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한 번만 더 쉬세요.”
중요한 순간에 잠시 손은 멈추고 머리로 생각 좀 하라는 주문이다. 바둑을 가르친다고 강단에 섰으니, 나만의 메뉴를 개발해야 한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이란 바둑을 잘 두는 비결이랍시고 있으니, 그걸 풀면 되겠다 싶었다. 열 가지 비결을 이리저리 궁리해보다가 ‘신물경속(愼勿輕速)’이 총론 격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중하게 생각하라, 경솔하게 빨리 두지 마라.
수강생은 장애인과 노약자들이다. 간단하게 줄이되 쉬운 말이어야 하고 재미도 있어야 한다. “숨 한 번만 더 쉬세요. 어려운 거 아니죠?” 어느 장애인복지관에서 한 삼 년쯤 써먹은 말이다.
1966년, 스무 살 때다. 서울 종로의 하숙집 이층 방, 법전 대신 바둑판과 씨름하던 시절이 있었다. 얼핏 눈을 들라치면 창밖에선 불타는 저녁노을! 또 하루가 갔구나, 한숨을 삼킨다. 지금도 풋내기 인생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일 년 만에 아마추어 강자가 되어 우쭐해지는데, 그 연장선에서 젊은 날의 대국 장면들이 어른거린다. 아찔한 그리움이 그림처럼 선명하기도 하다. 이화동, 남영동, 성북동, 안암동 그리고 휴전선의 지하벙커….
왜 그랬을까. 공부가 싫다, 안 된다. 이유라면 그게 전부다. 이제 와서 뭘 따진다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인간과 사회는 불가해 부조리의 영역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빛나는 이성과 원초적 감성은 상호작용을 한다, 두루뭉술하게 표현할까나.
어쨌든 이즈음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말이 생겼다.
‘바둑 때문에 신세 망친 놈’. 선고(先考)와 일가친지들이 한결같이 내린 판정이다. 소년등과(少年登科)의 꽃길을 걷어찬 대가로.
수필을 쓴답시고 지역 문단에 기웃거린 지도 꽤 오래 되었다. 남 앞에 내놓으려면 제목이 50%, 첫머리의 서너 줄이 나머지의 50% 비중이란 말이 그럴싸해서, 나름대로 실천해 왔다.
상해(上海) 대국, 장춘(長春) 대국, 뉴저지(New Jersey) 대국…. 내가 쓴 수필의 제목들이다. 해외여행을 아무나 쉽게 가나. 그 귀한 기회와 인연이 바둑이란 색감으로 칠해져 있는 셈이다. 삶의 굽이굽이에 보석처럼 박힌 흔적이라고 할까. 바둑을 빼면 좀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2003년인가, ‘청도(靑島) 대국’을 쓸 뻔하였다. 대구와 중국 청도의 바둑교류전 참가를 제안 받고 무척이나 들떴다. 그런데 아서라 말아라, 공무원 말년의 마지막 승진기회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좀스럽게 후퇴하고 말았다. 훗날 두고두고 후회하는 사건이 되었고. 현대 바둑의 본고장은 일본이다. 내년에는 도쿄나 오사카 어딘가를 무대로 'ㅇㅇ 대국' 시리즈의 완결판을 써야겠다.
60년간의 바둑 커리어, 그동안 바둑 세상도 많이 변했다.
대한민국이 바둑의 변방에서 세계 바둑의 한 축이 되었다. 국가와 민족의 역량이 열강 수준으로 약진한 것처럼. 개인적 실전의 재미에다가 한중일 바둑 삼국지를 즐기는 흥취가 더해진다.
조훈현, 이창호 같은 젊은 천재들이 바둑의 품위를 떨어뜨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바둑은 지구상의 모든 보드게임 중에서 경우의 수가 가장 많은 게임이다. 그래서인지 체스는 이미 오래전에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지만 바둑은 아직까지도 컴퓨터가 따라오지 못한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7~9점 접바둑이 컴퓨터의 한계였는데 지금은 4점 접바둑까지 따라잡았다.…
2015년 6월에 나온 바둑황제 조훈현의 『고수의 생각법』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은 2016년 3월 인류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전 세계에 생중계된 인간과 기계의 대결, 한국의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의 5번 승부에서, 4:1로 인간이 패배한 것이다.
훗날 세계사에서는 이세돌을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보다 더 유명한 한국인으로 기록할 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뒷말은 있기 마련이다. 이세돌이 네 번째 판을 이긴 것도 흥행을 위해서다, 1,202대의 컴퓨터가 연결된 알파고가 일부러 져 준 것이라고.
인간과 인공지능 AI의 대결, 요즘은 이런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AI가 인간을 지도하고 훈련시킨다. AI와 친한 인간이 감정의 노예인 인간을 이기게 되어있다. TV 중계에서 AI의 승률예측 그래프가 없으면 싱겁다 못해 퇴출 감이 아닐까.
한때 젊은 천재 이창호가 바둑을 모욕했다면 바야흐로 바둑이 인간을 배신한 것이다.
이제 인생 말년이다.
나의 춤도 거친 풍파도 다 지나가고 사람들도 떠나가고, 고요함과 적막만 남았다. 모종의 목표나 호기심 그리고 사회적 책무에서도 해방된 것 같다.
2,500년 전 공자님의 말씀이 푸근하게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포식종일(飽食終日) 무소용심(無所用心)이면 난의재(難矣哉)라! 불유박혁자호(不有博奕者乎)아?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일이 없으면 그것도 큰일이니 바둑이라도 두라 했던가.
그러나 오늘날의 백세 시대에 ‘포식종일 무소용심’의 의미는 어떨까. 먹을 게 있고 걱정거리가 없다고 새긴다면, 대단한 팔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팔자가 되려고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와 함께하는 바둑 또한 ‘쓰잘데없는 잡기’라는 오명은 벗겨주어야 하리라.
코로나와 황혼육아로 기원 출입을 못한지 여러 해가 지났다. 내가 사는 수성못 자락의 이층 집. 온라인 대국의 횟수가 2만 판을 넘었다. 바둑에는 극과 극의 세계가 상존한다. 다 이긴 판, 질레야 질 수 없는 판을 엄벙덤벙하다가 질 때의 울화. 완전히 기운 판 전혀 희망이 없는 것 같은데 어찌어찌 이겼을 때의 그 희열. 그럴 때면 가끔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예의 ‘불타는 저녁노을’을 마주친다.
“숨 한 번만 더 쉬세요.”
이제는 컴퓨터 앞에서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