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5FZq7X2E
자아(自我) 의식은 객관적 자아의 존재를 반영하는가?
자아(自我)
1. 연속성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감정을 동반하며 우리의 전체 경험을 모아놓은 실타래에 이어지는 실과 같은 연속적인 감각.
2. 자아의 일체성 혹은 일관성이다. 감각적 경험, 기억, 신념과 사고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는 한 인간으로서, 통일체로서 우리 스스로를 경험한다.
3. 구체적 감각, 혹은 주인의식이다. 우리 자신이 신체에 고정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4. 우리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맡고 있는 자유의지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타인의 손가락을 움직일 수는 없다.
5. 자아는 그 본성상 반성할 수 있다는 것, 즉 스스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인식할 수 없는 자아란 어법상 모순이다.
자아는 본질상 일체성으로만 경험된다.
다중성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도 동시에 두 가지 인격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각 인격이 번갈아서 나타나며 상호 인격은 기억하지 못한다. 즉 어느 순간이든 중심에 서 있는 자아는 나머지 자아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거나 희미하게 인식할 뿐이다.
심지에 두 개의 반구가 외과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분할 뇌 환자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환자는 두 개의 자아를 경험하지 않는다. 나머지 자아의 존재를 지적으로 연역할 수 있을지라도 각 반구의 자아는 그 자체만 인식할 뿐이다.
[뇌는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 / 라마찬드란 지음 / 이충 옮김 / 바다출판사] 중에서 발췌
다른 책에서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나’가 아니라 내가 존재한다는 그 ‘생각’이다.”라고 하면서
자아란 좌뇌가 지어낸(해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dalbat1/221748715112
또 다른 책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의식하는 자아가 나를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면 우리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진화심리학에서 흔히 내놓는 답은 마음이 모듈(module)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에 관한 모듈 모형’(modular model of mind)이라고 하는데, 이 모형에서는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처한 특정 상황을 평가하고 판단해 그에 대처하는 수많은 특화된 모듈로 구성되어 있을 뿐, 본질이라고 할 만한 의식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는 의식하는 자아가 아니라, 많은 부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모듈끼리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이다.”
https://blog.naver.com/dalbat1/221475044231
마음이 모듈로 되어 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뇌는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를 더 참고합니다.
흥미롭게도 뇌의 특정 부위가 손상된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인식능력이 저하되는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다른 기능은 제대로 발휘되는 대신 어떤 특정 기능이 선택적으로 상실된다. 이런 사실은 영향을 받은 뇌 부위가 상실된 기능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내가 즐겨 사용하는 몇 가지 사례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카프그라 망상 환자의 경우
우선 안면인식장애를 살펴보자. 뇌의 양 측면에 존재하는 측두엽의 방추이랑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을 읽을 수는 있으며, 장님도 정신병자도 아니다. 그러나 얼굴만 쳐다보고서는 그 사람이 누군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안면인식장애는 매우 잘 알려진 반면, 카프그라 증후군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얼마 전 진찰을 받은 어느 환자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머리에 충격을 받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몇 주 후 혼수상태에서 벗어난 그 환자를 내가 진찰했을 때, 신경계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심한 망상에 빠져서 친어머니를 보고도 나에게 “의사 선생님, 이 여자는 우리 엄마와 똑 같이 생겼지만 우리 엄마가 아니라 사기꾼입니다.”라고 말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우선 그가 가지고 있는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뭔가를 본다는 것이 간단한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여러분의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아무런 노력 없이도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여러분의 두 눈동자 속에는 위아래가 바뀐 세상의 왜곡된 작은 형상이 있을 뿐이다. 이 작은 형상이 망막 속에 광수용체를 자극하면 그 형상 정보는 시신경을 따라 여러분의 뇌 뒤쪽으로 이동한다. 각각의 정보는 뇌 뒤편에 있는 서로 다른 30개의 시각 영역에서 분석되고, 이런 과정을 거친 뒤 여러분은 마침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 형상이 여러분의 어머니인가? 범인가? 아니면 돼지인가? 이와 같은 인식과정은 뇌에 있는 방추이랑이라는 작은 영역에서 시행된다. 이 영역이 손상된 환자들은 안면인식장애 증세를 나타낸다.
일단 형상이 인식되면 그 정보는 편도라는 구조에 전달된다. 때로는 편도를 감정중추인 변연계의 통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분은 변연계를 통해 지금 보고 있는 사물의 감정적인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방추이랑과 모든 시각영역이 지극히 정상이기 때문에 데이비드(환자)의 뇌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의 어머니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고로 시각중추와 편도, 감정 중추를 연결시키는 전선이 끊어졌다. 따라서 데이비드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와 똑같이 생겼지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면 왜 내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어머니일 리가 없어. 그것은 단지 어머니의 흉내를 내는 이방인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 이때 데이비드의 뇌에서는 그런 생각만이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좌뇌의 해석)
더욱 놀라운 사실은 데이비드의 어머니가 그에게 전화를 할 경우 데이비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어머니임을 인식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망상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1시간 뒤 그의 어머니가 방문으로 들어서면 그는 그녀가 어머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위관자이랑에 있는 청각피질에서부터 편도까지 이어진 별도의 통로가 있으며, 그 통로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 인식은 사라진 반면, 청각 인식은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카프라 증후군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사고로 뇌의 시각영역과 감정중추, 변연계와 편도 사이의 연결고리가 단절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환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볼 때 얼굴을 인식하는 뇌 속의 시각 영역은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를 감정 중추로 연결하는 회선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그녀가 사기꾼이라고 믿고 그녀가 사기꾼임을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뇌 속의 시각 시스템
우리는 단지 하나의 시각 영역, 시각 피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의 뒤쪽에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30개의 영역이 있다. 왜 하나가 아닌 30개의 영역이 필요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각 영역이 시각의 상이한 측면에 맞게 특화되어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V4라는 영역은 주로 색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고 색을 보는 역할을 하는 반면, MT라는 두정엽의 다른 영역은 주로 움직임을 보는 역할을 한다.
뇌 양쪽의 V4가 손상되면 대뇌피질성 색맹 혹은 완전 색맹이라는 증후군을 낳는다. 색맹 환자는 흑백 영화의 무채색으로 세상을 보게 되지만, 신문을 읽고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하고 움직이는 방향을 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반대로 MT가 손상되면 그 환자는 여전히 책을 읽고 색을 볼 수 있지만 무엇이 얼마나 빨리,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볼 수 없다. 이런 장애를 안고 있는 취리히의 한 여성은 길 건너기를 두려워했는데, 그녀에게는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디스코텍의 섬광전구에 비추인 것처럼 일련의 정적인 이미지들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차의 색깔과 번호판은 볼 수 있었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지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잔에 와인을 따르는 것도 시련이었다. 얼마만큼 따랐는지 측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항상 와인이 흘러넘치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길을 건너거나 와인을 따른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시각의 메커니즘이 실제로 얼마나 미세한지,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깨닫는다.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코타르 증후군
자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코타르 증후군같은 더욱 특이한 질환도 있다. 나는 시각중추만이 감정 중추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감정 중추와 단절되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코타르 증후군은 카프그라 증후군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감정적으로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람도, 그 어떤 촉각이나 소리도 감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환자가 그와 같은 완전한 감정적인 고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것이다. 너무 황당무계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방법이다. 환자 자신의 감정을 수용하기 위해 이성이 왜곡되는 것이다.
코타르 환자의 망상은 매우 저항적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릴 수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코타를 환자를 바늘로 찌를 경우 그 환자는 놀라움을 표하며 자신의 망상을 포기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결국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린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상
본다는 것이 ‘내’가 ‘대상’을 ‘보는’ 나와 대상의 단순한 관계나 작용이 아니라 상당히 분화되고 복잡한 정신 작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모듈’이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어떻게든(=진실이 아니라도)’ 현상을 해석하려는 (좌)뇌의 작용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자아’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해석이 있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중성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도 동시에 두 가지 인격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각 인격이 번갈아서 나타나며 상호 인격은 기억하지 못한다. 즉 어느 순간이든 중심에 서 있는 자아는 나머지 자아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거나 희미하게 인식할 뿐이다.”
다중인격장애자의 자아는 연속성이나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각 인격은 모두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아는 본질상 일체성으로만 ‘경험’된다.” 이 말은 우리의 (좌)뇌가 자아를 해석할 때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연속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자아를 의식(해석)할 때는 언제나 연속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뇌의 해석)과 달리 자아는 뇌가 만들어낸 소설인 겁니다.
참고자료
https://m.blog.naver.com/goodwordschannel/222244891182
감각 덩어리인 오온이 공하고 자아가 없으므로 무생무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