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5. 사순 제 2주일. 복대동성당. 유낙준주교.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 성공회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각(마르코8:33)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오신 복대동성당 신도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길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
오늘은 사순 제 2주일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 2018년의 2월 25일입니다. 한자로는 주후강생 2018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나와 예수님과 관련된 언어로 표현하여 살고자 하는 것이 전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이 이후 먼 날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이 지금에 끝나는 거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에 대해서 인내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내하는 나가 되고자 사순절에 더 깊이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길잡이에 대해 방향을 잡아내는 것입니다. 성공회는 우리의 세계관을 분명하게 해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 세계관을 전통으로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과 관계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성공회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관계하지 않을 때 이마에는 죽음이라는 글자가 남고 입에서 하느님이라는 글자를 빼니까 흙으로 변했다는 유대교 탈무드의 말씀이 사순절기의 안내말씀으로 잡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원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떻게 합니까? 오른손바닥으로 얼굴의 한편을 대고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무릎위에 놓는 자세를 취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솔로몬 왕처럼 양손을 들고 얼굴을 하늘을 향하기도 합니다. 오늘 창세기 17장 3절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아브람의 자세를 보겠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말씀을 하셨다.” Abram bowed down with his face touching the ground, and God said. 허리를 굽혀 엎드리고 땅에 머리를 대는 자세가 아브람의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 이후 하느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창세9:13-내가 구름 사이에 활 bow 을 둘 터이니 나와 땅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될 것이다. 하느님이 화살을 맞으면서까지 벌을 내리시지 않으시겠다는 하느님의 관용을 상징하는 것임). 하느님을 만나는 자세는 그렇게 허리를 굽혀 엎드리고 얼굴을 땅에 댄 모습입니다. 겸손한 자세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는 그 겸손함이 성령이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게 한 것과 같습니다(마르코1:9-10). 그렇게 겸손함은 성령을 내려오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의 자세가 허리를 굽혀 엎드리고 얼굴을 땅에 댈 때 첫째,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창17:3). 둘째, 나의 존재를 새로운 존재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창세17:5,17). ‘높은 아버지’라는 아브람 Abram 이 ‘많은 나라들(만국)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 Abraham 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창세기17:5). 또한 ‘여주인’이라는 사래 Sarai가 ‘공주’라는 사라 Sarah로 바꾸어 부르라고 하십니다(창세기17:15). a,be,ce,de,e,ef,ge로 7번째가 마친 후 8번째 ha가 아브라함에 들어가고, h가 들어가 사라가 됩니다. 7이 완전수이고 그 완전수 다음의 h가 들어감으로 새로운 세상이 펼치는 이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생으로 끝나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이름으로 살라는 뜻이 담겨진 것입니다. 셋째, 너와 미래세대의 하느님이 되겠다고 먼저 하느님이 약속하십니다(창세17:7). 왕이신 나의 하느님이신분이 후손들의 하느님이 되시겠다니 후손들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허리를 굽혀 엎드리고 얼굴을 땅에 대면; 하느님의 말씀을 주시고, 새로운 세계를 살 힘을 주시고, 후손들에게 번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을 하느님께 자복하면 우리의 겸손함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복을 주셔서 아들 낳게 하고 복을 주셔서 왕이 날 것이라고 하십니다(창세17:16).
후손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아브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다마스커스의 종들 중 한 사람인 엘리에젤이 자신의 후계자라고 하였습니다(창세15:2). 이후 아브람은 사래의 몸종인 하갈로부터 얻은 이스마엘도 후계자가 아니란 말씀을 하느님께로부터 듣습니다(창세17:19). 사라로부터 이사악을 낳은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25년이 지난 이후였습니다. 긴 시간을 인내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인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내한 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의 인내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웃게 해 주신’ 뜻으로 이사악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자기애나 자기추구를 내려놓기까지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까지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일하실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하느님께서 내 속에 머무시게 됩니다.
허리를 굽혀 엎드리고 얼굴을 땅에 대면; 하느님의 말씀을 주시고, 새로운 세계를 살 힘을 주시고, 후손들에게 번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넷째, 속까지도 겸손해야 합니다(창세17:17 참조). 하느님을 믿고서도 실망과 좌절 속에 빠져 산다면 사래와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나 하느님의 놀라우신 행동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까지도 겸손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마음 속까지 겸손하면 하느님을 믿고서 실망하지 않게 됩니다(시편22:5). 가장 사랑하는 남편 아브라함까지도 공주라고 부르는데 스스로 공주라고 믿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벌하시지 않으시고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남편은 부인을 공주라고 불러야 합니다. 오늘부터 성공회 복대동신도들은 남편을 공주 princess 라고 부르시면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후계자를 주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상속자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로마4:16).
“하느님의 종이라고 인식한다면 하느님을 찬양하라. 야곱의 후손이라면 하느님을 경외하라(영광을 올려라). 이스라엘의 후손이라 여기면 하느님을 예배하라(모두 다 조아리라)”(시편22:23). Praise, honor, worship the Lord! 왜냐하면 고통받을 시에, 배고플 때 나를 외면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항상 답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시편22:24). 주님께 가는 사람은 찬양을 올리고 번성하게 되리라(시편22:26). 죽은 자, 살아 있는 자 그 앞에 엎드리고 bow down, 미래세대들이 예배하리라(시22:29).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는 아브라함,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로마4:17)”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믿음(로마4:18)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과 관계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로마4:22).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시고, 우리의 믿음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관계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로마4:25).
우리사회의 전문가나 지도자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고 거절 당한다면 살맛을 잃을 것입니다만 예수님은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침을 “너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라 Give yourself to God(로마6:13)”으로 사셨습니다. 늘 하느님과 관계를 놓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을 하시면 복이 옵니다. 교회 나오니까 손해 본다는 분은 믿음이 적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 나를 바치는 사순절기이기를 빕니다.
사순절기는 하느님과 관계를 깊게 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관계 단절을 목표로 하여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을 사탄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Get away from me, Satan!(마르코8:33).”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일만 하는 우리 복대동 성도들이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