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李穡)-식기(息機)(생각을 내려놓다)(마음을 쉬는 것이 약보다 낫네)
往事細如毛(왕사세여모) 이미 지나간 아주 작은 일들도
明明夢中記(명명몽중기) 꿈속에선 선명하게 생각이 나네
操戈欲逐儒(조과욕축유) 건망증 고쳐 준 사람 창 들고 쫓아냈다는
此言殊有理(차언수유리) 이 말이 참으로 일리가 있네
徙室或忘妻(사실혹망처) 아내를 놔두고 이사를 했다는 것도
非徒偶語爾(비도우어이) 우연히 한 말만은 아닐 것이네
一病今幾年(일병금기년) 몇 년간 병든 채로 지내온 지금
息機勝藥餌(식기승약이)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목은고牧隱藁)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하승현님은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이 지난 후까지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제한된 시간 안에 시험 문제를 못 풀어 쩔쩔맸던 기억이 있다. 바로 잊혀져도 괜찮을 기억들이 오래 남아 꿈속에까지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기억 장치는 나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작동하는 것 같다.
건망증을 고쳐준 사람을 창을 들고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열자’ ‘주목왕周穆王’에 나온다. 송나라 양리陽里에 화자華子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중년에 건망증이 생겨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저녁이면 잊고 저녁에 있었던 일을 아침이면 잊었다. 길을 가다가는 걷는 것을 잊었고 방 안에서는 앉는 것을 잊었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지금 모르고 지금 일어나는 일을 조금 지난 후엔 몰랐다. 그때 노나라의 한 선비가 화자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비방을 써서 하루아침에 그의 병을 고쳐 주었다. 그러데 화자는 막상 기억력을 되찾자 크게 노하여 처를 내쫓고 자식들을 벌주고 창을 들고 달려가 선비를 쫓아 보냈다. 건망증이 있었을 때에는 천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는데, 갑자기 기억이 돌아와 지난 수십 년 동안 얽히고 설킨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알면 복잡해지고 복잡해지면 괴로운 세상, 모르고 사는 게 약이었는데 그런 맘은 모른 채 병을 고친다며 번뇌의 바다에 다시 빠뜨렸으니 분하고 분하다는 이야기이다.
아내를 놔두고 이사했다는 이야기는 ‘공자가어孔子家語’ ‘현군賢君’에 나온다.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이사하면서 처를 데려오는 것도 잊는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공자는 그건 심하다고도 할 수 없으며 정말 심한 경우는 걸왕처럼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자신을 망각하는 것에 비하면 아내를 두고 이사하는 정도는 건망증 측에도 못 낀다는 말로 도리를 망각하고 처신을 잘못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한 것이다.
이즈음 목은 선생은 많은 생각으로 마음이 산란해지는 괴로움을 겪었던 것 같다. 건망증을 고쳐준 사람에게 창을 휘두른 일도 이해가 간다고 하고, 아내를 놔두고 이사한 것에 대해서도 그런 정도의 건망증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자신도 생각을 잊고 싶다는 마음을 은근히 내비치고 나서, 생각이 많은 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 병에는 생각을 쉬는 것이 그 어떤 약보다도 낫다고 처방한다.
생각이 지나치게 복잡하다 싶을 때에는 생각을 쉬는 것보다 좋은 보약은 없다. 옳으니 그르니, 이로우니 해로우니, 나니 너니, 좋으니 싫으니를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신을 온전히 쉰 뒤라야 시비와 이해와 관계와 지향에 대한 바른 판단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5). 본관은 한산(韓山,지금의 서천).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 4) 3월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 1) 4월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1357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 7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7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한림학사가 되고, 1360년(공민 9) 3월 추밀원좌부승선 지예부사(知禮部事)에 이르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였다. 이후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2년(공민 11) 원으로부터 정동행중서성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임명되었고, 고려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승진하였으며,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에 봉해졌다. 1363년 윤3월에는 1361년의 호종한 공으로 辛丑扈從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1365년 3월 첨서밀직사사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윤10월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예부시를 주관하였다.
1365년부터 시작된 신돈집권기 동안 그는 1367년 5월 중영(重營)된 성균관의 교육 부흥과 관련하여 12월 판개성부사로서 겸 성균대사성(兼 成均大司成)에 임명되어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1년(공민 20) 5월 지춘추관사로서 감춘추관사인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금경록(金鏡錄)을 증수(增修)하였으며, 7월 신돈 축출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에 봉해졌지만, 모친상을 당해 9월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기복(起復)되었으나 곧 병을 칭탁하고 사직을 청하여 1373년(공민 22) 11월 면직되면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 현재 경상북도 영덕)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殊(수) : 다를 수 1.다르다 2.뛰어나다 3.거의 죽다, 𡥛(동자)
*藥餌(약이) : 약이 되는 음식(飮食).
*餌(이) : 미끼 이 1.미끼 2.먹이 3.경단(瓊團: 가루를 반죽하여 엿물을 바른 밤톨만 한 떡), 饵(간체자), 𩛣(속자), 㢽(동자), 𧊗(동자), 𩛮(동자)
첫댓글 주어진 도리를 못하고 그것을 망각하는 행위.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지요.
작금의 사태가 그러한 듯 해서 씁쓸하네요.
내려놓으면 편안할텐데......
회장님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리고,
이번 주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