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율 구하기
박우담
애인은 몽상가다. 비눗방울처럼 늘 새로운 동그라미를 찾아 나선다.
그녀는 매일 아침 원주율을 구한다. 누구를 만날까 숫자가 찍힌 야구 모자를 자주 쓴다. 그녀는 보라색을 좋아하고, 무인텔 탐사를 즐긴다. 귀가 후 알리바이를 위해 원주율은 꼭 기억한다. 숫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거리의 질서. 강아지풀처럼 꼬리를 빙빙 돌리며 가끔 짖는다.
애인은 숫자를 누르고 장막 속으로 미끄러졌다. 셔터 닫히는 소리 들리고 비릿한 물비누 내음이 배어 있는 동굴, 물길을 거슬러 올랐다. 기척에 놀란 박쥐가 달아났고, 석주가 솟은 바닥엔 그녀의 비밀이 찰박거린다.
동그라미 두 개가 겹쳤다가 흐트러졌다. 실루엣은 천형이다.
애인은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강아지풀을 잡고 하늘로 솟구쳤다. 날벌레가 조명 아래서 반딧불이 되는 곳. 셔터 올리고 내리는 소리가 수만 년 전 매장된 보랏빛 울음 같다. 별빛마저 장막 속으로 숨어들었다.
근육질의 꼬리를 빙빙 돌렸다. 첨탑에 걸린 그녀는 신나게 줄넘기했다. 꼬리 흔드는 강아지풀 이리저리 꿈길을 핥는다. 동그라미가 또 다른 동그라미를 지워버렸다. 애인은 서서히 정신이 혼미해졌다. 천형의 벌이다.
박쥐 날갯짓에 그녀는 암막에서 벗어났다. 스케치북에 코를 박은 채
몽상은
아직, 반경의 끝을 보여줄 기미가 없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9월호 발표
박우담 시인
2004년《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 『구름트렁크』, 『시간의 노숙자』, 『설탕의 아이들』, 『계절의 문양』, 『초원의 별』 등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