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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10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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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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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2Rlcozgi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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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건방진 당나귀는 하루 온종일 불상(佛像) 대신 무거운 바위를 몸에 싣고 날라야만 했습니다!>
동물 중에 꽤 재미있는 녀석이 당나귀입니다. 말과에 속하지만 말보다는 훨씬 인물이 떨어집니다. 체구도 작고 웃기게 생겼습니다. 속도도 느린 관계로 주로 짐을 운반할 때 활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당나귀 등에 멋진 불상(佛像)을 안치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불심(佛心)이 있는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깊이 절을 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당나귀 목에 걸린 불전함 속에 헌금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절을 하니 당나귀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한다고 여기고 우쭐해졌습니다. 고분고분하던 처음과는 달리 당나귀는 점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건방진 녀석으로 변해갔습니다.
당나귀는 주인이 자기 때문에 먹고 산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좀 쉬라 소리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주저앉기 일쑤였습니다.
할 수 없이 주인은 그 건방진 당나귀를 채석장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불상을 지고 다닐 성격 좋고 고분고분한 새로운 당나귀를 샀습니다. 건방진 당나귀는 하루 온종일 불상(佛像) 대신 무거운 바위를 몸에 싣고 날라야만 했습니다.
곰곰히 돌아보니 저 역시 건방진 당나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제 등 뒤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격려도 해주시고 도움도 주셨는데, 저는 그것을 간과하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서에도 비슷한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사제들 중에서도 수석 사제들이었으니 다들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입고 다니던 옷도 보통 사제들보다 훨씬 치렁치렁 화려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요. 처음에는 겸손하고 고분고분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멋진 복장에, 쩌렁쩌렁 심금을 울리는 강론 말씀에 큰 매력을 느끼고 깊은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길에서 만나면 정중하게 인사도 했습니다. 어딜 가나 제일 높은 자리로 안내를 받았고,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 역시 점점 건방진 당나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주인도 몰라보고, 주인께 감사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영적 생활이나 이웃 사랑의 실천은 잊어버린지 오래였습니다. 그저 돈만 밝히고, 잘 먹고 즐기는데만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이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날카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21장 31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 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말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개석상에서 펀치 중에서도 초강력 펀치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한 방 먹이신 것입니다. 주인도 몰라보는 건방진 당나귀 같은 그들에게 적당한 선물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면서도 메시아로 오신 당신을 끝끝내 거절하고 부인한 그들에게 ‘빅엿’을 하나 제대로 선사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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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음이 자기암시에 불과하다고?>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tDhzf9W60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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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직 믿음만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예도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거나 오랜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 그렇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능력으로 노력해서 삶이 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교리인데도 모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강조하면 개신교 신앙이냐고 하고, 믿음으로 변한다면 연기자들이나 가수들이 긴장될 때 거울을 보며 ‘난 잘할 수 있어!’라고 수없이 되풀이하는 ‘자기암시’와 뭐가 다르냐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믿음을 그저 자기암시 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서 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이런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맏이는 결국 ‘그래, 그래도 난 아버지의 아들이지!’라는 믿음을 회복한 것이고, 둘째는 ‘근데 그분이랑 나랑 뭔 상관이야?’라며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러며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세리와 창녀까지 요한이 제시하는 ‘의로운 길’을 믿으니 변화하였는데, 왜 그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의로운 길’이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믿음이 단지 거울을 보면서 ‘나는 할 수 있다!’라며 자기암시를 하는 것과 같을까요? 물론 자기암시도 효과가 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정체성 자체가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우리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변화를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지 못함이 아니라 오히려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자신이 변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남습니다.
가톨릭에서도 믿음으로 삶이 완전히 변한 신앙인들이 많지만, 오늘 복음의 세리와 창녀의 변화를 생각하다 보니 ‘CBS 새롭게 하소서’에 나와 간증한 조윤숙 목사가 생각이 납니다. 그녀는 화류계의 여왕으로 살다가 회개하고 목사가 된 분입니다. 조윤숙 목사는 강원도 정선에서 가난한 5남매의 딸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서울에 있는 어느 집의 수양딸로 보내졌습니다. 자녀들이 다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그녀는 고아로 성장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유명한 요정에서 마담으로 화류계를 시작하였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까닭에 인기가 높았습니다. 자신의 요정을 차리고 바닥에 뿌리고 발로 치우며 다닐 정도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고급 외제차에 고급 운동,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과 담배, 나이트클럽을 돌아다니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헛헛한 마음은 무당을 찾아다니며 달랬습니다.
요정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사채업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뒤를 봐주던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부도를 맞고 빚쟁이들과 형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죽기 위해 설악산에 갔습니다. 부모님 산소에도 형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갈 수가 없었고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만날 수 없다는 고통이 더 깊이 사무쳤습니다. 수면제 60알과 동맥을 끊기 위한 면도칼, 그리고 소주 한 병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길 아스팔트 위에 작은 틈을 비집고 자라는 새싹이 보였습니다. 삶의 무상함 속에서 작은 생명의 위대함이 묵상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보니 창조주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녀본 적이 있어서 하느님이 계신다면 내 꼴이 이게 뭐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죽어야겠다고 더욱 굳게 결심하고 계속 올랐습니다. 죽으려고 하기 직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순간부터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사진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 뒤에 엷은 천으로 가려져 있고 누군가가 서 있었습니다. 모든 자신의 삶 뒤에 똑같은 사람의 모습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엄마 죽지마’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었다.”
이 음성을 느끼는 순간 자신을 경직되게 만들었던 어떤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됩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12시간 동안 수면제를 하나하나 계곡물에 던지며 이전의 삶을 버렸습니다. 꼬박 12시간 동안 울고 나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중에 여자 두 명이 다 찢어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를 보며 “미친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머리를 잡고 싸웠을 텐데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저 미친년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내려왔습니다.
경찰들이 말하기를 빚쟁이들이 그녀를 감옥에 넣어봤자 어차피 빚을 갚을 수 없으니 요정을 다시 일으켜 빚을 갚도록 하는 게 좋다고 고소를 취하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술집을 하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빚쟁이로 도망치는 것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술집을 하니 교회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몰래 다녔다고 합니다. 빚을 다 갚고 목사가 됩니다.
조윤숙 목사가 변한 것은 소위 ‘자기암시’ 때문이었을까요?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런 변화를 이뤄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가 길거리에 있는 걸인을 예수님으로 믿게 된 것은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김하종 신부가 가난한 아저씨에게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목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어떤 이들이 신앙은 그런 자기암시가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앙은 무엇이란 말일까요? 결국, 혼자의 노력으로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유다 지도자들의 메마른 신앙이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셨다는 믿음, 이웃이 그리스도로 보이는 믿음, 또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 이 믿음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 하고 본인 노력으로만 변하려 한다면, 한다고 해놓고 하지 못하는 둘째 아들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만으로 변하고 믿음만으로 구원됩니다. 결코, 교회 내에서 유일한 의로움의 길인 믿음의 힘을 깎아내리는 생각들이 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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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복음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죄가 크다는 것과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비유이다. 첫째 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노아의 후손들인 다른 민족 사람들을, 작은아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맏아들이 바리사이들을, 작은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28절)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현세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포도밭은 우리의 본성에 심어진 정의를 뜻한다. 그래서 포도나무들은 각기 다른 정의를 나타내며 각 사람은 자신의 덕에 따라 포도나무들을 많게 또는 적게 가꾼다. 그러니 포도나무 전체를 잘 가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맏아들은 “싫습니다.”(29절) 하였지만, 나중에 일하러 갔다. 아버지 앞에 “싫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과 그분의 정의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교인들이 ‘우리는 당신에게서 배운 정의를 실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싫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정의를 실천하러 포도밭으로 간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30절) 작은아들로 묘사되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와 세례자 요한에게 지시를 받았을 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딴 나라 사람들이 저를 속였습니다.”(시편 17,45 칠십인 역)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 거짓말을 했다.
“이 둘 가운데에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 라는 물음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31절) 대답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이 비유의 뜻을 자기들한테 불리하게 해석하고 만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 맏아들은 다른 민족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하셨다.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라고 하신 적이 많다. 우리도 잘못 살면 주님께 그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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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스바니야는 히브리말로 ‘주님께서 피난시켜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레미야 예언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성전 주위에 머물며 심판을 예고하고, 동시에 열심히 살려는 이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와 민족들에 대한 심판, 복구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 세 장뿐인 스바니야 예언서의 마지막 장 전반부를 대림 시기의 한가운데인 오늘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바니야는 이방 민족들의 회개와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언급한 뒤, 남은 이들의 신앙 자세를 ‘가난한 자’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가난함이란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영성적으로 ‘마음이 가난함’을(마태 5,3 참조) 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의 삶의 자세가 과연 무엇인지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싫다고 답하였지만 마음을 바꾸어 밭에 가서 일하는 맏아들과, 가겠다고 답하였지만 실제로는 일하지 않는 다른 아들의 태도에서 무엇이 중요한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분을 기다리는 이때에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순종을 뜻하는 라틴어는 ‘집중해서 잘 듣는다.’라는 표현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이며 자신의 생각을 접는 기도와 함께, 그분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가난한 자로 사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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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두 아들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ㄱ)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ㄹ-32)
여기서 ‘너희’는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바리사이들’이고(마태 21,23.45), 이 말씀은 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기득권층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죄인 취급하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데, 너희는 왜 회개하지도 않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느냐?”
1) 이 말씀에서 ‘포도밭 일’은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신앙생활은 좋든 싫든 아버지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아버지의 일’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또 ‘내가’ 원해서 하는 ‘나의 일’입니다. 바로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신 ‘노동’을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생활이고, ‘기쁜 일’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억지로 해야 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고 보람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1코린 15,19)입니다. 신앙생활은 강제 노동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또 내가 기뻐서 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참석하기를 원해서 참석하든지, 참석하기 싫어서 참석하지 않든지 간에 그것은 각자 자신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각자 자신에게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2) 아들들은 ‘종’도 아니고, ‘삯꾼’도 아니고, 아버지의 포도밭을 물려받을 상속자들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7) 따라서 아들들이 포도밭에 가서 일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들의 밭에서 자기들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가 상속받을 밭에서 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밭’에서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또는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상속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면 상속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3)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을 하느님의 ‘맏아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상속권이 있는 적자(嫡子)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속권 없는, 또는 상속 때 순서가 뒤로 밀리는 서자(庶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했던 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즉 “저 군중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을 ‘맏아들’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누구든지 먼저 회개해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누구나 하느님의 적자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사제들과 원로들과 바리사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입니다. (교만한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반성하지는 않고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화를 내기만 합니다.)
4) 비유에는 회개한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하느님 나라는 ‘먼저’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 ‘들어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나라입니다. 시간 순서만 보면 스테파노 순교자가 먼저 들어갔고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들어갔는데, 그 ‘먼저’와 ‘나중’ 사이에 어떤 차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나중’에 회개하겠다고 미루다가는 그 ‘나중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과 회개는 언제나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지금’입니다. 비유를 보면, 맏아들이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 ‘나중’은 긴 시간이 흐른 뒤가 아니라 ‘오늘 중에’ 한 일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고치지 못할 병이 없는 분이지만, “나는 건강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치유의 은총’을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고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병자 자신이 거부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나는 이미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의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위선자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이고 병자들입니다.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못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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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드라마 ‘바바리안(barbarian)’을 보았습니다. 독일에서 제작된 드라마입니다. 드라마는 2,000년 전에 있었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상과 내용도 좋았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로마라는 강대국이 가지는 문화와 군사력은 당시 게르만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했습니다. 게르만족은 로마에 공물을 바치고,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됩니다. 20세기에 강대국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은 무시되었고, 자원과 사람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시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런 일은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에도 있었습니다. 21세기에 우리는 더 이상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유와 독립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장은 로마와의 평화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었습니다. 족장의 아들은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부족을 위해서 로마와 싸우게 됩니다. 아직 로마의 군인이었을 때입니다. 각 부족을 돌아다니면서 아들을 빼앗았습니다. 족장들은 분하고, 억울하지만 아들을 내어 주었습니다. 힘으로는 로마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족장들을 모두 모아놓고 빼앗았던 아들들을 돌려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아들을 빼앗으러 갔을 때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아들을 내어 주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예전에 나를 로마에 빼앗겼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하면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두렵습니다. 많은 희생과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싸웁시다.” 족장들은 모두 힘을 합하였고, 드디어 로마와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일치와 화합으로 바꿀 수 있다면, 두려움과 걱정을 용기와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과 꿈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겼고,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주님이 당신 종들의 목숨 건져 주시니,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 바바리안의 젊은이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서 희망을 잃어버린 부족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들에게 더 강한 힘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변하였고, 그들이 하나 되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우리는 매년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대림초는 켜져 있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말씀을 듣습니다. 대림초를 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으로 대림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꾼다면 매일 매일의 삶이 설렘과 희망의 대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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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걸음>
마태오 21,28-32 (두 아들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한걸음>
내딛은 한걸음 뒤에
내딛을 한걸음
내딛은 한걸음 바르다면
내딛은 한걸음 이을
한걸음 당당하게
내딛을 한걸음 앞에
내딛은 한걸음
내딛은 한걸음 그르다면
내딛은 한걸음 바꿀
한걸음 겸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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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찬미예수님
새해가 되면 우리는 언제나 변화를 꿈꿉니다. 올해는 어떻게 살아야지 계획을 짜고 새로운 목표를 세웁니다. 헬스장에 등록하는 사람도 있고, 어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도 있고, 인간관계를 잘 유지해야지, 가족들에게 좋은 말을 써야지 다짐하기도 합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발달하고 여러 가지 유용한 디지털 프로그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말이 되면 쏟아지는 다이어리의 모습들이 이러한 우리의 모습들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짐들에는 결국 새로운 계획이 전제되어 있으니 많은 이들이 변화를 꿈꾸고 있는 것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는 흔한 말이 있듯,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정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 구정이 진짜 설이지, 이제 다시 시작이야’ 라고 변화를 다시 다짐하지만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계절과 달이 때마다 돌아오니 그때마다 새로운 변화를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고. 우리의 1년은 그렇게 지나왔습니다.
올해를 맞이하며 제가 했던 결심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기 위해 밤에 일찍 잠들기. 그러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밤에 밀린 일을 하느라 바쁘고 어쩌다 일찍 침대에 누워도 말똥말똥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새벽 한시 두시까지 깨어있기 일쑤입니다.
워낙에 바빠서 그런가보다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분명 아침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시간을 쪼개 쓰면 얼마든지 밤에 쉴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나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니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을 돌아볼 때마다 저는 다음의 라틴어 격언을 떠올리곤 합니다. Lupus pilum mutat, non mentem. 늑대는 털을 바꾸어도 마음은 바꾸지 않는다. 즉,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하고 부지런한 활동을 하고자 하는 저의 모습조차 제게는 꽤나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밤늦게 잠이 드는 것 보다 하루라도 잠을 일찍 자는 것이 제 몸에는 이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 드는 생각은, 그래도 매일매일 의지를 갖고 있다 보면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언젠가 변화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새해가 되면 또 다시 같은 목표를 세울 생각입니다. 조금 더 부지런해지고 잠을 일찍 청하기. 그렇게만 된다면 생활도 훨씬 활력이 있을 것이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테니 다시 한 번 변화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변화를 언제나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어려운 일임을 충분히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변화를 일구어낸 사람을 특별한 위치로 격상시켜 칭찬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을 치하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예언하십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께 삶을 봉헌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녀들과 국가의 배신자인 세리들이 더 낫다고 하시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입장에서는 분개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창녀들과 세리의 신분을 지칭하는 이 단어들은 <과거>의 그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 예언하는 이들은 <과거>에 창녀와 세리였지 <지금>은 아닙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예언을 믿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들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있고 성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한편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히려 거부하고 배척한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왔음에도 변화하지 않고 마음 속에 열등감과 미움을 계속해서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결국 이 두 그룹의 차이는 “변화”에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변하고자 하는 마음이 창녀와 세리들을 하늘나라로 이끌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제자리에 서있을 뿐인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자칫 그들이 한 순간에 마음이 변화되어 흠결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 인간의 본성은 변화되기 힘들기에 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지난 과거가 분명 그들의 마음을 옭죄었을 것입니다. 이전의 습관들이 몸에 베여있기도 했을 것이고 지난 인연들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의 생리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끊임없는 변화의 의지와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의지가 하루하루 쌓이고 쌓여 변화를 이끌어냈을 것이며 그렇게 점차 완성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해를 마무리해가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변화를 꿈꾸며 또 다시 하느님을 향한 계획을 수립해야 하겠습니다. 상황이 나아지면 미사에 성실히 나가고, 보다 선한 삶을 살아갈 것. 아니, 선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니 적어도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나정도 실천하기가 괜찮겠습니다.
어차피 작심삼일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결심이 아예 결심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고 비록 듬성듬성일 지라도 그것은 점차 공적으로 쌓여갈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창녀와 세리에게 말씀하셨듯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게 되리라 속삭이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결심이 위태로울 때마다 제가 떠올리는 또 다른 라틴어 격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A deo vocatus rite paratus.'(신은 적절하게 준비된 자를 부른다.)
변화를 향한 하루하루가 바로 이 준비의 시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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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영수 스테파노 신부님]
<자신을 알아라>
초등학교 시절 줄줄이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우리의 처지를 안다는 것, 나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운동선수는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 상태를 파악하여 부족한 근력·순발력·정신력·판단력을 과학적으로 개선한다.
수험생은 부족한 과목에 좀 더 시간을 배정해야 성적을 올릴 수 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생활에서도 자신이 모자라는 분야에 대한 충분한 개인적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적절한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매일 신세타령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두 아들의 비유에서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침이 된다. 주일미사 때 듣는 복음과 강론을 통해 과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복음적 삶이 되는지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여라. 온유하여라. 겸손하여라.” 등 좋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과연 이를 실천하고 있는가? 미사 시간에는 그래야지 하면서 반성하고 다짐하지만 성당 문을 나오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오늘 말씀에 또 다른 아들과 같이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와 같은 일이 반복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실천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신다. 우리도 성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복음을 그대로 살아가는 용기를 배워 실천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마음속에 의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세상 속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보는 눈이 무서워 망설이기 때문에 의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복음 생활이 우리가 구원받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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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멈춰 버린 자동차>
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하느님께 받은 권한을 올바로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라고 묻는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오늘은 어제 말씀에 이어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과 그 결과를 알려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요한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았을까?’에 대해 부족한 설명이지만, 어제 저의 체험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한적한 숲속 길에 하얗게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걷고 싶은 마음에 제2횡단도로 어리목을 향했습니다. 유명한 도깨비 도로를 지나자, 눈이 내렸을 때, 차량을 통제하는 임시 검문소에서 경찰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위에 도로가 얼어버려 올라가지 못합니다.’라는 말씀에, 저는 ‘저 위에만 갔다가 금방 올 겁니다.’라고 말하며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저 뒤를 따라오다가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듣고, 방향을 돌리고 돌아가는 차들을 보며... 그리고 길가 옆에 차를 세워놓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쯔쯔... 겁은 많아가지고..’ 라며 거만한 모습을 비웃었습니다.
검문소를 지나, 일방통행으로 들어서니, 눈발이 거세지고 도로가 많이 얼어 있었습니다. ‘이왕에 온 거, 그래도 천왕사까지는 가야한다.’며 욕심을 냈습니다. 그런데, 일방통행에 접어들어 한 300m쯤 가다 보니, 차가 빌빌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심 걱정하는 순간, 차가 멈춰버렸습니다.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뒷걸음칠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바로 뒤따라오는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앞으로는 가지 못하고 뒤로 가야하는 상황이 내심, 걱정도 되고 참 막막했습니다.
차가 오래 되어 힘이 없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평소에 어느 정도 속력을 내어주기에, 별 걱정 없이 빙판길을 올랐는데,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싹 긴장하며 후진으로 왔던 일방통행 길을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보면, 저처럼 경찰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고 올라오는 차들이 있어서 옆으로 비켜서야 하기에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산을 깎아 만든 도로여서 커브길이 참 많았습니다. 한 두세 번 차가 빙글빙글 돌며 구덩이에 빠질 것 같은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 머릿속으로 경찰관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분명, 내 의지대로 이곳에 와서,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만, ‘안 됩니다. 가지 못합니다. 돌아가십시오.’라고 강하게 반대하지 않은 그 경찰관 아저씨가 못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순순히 차를 돌려 되돌아간, 그 힘 좋은 고급 승용차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내려왔습니다만, 다음부터는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제가 경찰관 아저씨의 말씀을 무시한 것은, 어쩌면, 운전에 대한 자신감 때문입니다. 운전을 좀 잘한다는 교만한 마음과 도로 상태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뭐 이정도 얼어붙은 것, 쯤이야!’ 라는 안일함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함과 안일함이 어제와 같은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어제, 제가 얼마나 운전을 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가 요한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은 이유 역시, 자신들에게 있는 교만함과 안일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교만함, 적어도 이름모를 촌뜨기 요한보다 더 많이 배운 사제요, 원로라는 교만함이 요한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교만함은 우리 삶에서도 종종 체험됩니다. 성당에 더 오래 다녔다는 교만함... 하느님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배워 알고 있다는 교만함...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기도를 드린다는 교만함... 자신에게 좋은 말이나, 필요한 충고를 하는 사람보다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믿었고, 더 많이 생각했고, 더 많은 체험이 있다는 교만함이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버려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참되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참되게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도 귀와 눈을 막고 있는 교만함과 안일함을 조금씩 걷어내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늘 복음의 큰 아들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매번 둘째아들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그리고 경찰관 아저씨의 말씀을 잘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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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굉장한 곳으로 상상합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일러주신 하느님 나라는 약간 실망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차지하는 그곳은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들의 나라라고 밝혀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 꾸중을 듣고 예수님께 지적을 당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았고 성경을 공부했던 부류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난 하느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의 전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자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까닭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공부로 지식을 쌓는 일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기만 할까요?
알지도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모르면서 제대로 실천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믿음도 사랑의 실천도 결코 주먹구구로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알되 제대로 깨닫고 받아들이되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설 때에 그분의 뜻을 살펴 행하는 지혜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 능통한다면 더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일러주신 지혜는 의로운 길을 배워 생각을 바꾸고 끝까지 믿음으로 일관하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작은 아들은 결코 큰 불의를 저지른 죄인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사기 칠 생각도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떤 급한 사정이 생겨서 포도밭에 갈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정을 일절 살펴주지 않으시니 너무합니다. 아무리 하느님나라는 작은 아들처럼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해도 좀 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가끔 하느님의 뜻에 입을 내밀고 더 가끔 하느님의 뜻에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못 이겨서 할 수 없어서 한 발 옮겨보고 다시 물러서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두 발 떼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품으시고 ‘실천하는 믿음’이라 평하시는 주님이라 싶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작은 아들의 허세를 놓치지 않고 헤아리시는 주님의 정의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되 철저히 사랑하라는 분부로 새깁니다.
대림은 그분의 쏟아 붓는 사랑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우리를 택하시는 모습에 소스라쳐 놀라는 때입니다. 우리 영혼이 그분의 마음에 고와진다면 그분께서는 더 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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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 성공학의 대가를 뽑으라고 하면 아마 곧바로 이 사람을 말할 것입니다. 힌트 하나를 더 말씀드리면, 이 사람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썼습니다. 맞습니다. ‘스티븐 코비’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리더십의 기초를 세웠으며, 어마어마한 판매 수입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깜짝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2012년에 사망한 스티븐 코비가 파산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책을 출판하고서 말이지요.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영감을 주는 책을 저술한 사람이 어떻게 파산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책 내용 모두가 거짓일까요?
기자들은 그 이유를 스티븐 코비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파산 이유는 내가 쓴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실천하지 않으면 헛일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떨까요?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 말씀을 읽었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은 분명히 우리에게 커다란 힘이 될 수 있고, 진정한 성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단, 성경의 내용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오늘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 말씀입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맏아들은 싫다고 했다가 생각을 바꿔서 일하러 갑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가겠다는 말만 했을 뿐 정작 가지 않지요. 그러면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처음에 부정하고 실천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뉘우치고 실천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처럼 말만 하는 사람은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리와 창녀들이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시지요.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믿은 뒤에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작은아들처럼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 모습은 맏아들의 모습인지, 작은아들의 모습인지를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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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접근학을 연구한 에드워드 홀에 의하면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에 비례해서 가까울수록 거리는 짧아진다고 합니다. 보통의 경우,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은 언제라도 안아줄 수 있는 팔의 반 정도 거리인 15~46㎝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것을 ‘친밀한 거리’라고 합니다. 어른들이 ‘품 안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야말로 품 안에 들어오는 거리니까 친밀한 거리입니다.
그리고 친구나 직장 동료는 팔을 쭉 뻗어서 악수하거나 등을 두드릴 수 있는 거리인 46㎝~1.2m 정도의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것을 ‘개인적 거리’라고 합니다. 낯선 사람이나 배달원, 가게 주인과 같이 잘 모르는 사람들과는 1.2m~3.6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안하게 느끼는데, 이것을 ‘사회적 거리’라고 합니다.
낯선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과의 거리는 멀수록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거리를 당연히 두어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힘들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관계가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로 좁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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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듣는 사람>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21,28) 하였을 때 말을 들은 사람은 포도밭에 가서 일한 사람입니다. 대답은 하고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러므로 언제나 삶으로 말하십시오. 사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소위 한자리하는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2)고 한 말씀은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라는 요한의 말을 들었고, 들은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내로라하는 사람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부름은 주어졌고,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이들은 받아들였고, 똑똑한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끝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아는 게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가 7,29-30)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회개의 초대에 기쁘게 응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이상 하늘 문은 늘 닫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들읍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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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나뷤(anawim)의 영성>
-본질에 충실한 삶; 가난,겸손,순종-
대림시기, 원천의 순수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입니다. 참으로 본질에 충실해야 할 때입니다. 코로나19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흡사 현재의 인류의 교만과 탐욕을, 문명을 비웃는 듯 합니다. 이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같기도 합니다. 뾰족한 대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백신에 희망을 걸지만 이 또한 확실한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언론 매체가 온통 코로나19에 대해 보도하지만 답은 없습니다. 거리두기, 마스크하기 밖에는 별 대책이 없습니다. 이래저래 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근본적인 생태적 회개가 필요한 때입니다.
살아갈수록 더 복잡하고 바쁘고 힘들어지고 욕심도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하여 노추란 말도 생긴 듯 합니다. 이래서 자신을 늘 새롭게 추스르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혼자서의 삶이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욱 연결과 연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삶은 홀로의 여정이 아니라 도반과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어디선가 ‘삶의 40%는 돌봄’이란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혼자서의 삶인 듯 하지만 돌봄의 산물이라라는 것입니다. 저를 보니 40%가 아니라 100% 돌봄 같습니다. 제 손으로 구입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식당에서 먹고 있는 음식들, 집무실의 책에서부터, 옷장의 옷, 지금 현재 입고 있는 옷, 구두, 모자, 전부가 따뜻한 수도공동체와 이웃들의 사랑의 선물들입니다. 얼마나 이웃과 세상에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습니다.
이를 정말 깨달을 때 저절로 감사와 겸손입니다. 참으로 한없이 많은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대형교통 사고시에도 하느님은 저를 살려 주셨으니 생명의 빚 또 얼마나 큰지요! 하여 이런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마음으로 매일 이른 새벽 일어나 강론을 씁니다.
연결되어 이어지면 살고 단절되어 끊어지면 죽습니다. 참으로 고독과 침묵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연대와 일치에 목적이 있습니다. 더욱 깊은 연대와 일치를 위해 홀로와 함께는 균형과 조화는 필수입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의 연대는 필수입니다. 코로나19와의 지루한 전쟁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얼마전 지인으로부터 책 선물을 받았습니다. ‘도서출판 도반’이란 출판사 명이 이채로웠습니다. 장애인들이지만 영롱한 시들이 순수한 영혼들임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최명숙 시인의 '심검당 살구꽃' 끝연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답고 은은하던지요!
-“스님은 어디 가셨는지 살구꽃이 져서/심검당 뜰이 온통 하얀데
바람은 꽃잎을 떨구고 어디로 갔나/꽃은 지는데 아무도 없다.”-
참으로 가난하고 순수한 영혼만이 쓸수 있는 시같습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대림시기에 요즘 너무 마음 바쁘게 엄벙덤벙 살아왔음을 반성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평생 매일이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시기의 날들입니다. 시집의 서문 스님의 축하글 일부도 마음에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이 부처님께 ‘도반道伴과 수행의 관계’에 대해 묻자, 부처님께서는 ‘도반은 수행의 전부’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시작을 통해 고난의 시기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데 작가님들은 좋은 도반입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건 주인공으로 살면 바로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진실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면 하루하루 즐겁고 기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 될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마음이 가난한 도반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아나뷤의 영성입니다. 아나뷤은 바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로 온통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걸었던 사람들이요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어제 성 요셉, 바로 하늘이 신뢰했던 사람이란 글을 읽었는데 하느님도 참으로 신뢰했던 아나뷤들입니다. 무엇보다 큰 기쁨이자 행복은 하느님께 신뢰와 사랑을 받을 때 일 것입니다.
코로나로 외롭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아나뷤의 영성입니다. 하느님과 가난하고 착한 이웃 도반들에게 깊이 연대의 뿌리를 내리고 일일시호일 매일 좋은 날을 살아가는 아나뷤들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스바니야서가 아나뷤을 소개합니다.
“나는 네 한 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가난한 아나뷤 도반 공동체에 대한 묘사입니다. 바로 이런 아나뷤의 후예가 수도자들이자 신자들입니다. 사실 시편은 가난한 아나뷤들의 묘사입니다. 화답송 렴은 그대로 가난한 아나뷤의 기도입니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하느님 친히 당신께 전적 희망과 신뢰와 사랑을 두고 살아가는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당신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친히 보호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이 상징하는 바 이런 아나뷤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아들로 상징되는 지도층에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이 비유를 들려 줍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행입니다. 처음에는 “싫습니다.” 거절했지만 회개로 생각을 바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포도밭에간 맏아들입니다. 바로 맏아들이 상징하는 바, 당대 소외와 가난의 삶을 살았던 아나뷤의 후예와 같은 세리와 창녀들이요, 이들이 실은 내적으로는 가난하고 겸손하고 순수했던 아나뷤의 영성을 지닌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은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속하는 지요. 그대로 두 부류의 신자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가난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 아나뷤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평등하게 가난한 빈 손으로 성체를 모시러 줄을 섰을 때 먹을 성체를 기다리는 하느님의 가난한 거지, 아나뷤의 모습은 언제 봐도 감동적입니다. 바로 영성체전 이 장면은 가난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아나뷤 도반 공동체를 보여주는 미사의 절정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경고같은 코로나 19팬데믹이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 본질적 삶을 살도록, 바로 하느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아나뷤의 영성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나뷤의 영성을, 바로 가난과 겸손과 순종, 그리고 신뢰와 희망과 사랑의 영성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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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아픈 손가락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세리와 창녀들을 죄인 취급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물으십니다. 아버지의 명을 처음에는 거역했지만 뉘우치고 뒤늦게라도 따른 맏아들과, 그 자리에서는 순순히 응하고는 실제로 실행하지 않은 또 다른 아들을 대비시키신 겁니다.
누구에게나 모범적 종교인으로 추앙받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지만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 눈에는 다르게 비칩니다. 그들은 제도와 형식 안에서는 "예" 했으나, 마음으로는 완고히 "아니오" 하고 있는 "또 다른 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반면 누구에게나 손가락질 받는 세리와 창녀들은 당장은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고 사는 "아니오"의 대표주자들 같지만, 자신이 약하고 부족한 만큼 회개를 꺼리지 않고 돌아서서 진심에서 우러난 "예"를 올릴 수 있는 이들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스바 3,12)
유배 때 소위 배우고 능력 있고 기술 있고 잘난 사람들, 또 왕족이나 귀족들은 대거 이국땅에 끌려가서 이민족을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약하고 병들고 별볼일 없는 이들은 이스라엘에 남아 황무지처럼 유린된 땅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지요.
그런데 이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신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제 업적으로 가로채 허세부리지 않고, 축복과 은총을 당연한 듯 삼켜버리지 않을 것이니까요. 좋은 머리와 기술을 남 속이는 데 쓰지도 않고, 힘으로 남을 위협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들은 가난하고 가련한 만큼 주님의 이름에 피신합니다. 주님 외에 자기들을 돌보고 보호하며 살려 주실 분이 없음을 아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께 피신하는 이 모두 죗값을 벗으리라."(화답송)
가난하고 가련하다고 죄를 짓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기에 회개도 빠르고 진실합니다. 약해 빠져서 금새 또 넘어지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들을 안타깝게 연민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진정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께 달아들 때마다 매번 지치지 않고 끌어안아 주시지 않을 수 없지요.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이야말로 자비의 하느님을 자비하신 분답게 만들어 드리는 이들입니다. 자비의 아버지다움을 최대치로 발휘하게 만들어 드리는 이들이지요.
아마도 수석 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께 선택된 자기 민족 안에 세리나 창녀 같은 이들이 공존한다는 것을 못마땅하고 수치스럽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하지 못할 족속이고 상종 못할 말종이라 여겨 낙인 찍고, 나와는 다란 사람이라고 대놓고 소외시켰지요. 하지만 자칭 의인들이 죄인이라 부르는 이들이 곧 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더 보듬고 애틋이 돌보시는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과 사회, 공동체 안에도 그런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만 아니면 우리는 꽤 폼 나고 괜찮은데 싶은 사람 말입니다. 또 한 사람 안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지요. 요 부분만 빼면 스스로 제법 괜찮은 사람 같은, 그런 죄스럽고 나약한 부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서도 말씀하시듯, 사람이든 어떤 부분이든 우리 존재와 우리 공동체에 그런 부분과 그런 사람을 남기신 것은 주님의 의지입니다.
그 부분, 그 사람이 있어야 우리가 삽니다. 주님의 자비와 연민, 은총이 그 때문에 오니까요. 그래서 그 부분이나 그 사람을 대하는 척도가 그와 그가 사는 공동체의 영적 수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신분이나 업적, 숫자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로 의롭게 됩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절박하고 가난한 이들이 결국 의로움을 획득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현세의 삶에서 안위와 풍요와 무탈을 누리며 이것이 구원인 양 착각하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주님의 뜻을 살필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자신 안의 가난하고 가련한 부분,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 안의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을 포용하고 보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는 떼어내버리고 싶은 수치가 아니라 우리와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끄는 "진홍색 실로 된 줄"(여호 2,18)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을 껴안고 주님 자비 아래로 피신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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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남편이 죽어있는 저를 살려 주었어요.”
2000년, 중국 산둥성에서 한 환자가 의료 사고로 뇌사상태인 아내를 극진히 간호해 8년 만에 깨어났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지만 2008년 짱씬의 아내는 임신을 한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아내는 “남편이 죽어있는 저을 살려주었어요.”
♣남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기를 낳아 주는 일이다. 다행히 아기와 산모는 건강했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표현한 결실로 이들은 하나가 된다. 이 사랑의 신비 안에서 삼위일체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아내에게 주는 돈은 피를 흘림으로써 번 돈이고 성부께서 성자에게 세례 때 주셨던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다’ 주셨다는 뜻이다. (요한 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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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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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권한에 대해 논쟁을 마감하신 후에 세 개의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모두 하느님 나라가 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거듭 밝히십니다. 이 세 비유에는 ‘아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간 아들과, “가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실천한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곧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26)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1-32)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에서 가서 일하는 것은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응답은 하여 포도밭에 오기는 하였지만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하며 믿는 이들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수도원)이라는 포도밭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였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물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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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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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21,31)
<두 아들의 비유!>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누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또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했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도 믿지 않았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을 칭찬하십니다. 그들이 생각을 바꾸어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께로 돌아오는 이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날에는, 네가 나를 거역하며 저지른 그 모든 행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스바3,11)
생각을 바꾸어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이것이 '주님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주님께로 돌아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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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1a_lJsmOU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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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 32)
회개는
1인칭이다.
그 누구도
대신하여
줄 수 없다.
절박함으로
더 깊어지는
우리들 삶이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것이
회개이다.
끝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들
신앙이다.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우리들이다.
고결한 정신도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다.
무너져도
우리의 모습을
되찾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무너짐이
있는 곳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개가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믿음도 있다.
극과 극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다.
높고 낮음이
없다.
모두가 소중한
주님의
자녀들이다.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무감각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실천의 회개이다.
생각을 바꾸는
실천으로
우리는
새로워진다.
우리의 아픔을
넘어서는
새로움이다.
절박함과
갈망으로
다시 찾게 되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참된 회개와
절박한 신앙은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다.
과거의 것을
허물고
새 것을 짓는
회개의 대림이며
실천의 대림이다.
생각을 바꾸는
거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있음을
믿는다.
하느님의 나라는
더 깊어지는
회개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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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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