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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jeangenie
며칠 전에 1탄 형태로 "전쟁 중의 예술가들"이란 글을 올렸었는데
생각해보니 중요한 사람 몇몇을 빼먹었네^^; 어쨌든 이번 포스팅은 2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차 세계대전 당시 만들어졌거나 인기를 얻은 곡과 그 이후에 주목받은 곡들 얘기야.
1. "머나먼 곳, 티퍼래리It's a Long Way to Tipperary"
본래 1912년경에 보드빌 공연용으로 작곡된 이 곡은 아일랜드 티퍼래리 출신의 주인공이
런던에 와서 처음에는 번화한 대도시에 설레어하다가 곧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이야.
"잘 있거라, 피커딜리여"라고 작별인사를 던지며 주인공은 "티퍼래리는 여기서 멀지만
내 마음은 이미 거기 가 있네"라고 마음을 달랜다. 그런데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인 1914년
프랑스에 파견돼 있던 <데일리메일> 특파원은 볼로뉴를 행군하던 아일랜드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것을 목격하게 돼.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사로 쓴다.
그 뒤로 이 노래는 아일랜드 병사들뿐 아니라 전세계 참전병들에게 인기를 끌게 돼.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빚어진 갈등이
설마 세계대전으로까지 비화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대. 특히 영국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었던 건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고조돼 있던 반목 상황이었어. 그렇게 애매한 관계에 있던 양국이었는데
아일랜드 병사들의 노래가 1차 세계대전 대표 군가로 자리매김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지^^
↑ (위로부터) 1914년 워털루 역의 가족들. 아들과 남편을 전장에 보내기 직전이라 표정들이 다들 어두워.
1915년 역시 워털루 역. 두 사람은 형제인데 한 사람은 육군이고 한 사람은 해군이라 헤어지는 거래.
1915년, 최전방으로 최초 파견된 기병연대 병사들. 해맑게 웃고 있는(혹은 착잡한 표정을 한) 8, 90년대생 청년들이야.
마지막은 1914년에 찍은 근위보병 제4연대Irish Guards 기관총분대 병사들 사진. 이들 중 누구도 전장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했어.
↑ 위의 사진들을 찍은 사람은 영국 최초의 여성 사진기자였던 크리스티나 브룸Christina Broom(1862~1939).
당시 그녀는 이미 50줄에 들어선 부인이었어. 병사들이 다들 되게 다소곳하게 촬영에 임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았을까?^^
오른쪽 사진은 브룸이 촬영한 근위보병 제4연대 장교들 사진. 그 중 좌측에서 세 번째 안경 쓴 사람은
소설가 루디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의 외아들이었던 존 키플링(일명 "잭")John "Jack" Kipling(1897~1915)으로
추정되고 있어. 잭은 시력이 나빠서 영국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에서도 입대를 거절당했는데,
열렬한 제국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였던 루디야드 키플링은 당시 육군 사령관이자 해군 대령이었던 친구한테 청탁을 해서
아들을 근위보병 제4연대 2대대 소위로 입대시켰어. 잭은 97년생이니까 당시 열일곱 살에 불과했지.
하지만 이듬해 잭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부모에게는 실종 소식이 전해져. 결국 잭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고
키플링은 비통함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렇게 쓴다. "우리가 왜 죽었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시오
아버지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My Boy Jack>이라는 통렬한 시를 남기는데
잭 키플링과 이 시를 바탕으로 한 TV 드라마가 만들어져서 몇 년 전에 방영됐던 것 같애.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잭 키플링 역을 맡았던 듯^^
↑ 2007년에 방영된 ITV 제작 드라마 <My Boy Jack>의 한 장면.
2. "잘있거라 브로드웨이여, 반갑구나 프랑스여Goodbye Broadway, Hello France"
이 곡은 1917년에 미국에서 작곡된 노래. 그 해에 미국 육군 부대가 처음으로 유럽에 파견됐어.
프랑스는 18세기 미국 독립전쟁 때 미국 편을 들어줬었지. 게다가 그로부터 100년 뒤에는
두 나라 간의 우호를 기념하는 뜻으로 프랑스에서 모금을 통해 자유의 여신상까지 제작해 선물했어.
노래 가사는 이래. "잘 있거라 뉴욕,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이여/ 그대가 든 자유의 횃불이 바다를 비춰 우리를 안내하리니/
(중략) / 반갑구나, 프랑스여/ 우리는 1천만의 장정들/ 어머니와 아내, 연인들이여, 안녕/ 우리는 금방 돌아갈 것이오/
먼 곳에서 싸우는 우리를 걱정 마시오/ 우리는 그대들을 위해 싸우는 것/
그러니 잘 있거라 브로드웨이여, 반갑구나 프랑스여/ 우리는 그대에게 진 빚을 값으리라"
↑ 프랑스에 상륙한 미원정군을 그린 잡지 일러스트
↑ (위로부터) 1917년 6월 25일 프랑스에 상륙한 미원정군
같은 해, 전방으로 이동하기 직전 웰링턴 병영에 소집된 미군들
3. "저스트 어 지골로Just a Gigolo"와 "릴리마를렌Lili Marleen"
"Just a Gigolo"의 원곡은 "Schoner Gigolo, armer Gigolo"라는 오스트리아 노래.
1928년, 이탈리아 작곡가 레오넬로 카주치Leonello Casucci가 곡을 쓰고
유대계 작사가 율리우스 브라머Julius Brammer(1877~1943)가 가사를 써서 만들었고 곧 대히트를 쳤어.
브라머의 가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의 붕괴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어. 노래의 화자는
전쟁 당시만 해도 멋드러진 군복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던 오스트리아 기병. 하지만 이제는 'gigolo' 즉,
제비족, 직업 댄서, 혹은 남창이 되어 초라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 가사는 이래.
"그 앳된 중위, 그는 최고의 기병이었지/ 그리고 모든 이의 마음이 당장 그의 것이 되었네/ 그의 키스와 춤은
누구의 추종도 불허했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식이었네/
수 개월을 그는 프랑스에 가서 싸웠네/ 그리고 바이크셀, 피아베 강, 또 다른 어디에서/
이제 그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았네/ 그는 지골로가 되었다네
아름다운 지골로, 가련한 지골로/ 이제 지난날은 돌이키지 마라/ 기병이었던 네가/
금빛 술까지 달고/ 거리를 행진하던 시절/ 이제 군복은 없고 연인은 작별인사를 던지네/
아름다운 세상이여, 너는 산산조각이 났구나/ 가슴이 찢어질지언정 얼굴에 웃음은 잃지 말라/
돈을 받으면 너는 춤을 추어야 하니"
위 영상은 막스 라베와 팔라스트 오케스트라Max Raabe und Palast Orchester라는 공연단의 연주 버전이야.
꼭 20년대 연주단 같은 느낌이지만 놀랍게도 바로 요즘, 21세기 사람들임!(막스 라베는 62년생)
독일에는 이렇게 20년대풍으로 연주하고 공연하는 밴드들이 꽤 있는 것 같애. 놀라우면서도 조금 섬찟하면서도...
뭔가 새롭고 이상한 기분이야;
아무튼, 이 곡은 큰 히트를 쳐서 미국의 인기 작사가였던 어빙 시저Irving Caesar(1895 ~1996)가
영어 버전으로 개사해서 발표하게 된다. 시저는 노래에서 오스트리아를 연상시키는 부분은 전부 삭제하되
노래 특유의 우수와 복잡한 감정은 그대로 살리는 방법을 꾀했어.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Just a Gigolo".
이 노래는 빙 크로스비, 루이 암스트롱 등 여러 가수들이 불러 인기를 끌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버전은
아마도 루이스 프리마Louis Prima의 "Just a Gigolo/ I'm Nobody"(1956) 메들리일 거야^^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데이빗 보위David Bowie가 주연을 맡았던 1979년작 영화 <Just a Gigolo>지.
보위는 영화에 관심도 지대했고 연기력도 알아줄 만한 수준인데 누구처럼 시나리오 보는 안목이 꽝이었어^^;
<Just a Gigolo> 말고도 망한 영화가 많은데, 아무튼. 데이빗 헤밍스David Hemmings 감독의 이 영화는
"Just a Gigolo"의 원곡 "Schoner Gigolo..."에 담긴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살려냈다 해도 좋을 영화야.
1차 세계대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프로이센의 장교 파울(보위 扮)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안고
고향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고향 분위기는 왠지 심상치 않고,
굶주린 사람들은 그의 돼지에서 눈을 떼지 못해. 파울 역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에는 남작부인(마를렌느 디트리히 扮)이 운영하는 윤락업소에서 'gigolo'로 일을 시작해.
이 영화는 오랫동안 은둔해 지내고 있던 마를렌느 디트리히의 마지막 출연작이기도 해.
영화 속에서 디트리히는 "Just a Gigolo"를 직접 부르는데, 유튜브 영상들이 다 임베디드가 금지돼 있네!
2차 세계대전 때 유명해진 "릴리마를렌Lili Marleen" 역시 1차 세계대전에서 유래된 노래야.
함부르크 출신의 학교 교사였던 한스 라이프Hans Leip(1893~1983)는 독일제국 군대에 징집돼 전장에
뛰어들게 됐고, 1915년에 고향에 있는 여자친구들 이름('릴리'와 '마를렌')을 조합해 넣은 시
"젊은 당직병사의 노래Das Lied eines jungen Soldaten auf der Wacht"를 쓴다. 이 시에 1938년 곡이 붙여졌고
이듬해 랄레 안데르센Lale Andersen(1905~1972)이 이 곡으로 음반을 취입해.
이 음반은 판매량이 다해서 700장이 될까 말까 한 수준이었고, 곡도 그냥 그대로 묻히는가 싶었어.
그러던 1941년, 나치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유럽 전역에서 전파가 잡히는 그곳 라디오 방송 채널을
독일군 방송 채널로 이용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딱히 틀 노래가 없던 와중에, 잠시 빈에 가 있던 중위가
그곳 라디오 방송국에서 중고 음반들을 한아름 들고 왔는데, 그 중에 안데르센의 이 음반이 끼어있었던 거야.
방송국에서는 이 노래를 자주 틀었고, 중간에 나치 선전부 장관 괴벨스가 이 노래를 틀지 말라고 했을 때는
유럽 각지에서 병사들의 항의 편지가 쇄도했을 정도였어. 그래서 괴벨스도 마음을 바꿨고, 방송국에서는 아예
이 곡을 방송 종료 신호곡으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괴벨스가 이런 식으로 결정을 번복한 얘기는
뒤에 다른 노래에서도 다시 등장해)
4. 베르톨트 브레히트, 에른스트 부쉬, 장 콕토, 레조 세레스
아래 영상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1956)가 직접 부르는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 수록곡
"인간적인 노력의 미약함에 관한 노래Das Lied von der Unzulanglichkeit des menschlichen Strebens".
20세기 초에 녹음된 노래들을 찾아 들으면서 새삼 놀랐던 건, 여자들 목소리만 새 지저귀는 소리 같은
소프라노였던 게 아니라 웬만한 남자들(혹은, 남자 가수/배우들?) 목소리도 다 테너라는 사실 때문이었어.
브레히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들어보면,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될 거야^^
이 곡은 1930년경에 녹음된 버전.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Kurt Weill(1900~1950)이 공동으로 제작한 <서푼짜리 오페라>는
1928년에 베를린에서 초연됐어. 그리고 1933년, 두 사람은 나치에 의해 강제 추방당하고
<서푼짜리 오페라> 초연에서 '제니' 역을 맡았던 오스트리아 여가수 로테 레냐Lotte Lenya(1898~1981) 역시
고국을 떠나 파리로 피신하게 돼.
↑ (왼쪽 위로부터) 1930년 브레히트와 바일, 1937년경 바일과 그의 아내가 된 로테 레냐
(오른쪽) 1928년 <서푼짜리 오페라> 포스터
에른스트 부쉬Ernst Busch(1900~1980)는 독일의 가수이자 배우. 부쉬 역시 <서푼짜리 오페라> 초연 무대에 섰었어.
내가 에른스트 부쉬를 알게 된 건 미국 포크가수 피트 시거Pete Seeger(1919~)가 1960년에 재발매해서
대중에 널리 알린, 부쉬와 탤만Thalmann 부대 대원들의 녹음곡들을 묶은 <Six Songs for Democracy> 덕분이었어.
이 곡들은 스페인내전 중이던 1938년, 국제여단에 자원한 부쉬와 나치 독일 망명자들로 구성된 탤만 부대 대원들이
폭격 속의 바르셀로나 지하에서 녹음한 것들. 병사들을 관객으로 두고 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그 앞에서 공연하는 게 아니라
지하에서, 대체 자신들의 노래를 언제 누가 들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미지의 청자들을 위해
노래를 한다는 게, 그것도 군가를 합창으로 부른다는 게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폭격 속에서,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생사와는 무관하게 살아남을 목소리를
자신들의 유물이나 유령처럼 남기고 있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어.
아래 영상은 에른스트 부쉬가 내가 좋아하는 "Die Thalmann Kolonne"를 부르는(0:48초부터) 영상인데
언제 어디서 촬영된 영상인지는 모르겠어. 부쉬는 결국 동독에 안착했는데, 어쩌면 동독 방송분일지도;
↑ 라디오 방송 중인 에른스트 부쉬
다음 영상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장 콕토Jean Cocteau(1889~1963)가
댄 패리시Dan Parish의 재즈 앙상블과 함께 녹음한 곡들 중 하나인 "황금 양털La Toison d'Or"(1929)이야.
시 전문이 실린, 우리 말로 번역된 콕토 시집이 있는데 아쉽게도 지금 안 갖고 있어ㅠ
콕토는 재즈 연주를 배경으로 자신의 시 <황금 양털>을 낭송하는데, 콕토 목소리 역시 테너임^^
황금 양털은 그리스 신화 속 모티프. 이아손과 아르고 호의 원정대가 갖은 역경을 겪고 황금 양털을 구해온다는 이야기야.
어쨌든, 콕토는 1929년 황금 양털이라는 귀한 제물에 대해(그리고 역경과 희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 그리스 항아리에 새겨진 그림. 황금 양털을 가져온 이아손.
헝가리 작곡가 레조 세레스Rezső Seress(1899~1968)가 1933년에 쓴 곡 "Szomoru Vasarnap" 즉,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는 아주 유명하지. 특히 1999년작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공이 컸어.
세레스가 곡을 쓰던 당시는 대공황기인 동시에 헝가리 내에 파시즘 세력이 힘을 키워가기 시작한 시기였어.
원곡의 가사는 이래. "우울한 일요일/ 백송이 흰 꽃들/ 교회에서, 내 사랑하는 이여,/ 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네, 기도하면서/
그 일요일 아침/ 내 꿈은 휘달렸지만/ 내 슬픔의 전차는/ 그대 없이 빈 채로 돌아왔네/
그날 이후로 영원히/ 내 일요일은 구슬프리/ 눈물이 내 마실 것이요, 슬픔이/ 내 먹을 빵이리/
내 마지막 일요일에, 사랑하는 이여,/ 내게 돌아오라!/ 그날 사제가 기다리고/ 관과 제단과 수의도 있을 테니/
그리고 꽃들이 그대를 기다리리라/ 꽃들- 그리고 관 하나가
꽃이 만발한 나무들 아래, 나는/ 내 마지막 행진을 하리/ 그리고 내 눈은 번쩍 뜨여/ 마지막으로 그대를 바라보리라/
부디 그 눈을 두려워말길/ 죽어잇어도 나 그대를 축복하리니/ 마지막 일요일"
↑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장면들
5. "늑대" 노래들 - <아기 돼지 삼형제>, <피터와 늑대>, 찰리와 오케스트라의 나치 프로파간다
1933년, 미국의 월트디즈니사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전래동화 <아기 돼지 삼형제Three Little Pigs>를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 피리 부는 돼지는 짚으로 집을 짓고, 바이올린 켜는 돼지는 나뭇가지를 쌓아 집을 짓는데
피아노를 치는 돼지 형제는 늑대가 와도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벽돌 집을 짓지. 당시는 대공황 시기.
혼자서 심각한 얼굴로 벽돌과 타르로 집을 짓는 돼지의 모습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가 읽혀져.
이 애니메이션에서 유명해진 노래가 바로 "누가 크고 사나운 늑대를 무서워하나Who's Afraid of Big Bad Wolf?"야.
그리고 1936년, 소련에서는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v(1891~1953)가 <피터와 늑대Петя и волк>를 작곡해.
1차 세계대전 와중이었던 1917년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고, 고국에서는 자신의 실험적 음악을 계속할 여지가 없으리라 판단한
프로코피에프는 이듬해 고국을 떠나 미국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향수가 심해지면서
1936년에 결국 소련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리게 돼. 하지만 그 무렵 소련에는
소비에트 작곡가조합이라는 단체가 설립돼서 음악가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고, 프로코피에프 역시
당국에서 승인한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이고 모스크바 중앙아동극장에서 의뢰받은 어린이용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피터와 늑대>가 바로 중앙아동극장의 의뢰로 만든 곡이야.
프로코피에프는 <피터와 늑대>를 단 4일 만에 완성했다고 해. 곡은 같은 해 초연됐지만 많은 관심을 끌진 못했어.
하지만 그 뒤에 이 곡은 오히려 외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지금까지 정말 수많은 버전으로 만들어졌지.
유명 배우, 가수, 코미디언이 내레이션을 맡고 뉴욕필하모니,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등등이 연주를 해서
녹음하기도 하고, 각색돼서 애니메이션, 연극 등등으로도 수없이 만들어졌어.
보위 팬인 나는, 1978년 보위가 내레이션을 맡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버전을 첨부해볼게^^
이건 도입부인데, <피터와 늑대> 중에 유명한 대사 하나 "(어린이 여러분) 편하게 앉으셨나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까지 진지하게 읊는 보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피터, 그러니까 '표트르'는 숲속에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데, 어느날 숲에서 내려와
오리를 삼켜버리고 마는 늑대를 표트르가 지혜를 발휘해 동물 친구들과 사냥꾼과 힘을 합쳐 생포한다는 이야기야.
↑ (위로부터) 1918년경의 프로코피에프
보위의 <피터와 늑대>를 발매한 RCA의 홍보자료
그리고 다시 <아기 돼지 삼형제>로, 아니, "크고 사나운 늑대Big Bad Wolf"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1930년대에는 독일에서도 재즈가, 특히 스윙이 유행이었어. 미국의 루이 암스트롱이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차라
암스트롱처럼 굵고 낮은 음성으로 노래하는 가수들이 인기를 끌었지!(어쩌면 이 무렵부터 가수들의 목소리가
테너에서 저음으로 옮겨갔는지도 모르겠어.) 카를 슈베들러Karl Schwedler(1909~1973?)라는 가수 역시
"찰리"라는 미국식 예명을 짓고 암스트롱을 흉내내면서 동료 뮤지션들과 재즈 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미국 흑인 음악을 불순한 영향으로 본 나치 당국이 1935년에 재즈 음악을 불법으로 금지하면서 찰리와 그의 밴드도
이런저런 속임수를 써가며 지하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연합국에서 재즈와 스윙이 대인기라는 것을 깨달은 괴벨스는 재즈 밴드를 금하는 대신 나치 선전에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일명 '찰리와 오케스트라Charlie and his Orchestra'는 나치의 공식적인 국무성 악단이 돼서
1941~43년 사이에 무수한 프로파간다 곡들을 녹음하게 돼. 대개는 기존 곡들,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곡들에
나치 당국이 승인한 가사를 붙여 만든 곡이었어. "누가 크고 사나운 늑대를 두려워하나?" 역시 그 중 하나였지.
찰리와 오케스트라는 "Big Bad Wolf" 대신 "BBC"를 넣어 "누가 BBC를 두려워하나?"라고 노래 부른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그리고 한편으론 이상한 점은) 소위 전시 프로파간다라고 하는 이 가사들이
공격적이거나 엄청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대신 애들 장난처럼 유치하고 우습게 느껴진다는 거야.(곡들 중에는
처칠 영국 수상이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조롱하는 곡들도 많은데, 처칠은 자기 얘기가 나오는 노래를
취미 삼아 들으면서 재밌어 했대.) 그게 괴벨스 전략의 실패인지, 아니면 괴벨스가 일부러 의도한 건지는 미지수야;
밴드 멤버들 대부분이 슈투트가르트로 피난한 뒤에도 한동안 베를린에 남아있던 슈베들러는
독일이 패전한 뒤 도박장 딜러로 일하면서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1960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행을 택해.
그 뒤로 그의 행방은 묘연해졌지만, 1988년에 <슈피겔>지에서는 슈베들러가 독일 바이에른 지방으로 돌아와서
1973년에 거기서 세상을 떠난 듯하다고 보도한다.
↑ (왼쪽부터) 찰리(맨 오른쪽 인물)와 오케스트라,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여가수
나치는 미국에서 건너온 흑인음악을 "퇴폐음악Entartete Musik"으로 규정했다.
<아기 돼지 삼형제>와 "누가 크고 사나운..."이란 노래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나왔지만
지금 보면 마치 2차 세계대전을 반영한, 혹은 예고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돼지 삼형제는 3개 강국처럼 느껴지고
늑대는 나치처럼 보이고 말이야.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MGM 영화사에서는 <아기 돼지 삼형제>를
정말로 히틀러에 빗대 패러디한 <블리츠 울프Blitz Wolf>라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인다.
이 작품은 연합국 쪽의 프로파간다라 할 정도로 패러디가 노골적이고, 다름 아닌 "전쟁 채권defense bonds"이
늑대를 물리치는 무기로 등장하기도 한다.
6.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1900~1949)은 1936년 미국 남북전쟁기와 이후의 재건기 동안의 애틀랜타를 배경으로 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발표하고, 이 작품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해.
다시 데이빗 O. 셀즈닉 감독은 비비언 리, 클라크 게이블 주연으로 이 소설을 영화화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인 1939년 말에 선보인다. 그 해 12월 애틀랜타에서 열린 시사회는 주연 배우들이 참석하고
백만 명의 사람들이 참관한 대단한 행사였다고 하지. 하지만 극중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짝사랑하는
애슐리 윌크스 역을 맡았던 영국 배우 레슬리 하워드Leslie Howard(1893~1943)는 참석하지 않았어.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40년대 초반 몇 편의 전쟁영화에 출연해 고국의 전쟁노력에 도움을 보탰는데
1943년 의문의 비행기 격추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가 탄 항공기를 독일군이 해상에서 격추한 사건이었는데
그 비행기에 처칠 수상이 타고있을 거라고 독일군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등, 추정되고 있는 이유는 다양해.
아무튼,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기세를 몰아가고 있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편견과 반목, (모든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가차없는 파괴, 그리고 재건에 관한 영화가,
고향과 땅("타라Tara")에 관한 음악("Tara's Theme")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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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여기까지 써야되겠다^^;
첫댓글 우와 신기해!!! 1탄글도 너무 잘읽엇엉! 고마워!!!
흐.. 전쟁이 파괴이자 새로운 창조에 영감이 되기도 하는구나
프로파간다에 관심이 많아서 유심히 봤어
여시 완전 박식하다 고마워!
삭제된 댓글 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12.06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