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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었구나, 그거였구나- 34
권영심
무엇으로 왕이 되었는가?
조선 역사에 가장 조롱받고 멸시까지 받으며 왕의 생애를 보낸 임금이 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강화도령 철종입니다.
제 24대 임금 헌종이 1849년 흉서하자 새로 임금이 될만한 왕자들을 찾기에 골몰한 것은, 순원 왕후를 비롯한 김문의 세력들 이었습니다.
왕자,군이라는 호칭을 가진 왕족들을 거의 없애버린 김문은 미친듯이,이씨 성의 왕자를 찾아 헤메었습니다. 이름만 왕으로, 모양새만 왕으로 허수아비처럼 세워 놓을 왕이 필요하던 그들은 고심 끝에 저 강화도에 유배중인 까마득한 왕족 찌끄레기 이원범을 찾아 냅니다.
이원범은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왕이 될수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1832년 7월 25일 한성부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곧바로 교동도와 강화도에서 어릴 때부터 유배 생활을 하던 원범은 자신이 왕족의 씨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오막살이에서 나무를 하며 밭을 갈고 행상까지 하며 그저 사람좋게 잘 웃고, 배부르면 자고, 놀림을 당해도 그저 헤헤거리는 청년 원범은 그렇게 살아가도 좋을 인생이었지요.
오죽하면 자신을 모시러 온 행렬을 보고 도망쳐서 사흘이나 숨어 있다가 겨우 나타났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설령 왕족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원범은 왕은, 언감생심 꿈도 못꿀 처지였습니다.
장조의 서자인 은원군의 서손자라는, 서출의 피가 몇 겹이나 겹친 그의 신분은 왕과는 까마득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처지는 세도정치에 맛들인 김문에게는 참 먹기좋은 떡이었습니다.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지고 종숙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억지로 왕위에 오른 철종은 말 그대로 일자무식 법도 깜깜의 허수아비였습니다. 그러니 궁궐 생활에 야지가 오른 궁인들이며 관리들에게 얼마나 놀려 먹기좋은 공깃돌 이었겠습니까?
관리들과 못돼먹은 반가의 선비들은 아예 대놓고 강화도령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 했습니다. 아무도 철종에게 정사며 공부를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저 김문의 인간들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고 처결할 수 밖에요.
그 외에는 여자를 안고 놀고 호의호식을 하면 되었으니 어쩌면 철종은 그런 자신의 생을 별로 비관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런 철종에게 김문은 철저하게 냉혹했고 자신들의 가문의 사람들만 영달을 누리면 되었지요.
그 와중에서 백성들은 안주할 곳도, 갈 곳도 모르고 피폐해졌고 조선의 마지막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왕이 될수 없는 사람이 왕이 되었을 때의 가혹한 피해는 오로지 백성의 몫이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웁니다.
조선 왕조 27명의 왕 중에 누가 왕다운 왕이었을까요?
불행하게도 몇 사람 되지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왕이 되는 방법도 가지가지 였습니다.
건국조인 태조는 위화도 회군이 왕국을 세울 기초가 되었고, 그의 아들 태종은 형제들을 도륙낸 것이 왕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세조는 조카를 쫒아내고 죽여 왕이 되었고, 중종은 연산군을 쫒아낸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임해군,영창대군등을 죽이고 왕이 된 광해군, 그 광해군을 폐위 하고 왕이 된 인조. 형인 경종을 죽였다는 오명을 절대 벗지 못하는 영조도 있습니다.
조선조의 끝 머리의 임금 고종은 아버지의 비대발괄 파락호 생활로 겨우 왕위에 올랐으니, 참, 왕이 되는 방법이 이토록 비천할 수가 없습니다. 왕의 길은 원래 그런 비천과 골육들의 뼈과 골수를 밟고서야 되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왕이 되려는 자는 적통을 타고 그 대의 명분이 명명백백 해야 될 것인데 오늘날에도, 그 방법들이 오물이 튀고 피투성이가 되기는 여반장입니다.
조선조에 왕이 될수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여 명이 보존됨은 물론, 자손들의 후대까지 영화롭게 만든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정종과 양녕대군이지요.
정종은 동생의 명에 따라 순순히 허수아비 왕이 되어 주었고 그 동생이 다시 왕위를 요구했을 때 바로 왕관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상왕으로 동생의 고임을 받으며 평생을 아주 평화롭게 살고 그의 많은 자녀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왕위를 욕심내었다면 우리는 조선 초기의 잔인한 피비린내를 또 한 번 맡게 되었을 겁니다. 자신의 역량과 동생의 그릇을 알고 물러 선 정종은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양녕대군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스스로 죄를 지어 폐세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이설이 있으나 그가 자신의 자유 분방함이 왕이 되기에 적합치 않고, 아버지의 피의 정치를 마무리할 힘이 없음을 깨달은 현명함의 결과라고 볼수 있습니다.
크게는 백성을 생각하고 작게는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했다고 할까요? 문치를 열어줄 동생의 그릇을 양녕은 알아 보았고 과연 그의 양보로 우리는 세종대왕이라는 불세출의 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니 내가 무엇이 부러운가?"
양녕대군의 호방한 말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 발자취에서 현재의 진실을 알고자 함입니다. 오늘날 왕이 되려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으로 왕이 되려고 합니까? 피투성이의 왕이 되어 그 피를 씻고자 세월을 다 까먹는 어리석은 왕이 되지는 마십시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