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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7,12ㄹ-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8,8-11
형제 여러분,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1,1-45
그때에
1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1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13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16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8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0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봄도 사순이 부활로 가는 길이듯, 여름, 가을, 겨울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고, 또 다시 생명으로 피어오르는 봄의 길도 역시 생명의 길입니다.
<봄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롤 새겨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바로 ‘봄길’입니다.
생명을 열어주고, 부활을 가져다주는 참된 생명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아나톨 프랑스)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요,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
곧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11,23)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1코린 8,2)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요한 11,27)
마르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었지만, “부활이요 생명”임에 대해서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요한 11,40)
이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요한 11,43)
<오늘의 말·샘 기도>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제야>
오늘 독서 에제키엘서는 두 번이나 ‘그제야’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야’가 그동안 그렇게 애썼는데 이뤄지지 않던 것이 이제 비로소 이뤄졌다는 과거적 표현이라면, ‘그제야’는 한동안 애썼는데 이뤄지지 않은 점에선 ‘이제야’와 마찬가지지만 이뤄지는 시점이 지금이 아니라 미래 어느 시점인 미래적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나의 주인임을 이제라도 알게 되면 좋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알고자 애쓰는데도 지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고 더 많은 과정을 겪은 뒤에야 알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과정입니까?
이에 대해 에제키엘서 스스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이라고.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겁니다.”
그리고 복음은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성령도 죽지 않게 하지 않으시고 죽은 다음에 살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도 바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있다가 그래서 나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자로에게 가시고 다시 살리십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죽지 않을 수는 없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뜻이고, 영원히 살려면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안 죽는 삶을 택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는 삶을 선택하셨으며, 그것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뜻이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되살아나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나자로는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실은 이 세상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영원히 다시 살아나는 모든 인간 존재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사도들은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그리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야 그제야 알게 되는데, 그것은 사도들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 무덤을 열고 우리를 꺼내주시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에서 우리를 있게 하신 주님께서 무덤에서 우리를 나오게 하시는 것쯤은 너무도 쉬운 것임을 믿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나오라는 명령에 순명한 라자로처럼 우리도 무덤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의 눈물을 공감하시는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공명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아픔에 공명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는 가운데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은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그리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신 말씀에 대해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루카복음 19장 41절에 보면,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정신 못 차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히브 5,7)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셨고,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죽음을 보고 슬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벗의 죽음을 슬퍼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큰 슬픔을 아십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에 깊이 연민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죽은 사람의 가슴은 공명을 모릅니다.
마음의 울림이 없습니다.
깊이 공감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요한11장 33절에는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5절에는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그 슬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동정심과 온정의 본보기를 보여주시려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히폴리투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울긴 왜 우냐? 하느님을 믿고 살아서 이제 하느님의 품에서 천상영복을 누릴 텐데. 기쁘게 보내드려라!” 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는 홀로 숨어서 엉엉 우시더라고요….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눈물은 큰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참된 행복의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깊은 참회의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자비를 간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복이 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는 곳에 은총이 주어집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습니다.
‘닭이 울기 전 3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새로워졌습니다.
우리 삶에서 인색해진 눈물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병입니다.
영혼이 마를 대로 말라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이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주님 앞에서 대성통곡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시는 예수님, 성체 앞에서 실컷 울어야 합니다.
나의 삶을 드러내 놓고 눈물로 애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줄 것입니다.’
오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에 가셔서 “돌을 치워라.”하시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셨습니다.
“살아나거라.”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나와라.”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너라'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자, 무기력한 자”(송봉모)입니다.
‘모든 힘없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믿는 이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썩은 냄새가 풍기는 무력함에서 자비와 안식을 주시며 위로와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 덕분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라자로를 도와주신 그분이 오늘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진짜 죽는 것은 내가 스스로 무덤에 갇히는 것입니다.
나를 꽁꽁 묶어놓고 있는 무덤,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은, 오랜 악습, 선입견, 편견, 고집,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시기, 질투, 집착, 소유, 지배, 명예욕, 교만함 등등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무덤에서 나와라’하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내 안에 지닌 이런 다양한 병을 인정하고, 그것을 원인까지 치유하시는 명의이신 주님께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하면 골치 아픈 모든 것이 풀리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무엇보다 고해성사를 통해 내적인 무덤에서 나와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으로 바꾼다면, 미움을 사랑으로 감싼다면, 바로 그것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을 치웠습니다.
마르타가 냄새난다고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명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나자로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였는데 그것을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풀어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내 스스로를 옭아매지도 말 것이며, 남을 내 잣대로 재어 판단하고 단죄하여 무덤에 가두어 두지도 말아야 합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어둠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삶의 활력은 어디 위에 내리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를 얻는데, 이것이 삶의 활력이 됩니다.
반면 성령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죽음이 그들을 지배합니다.
이를 무기력증이라고 합니다.
무기력증은 번아웃과는 다르게, 삶의 에너지는 있지만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잃었을 때 옵니다.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을 받고 부와 명예와 가족을 일구며 살았던, 우리가 어쩌면 가장 부러워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와 같다”라고 하며 엽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
왜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고도 삶의 의욕을 잃었을까요?
마를린 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에 평생 쓸 돈을 다 벌었고 많은 남성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삶의 활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싶었고 결국 약물 과다 복용으로 36세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녀는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 같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삶의 의욕을 잃을까요?
바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인정이 바로 성령과 같습니다.
자녀에게는 부모에게 받는 인정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무기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리 밑 어딘가에 있다는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다른 무엇도 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의 친 부모이고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다 헤쳐 나갈 힘이 생겼습니다.
삶의 활력은 이렇게 나의 창조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그분들을 믿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성령을 불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자기 죽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라고 하십니다.
믿는 이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 14,17)
그리고 이것이 삶의 활력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제단에 황소를 바쳤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나를 봉헌할 때 하늘에서 나를 성령으로 사르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자 삶의 활력입니다.
엘리야도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자신이 봉헌하는 제물을 사르게 하였습니다(1열왕 18장 참조).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늘에서 ‘성령의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활력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못하여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창조자로부터 받는 인정입니다.
피조물의 유일한 삶의 활력은 창조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하느님의 성령을 강력히 체험했을 때는 모두 ‘믿음의 순종’에 관련된 일이 있었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면 나는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않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너무 외로웠습니다.
죄를 짓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셔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가슴으로 느껴진 때가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 길을 달리는데 귀밑으로 스치는 바람이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부터 외로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 분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활력이 됩니다.
또 사제 서품식을 앞두고 피정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사제로 불러줬다는 확신만 주신다면 사제 생활을 힘차게 해 나가겠다고 약속 드렸습니다.
그러나 피정 마지막 날까지 어떤 응답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날, 실망하여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마지막 잎새를 단 한 나무에서 그 잎새가 그 순간에 떨어지며 주님께서 저를 창조 이전부터 사제로 불러주셨음이 믿어졌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주님의 뜻 위에 믿음으로 순종하려고 자신을 봉헌하는 제물 위에 삶의 의미를 내리셔서 그 사람을 불타게 하여 활기차게 살게 하십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죽음조차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
우리에게도 그러하듯이 예수님께도 유난히 절친했던 가족이 있었으니, 친구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 마르타와 마리아였습니다.
본격적인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때로 심한 허기에 시달리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는, 엄청난 식욕의 소유자들인 제자들을 이끌고 그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예수님을 비롯한 장정들을 위한 손님맞이의 총책임자는 마르타였습니다.
그들이 예고도 없이 대거 방문할 때마다 마르타는 즉시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그녀는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마르타는 한 사흘씩 앓아누울 정도였습니다.
음식 솜씨도 좋고 마음씨도 착했던 마르타는 언제나 예수님과 제자단을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틈만 나면 찾아오고 엄청나게 먹어대니, 어느 순간 마르타의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한번은 얼마나 힘들었던지,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따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마르타가 예수님의 처신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 급히 좀 와주십사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
마르타는 평소 자신의 가족이 한마음 한 몸으로 합심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기울였던 봉사와 희생, 그간 쌓아온 각별한 친분과 우정을 생각했을 때, 만사 제쳐놓고 즉시 달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인연도 관련도 없는 다른 사람들은 다 치유시켜 주시면서, 보통 인연이 아닌 오빠 라자로는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놔두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 마르타는 솟아오르는 화를 겨우 눌러 참으며 오빠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후 예수님께서 도착하신다는 말을 전해 들은 마르타는 즉시 달려가서 볼멘 소리로 따졌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과 꼭 필요한 순간 적절히 개입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늑장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
아직도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믿음은 100 퍼센트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 퍼센트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4절)
“네 오빠는 살아날 것이다.”라는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라자로의 부활뿐만 아니라 종말의 부활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마르타는 마지막 부활로만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종말 부활신앙은 예수님 시대 당시 이미 군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마르타의 반응은 그러한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퍼센트 부족한 마르타의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고 채워주시기 위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부활의 원동력이며 부활 그 자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은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은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의 부활 신앙도 예수님께서 일깨우시고 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 생의 전부임을, 예수님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임을 온몸과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라자로는 적당히 죽은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염을 했고, 무덤에 묻었고, 바위로 봉하기까지 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신이 부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라자로가 소생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죽음조차 지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썩어가는 시신을 일으켜 세우시는 재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생명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부여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생명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이끄시는 관문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삶의 이정표로 삼는 수밖에 없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는 당신의 부활을 미리 암시하신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이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그것은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슬픔과 눈물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 이 이야기에는 그 기쁨을 향해서 스스로(‘능동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저절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은총을 내가 적극적으로 받으면서, 은총을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야 은총이 내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직접 만나거나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요한 4,50-53), 라자로의 경우에도 ‘계시던 곳’에서 말씀만으로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하셨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라고 특별히 언급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시고 이틀을 더 기다리신 것은 그들 남매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일시적인 위안이나 작은 기쁨이 아닌, 영원하고 참되고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작은 기쁨’일 뿐입니다.
진짜 큰 기쁨은, 그리고 참되고 영원한 기쁨은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일은 그 기쁨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일입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에게만 주신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때에는 ‘관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7,14).
또 ‘야이로’ 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에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아이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8,54).
그러나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는 그의 손을 잡지 않으셨고, 무덤에 손을 대지도 않으셨고, 그냥 무덤 밖에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말씀만으로 살리신 일은 세 이야기의 공통점이고, 어떤 동작 없이 오직 말씀만으로 살리신 것은 라자로 이야기의 특별한 점입니다.
나인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일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은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이고, 라자로를 살리신 일은 ‘가르침’을 주기 위한 일입니다.
무덤에 있는 라자로를 불러내신 일은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각자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지만, 그 생명의 힘을 받아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무덤에서 걸어 나가는 일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셨고, 그곳까지 가는 길을 알려 주셨고, 그 길을 앞장서서 걸어가십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서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11,45)
이 말에서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믿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믿은 사람들의 수보다 안 믿은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믿은 사람들’은 전부터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로, 그리고 안 믿은 사람들은 전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아도 그 일을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을 보고서도 안 믿은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고(요한 11,46), 최고의회는 예수님과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요한 11,53; 12,10).
안 믿은 자들은 안 믿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일을 덮으려고 한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을까?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이 드러날수록 악의 세력이 더욱더 기승을 부립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공동생활(共同生活)의 축복과 아름다움 -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시편 130,5)
오늘 사순 제5주일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45절까지 긴 복음이 참 은혜롭습니다.
“라자로가 죽다-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눈물을 흘리시다- 라자로를 살리시다”순서로 전개되는 내용도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순간 영감처럼 떠오른 강론제목,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 감사했습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베타니아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말 그대로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동생활’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지극히 평범한 내용에 공감하며 은혜받았습니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여럿이 서로 도우며 사는 생활”
혼자서는 못삽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이요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의 삶이 지옥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분들께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제 집무실이 흡사 세상 공동체의 중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도 예고없이 10여명쯤 방문한 자매들에게 판공성사를 드리며 교회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체험했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의 다음 두 절도 공동생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성규 머리 45)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성규 72,11-12)
성규나 성경은 개인 수양 서적이 아니라 더불어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사랑과 지혜를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더불어의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는 2년 전에 써놓은 말씀이 여전히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제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이와 더불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 6째 연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설파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공동체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수도가정공동체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날로 늘어나는 1인 가구와 노령화 현실에 교회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구원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넓게 깊이 보면 믿는 이들은 혼자 살아도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기에 물심양면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불가의 절친 관계였던 두 고승, 성철과 청담의 일화도 생생합니다.
나이는 10세 정도 많은 청담이었지만 격의 없이 우정을 나눴고, 힘이 장사인 두 고승은 오랜만에 만나면 이층 다다미 방에서 반가움에 씩씩거리며 한바탕 씨름을 하며 우정을 확인하고 나눴다는 웃음짓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수십년이 지닌 지금도 선명합니다.
수도원 다섯의 작은 개들의 공동생활도 흥미롭습니다.
아예 이웃집 불암사의 선재라는 개는 요즘 수사님들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하다시피 합니다.
어제는 새벽 4시 산책길에 제 뒤를 종종 따라왔고, 후에 날이 밝자 수도원 개집의 문을 열어놓으니 반가워 격렬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더불어의 놀이를 즐기는 동네 아이들과도 흡사했습니다.
커다란 선재가 작은 개와 격렬히 싸우는 듯 해 자세히 보니 반가움과 애정의 표현이었고 몸에 전혀 손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론 서론이 길었지만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평생 도반이자 베타니아 공동체의 중심으로 모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를 사랑했고, 이들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자매들 간의 우정이 함께 감을 봅니다.
삼남매의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공동체의 부요와 축복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요!
라자로의 소생 기적을 통해, 또 마르타와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주옥같은 진리를 배우고 체험합니다.
혼자라면 어찌 이런 구원의 진리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기는 오늘 복음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아픔에 도움을 청할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에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저도 자주 제 절친이신 예수님께 형제자매들을 위해 생미사와 연미사를 통해 간청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대부분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진 예수님의 반응 말씀은 어제 저녁기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에 이어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 시 흥겹게 불렀습니다.
오늘 하루 흥겹게 기도 노래로 바치며 지내려 합니다.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가서 그를 깨우자.”
얼마나 정겨운 주님의 반응인지요!
라자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의 친구가 된다니 말씀 자체가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죽음도 우리 전능하신 친구 예수님의 눈에는 잠들어 있음이요 이를 깨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과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참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배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구원의 진리요 마르타의 모범적 신앙 고백인지요!
참으로 귀한 진리와 고백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마리아도 울고 함께 한 유다인들도 울었다는 장면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11,35)는 대목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참으로 인간적인 주님의 면모가 연상되어 큰 위로가 됩니다.
라자로를 살리는 절정 부분 또한 감동의 극치입니다.
“돌을 치워라.”
우선 우리가 살아나는 데 주님께 협조해 할 일은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의 돌을 치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즉시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짧은 감사기도 후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흡사 죽음과 같은 깊은 영적 잠에 떨어진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절망의 무덤 안에 갇혀있거든 즉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무덤문을 박차고 탈출하여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라자로를 살리는 복음은 예수님의 일곱 표징중 마지막 절정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부활을 예고하는 놀랍고 고마운 표징입니다.
부활을 앞두고 부활의 기쁨을 미리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신 주님은 당신 백성인 우리를 살려 내시고 당신 영을 우리 안에 불어 살려주시니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이 우리안에 사시기에 우리는 육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시니 말 그대로 영적 삶이요 이보다 더 큰 축복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죽음의 잠에서, 육적인 삶에서, 깨어나 성령 충만한 영원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시편 130,6-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토론토에 신문홍보를 가면서 저를 기억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18년 전에 토론토에서 3년간 지냈기 때문입니다.
한맘 성당 신부님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18년 전에 신부님은 제게 주일 저녁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2년 동안 주일 저녁미사를 도와드렸습니다.
당시에 신부님은 제게 차를 빌려주었습니다.
뚜벅이었던 제게 차가 생긴 것은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열고 나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성당으로 미사를 갔고, 여행도 다녔습니다.
이번에도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눈이 많이 내려서 신문홍보를 하지는 못했지만 신부님은 다음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꽃피는 봄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반찬가게 하였던 자매님, 아이스크림 가게 하였던 형제님도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억 속에 머물러 있던 분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그때 미사 복사를 하던 소년은 결혼해서 가장이 되었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 있기에 다시 만나도 반가웠습니다.
지난 2021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연해주로 이주한 지 100년 만에, 카자흐스탄에 묻힌 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운구하는 수송기가 대한민국 영공을 들어올 때였습니다.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편대가 수송기를 호위하면서 이렇게 환영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는 대한민국 공군이 호위하겠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던 홍범도 장군이 생각났습니다.
대한민국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2021년 국군의 날에 고국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억은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우리가 미래로 나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2000년 동안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였고, 기억한 이 말씀을 성체성사를 통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2000년 전에 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2000년 전에 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제가 축성하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은 기억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하셨습니다.
라자로는 죽은 지 삼일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라자로가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라자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게도 “가브리엘아, 이리 나와라.”라고 하십니다.
근심과 걱정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욕망과 불평으로 악취가 나는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게으름과 나태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욕망과 불평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게으름과 나태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이미 썩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이미 무덤입니다.
우리가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의 약속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목임을 믿고 위로를 받습니다.
부활 신앙만이 우리 인생살이의 진정한 힘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중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속리산에 갔었습니다.
1,000명에 가까운 학생이 속리산에 오르니 정말로 정신이 없었지요.
속리산 정상에 도착한 친구와 저는 빨리 내려가서 선생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놀고 있자면서, 산 아래로 뛰다시피 하면서 급하게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올라갔던 길과 달리 내려가는 길이 점점 험해졌고, 심지어 사람의 인적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잘못 내려가면서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꼈고, 결국 우리는 큰소리로 “사람 살려!”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응답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산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때의 반가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벌써 거의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길을 잃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찾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전까지는 사람이 그렇게 반갑지 않았습니다.
경쟁자, 방해꾼 등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하산하면서 그 고생을 한 뒤로 사람이 너무나 반갑고 감사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을 보면, 꽤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삶 안에서도 길을 잃은 것 같은 체험을 계속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순간 길을 찾는 고마운 체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삶, 그만큼 주님을 만날 확률도 높아집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리십니다.
사실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 남매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말에도 가지 않으시고,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나서야 유다로 가십니다.
남은 자매인 마르타와 마리아는 무척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 서운함 때문일까요?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마르타처럼 맞이하지 않고 그냥 집에 앉아있지요.
아마 길을 잃은 것 같은 체험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면서 그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길을 잃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비로소 찾을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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