나의 텃밭은 그야말로 벌레들의 천국이었다. 잡아도 잡아도 그들이 나보다 빠르다. 그 억센 옥수숫대를 어떻게 뚫고 드나드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나름 생존의 방법이겠지. 그래 내 처음부터 씨앗을 세 알씩 심은 이유가 하나는 벌레 몫이 아니었더냐. 벌레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서리태 꼬투리 안에도 두 알의 콩 중 하나는 제가 먹고 딱 한 알씩만 남겨 놓았다. 김장 무와 배추에서도 벌레는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일일이 잡는다고 했지만 나의 손길은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 너희들 먹고 남은 것 내가 먹으련다. 마음을 크게 쓰기로 했다. 지나가던 이웃 아주머니가 보다못해 한 말씀 거든다.
“약 안 치믄 못 먹어. 비료도 안 주믄 질겨서 맛이 읎어.”
그러고 보니 무와 배추의 몰골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이파리마다 구멍이 숭숭 뚫리고 시들시들 말라가는 잎도 많았다. 크기도 자라지 못하고 내내 그 자리다. 내가 저들이라면 얼마나 가렵고 아팠을까. 나 좋은 것 먹자고 그들에게 너무도 큰 고통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뿌린 퇴비로는 어림도 없나 보다. 예방접종도 하고 영양제도 주었어야 하나? 내가 미련했던 건 아닌지 아리송하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급히 무를 뽑기로 했다. 크기가 모두 종이컵만 하다. 어이가 없다. 하기야 내가 그들에게 해준 게 없으니 바라는 것도 염치지. 처음 씨앗을 뿌릴 때는 누구랑 나누어 먹을까 고민도 했었다. 우습게도 이제 그런 고민은 사라졌다. 이게 무우입네 하고 누구 앞에 내놓기가 민망하다. 어찌 되었든 나 혼자 다 소화해야 한다. 덕분에 올겨울에는 동치미도 담그고 깍두기도 담았다. 무 듬뿍 넣어 고등어 조림도 해 먹고 어슷어슷 삐져서 동탯국도 끓이리라. 올 하반기 성적은 낙제 점수다.
하지만 어떠랴. 저들이 텃밭에서 시난고난하는 동안에도 나는 마음 한편에 희망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활력소였고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그곳이 안식처였다. 좋은 성적을 바란다면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지.
첫댓글 텃밭에서 푸르게 자라는 생물들과 함께 숨쉬고 함께 물마시고 공존공생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대상이 되어보는 지혜가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생태수필 연작 첫번채라 소개하는 부분이 컸습니다.
밭에 나가 흙과 더불어 살면서 인간의 존재란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 점점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이는 전원생활을 달콤한 꿈처럼 여기지요. 하지만 자연과 함께 살려면 이런저런 성가신 일이 뒤따르다는 것을 모르겁니다. 그래도 자연속에서 배우고 깨치며 사는 것은 그 성가심과 맞바꿀 수 있는 큰소득입니다.선생님의 부지런함과 자연을 대하는 따뜻함이 돋보이는좋은 수필을 볼 수 있어 행복하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멀리서 답글을 주시니 더 반갑네요.ㅎㅎ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세상만물은 모두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루하루가 새로우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때론 성가시고 때문에 바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생활이 좋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마시는 커피 한 잔.
혼자 마시기 아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