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도 좋은 생각이 있고 나쁜 생각이 있다. 좋은 생각은 선한 생각이고 나쁜 생각은 악한 생각이다. 누구나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중에 언제 어떤 마음이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한 마음을 가져 괴로움 없이 살려면 반드시 선한 스승을 만나 선한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일상을 살면서 살아가는 동력과 또 윤회하는 동력은 두 가지인데 무명과 갈애다. 무명은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이고 갈애는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특별하게 선한 스승과 선한 법을 만나지 않으면 어리석음이 지배하여 감각적 욕망을 집착해서 괴롭게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지혜와 관용보다 어리석음과 감각적 욕망이 강해서 태어났다. 지혜가 강하면 해탈의 자유를 얻어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아직 어리석음과 욕망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지배하는 잠재의식은 어리석음과 감각적 욕망이 우선한다. 그래서 내가 습관적으로 살 때는 선한 업보다도 악한 업을 짓는다. 내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을 시작하는 것이 모두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향해서 접촉할 때 무조건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려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서 대상이 좋으면 한없이 좋아하고 좋지 않으면 즉각 싫어하고 미워한다. 이러한 감각적 욕망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처럼 좋아하고 싫어하는 재미로 사는데 사실 이것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러한 반응이 바로 감각적 욕망이고 괴로움을 일으키는 연기의 회전이자 끝없는 윤회를 하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은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청정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세상을 살 때 습관적으로 살면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살아 괴로움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온 습관대로 살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어리석음과 욕망이 붙지 않아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 괴로움이 없는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명과 욕망이 아닌 지혜와 관용으로 사는 것이 해탈의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선업의 공덕을 쌓아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사람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
그 끝에 괴로움이 소멸하는 해탈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선업의 공덕이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괴로울 일만 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행복과 불행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의 선택과 실천을 한 결과로 얻는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행복을 약속하는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나 먼저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선입관을 갖지 않고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면 된다. 그러면 마음이 고요해져 존재의 성품을 아는 지혜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