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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히브리어 원전 성경을 중심으로 한글로 쉽게 푸는 창세기 1장 내용의 좋은 강해가 집필되고 있어서
운영자분께 글로써 대신 양해를 구하며 여러분들께 나누고자 올려 드립니다.
서론 1,2와 본론 1을 시작으로 창세기 1장 전체를 히브리 원전 중심으로 한글 성경을 접목시켜 쉽게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읽어 보시고 은혜 되시면 계속해서 나올 강해에도 많은 은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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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원전 성경 중심으로 한글로 쉽게 푸는 창세기 1장 (4)
강해자: 서균석 목사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
[태초]
태초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맨 처음의 시간이라고 온 세계가 공통적으로 보고 있다. 천지창조라는 영화가 제작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지질학자들은 자연현상의 세계가 137억 만년 전에 만들어 졌다고 말한다. 이들의 말대로 137억 만년 전의 자연현상의 세계가 만들어진 때의 태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태초를 In the beginning 이라고 하였다. 이는 시간의 태초를 말한다. 시간의 137억 만년 전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온 세계가 이렇게 믿고 있다. 그대로 인식이 굳혀져 있다. 여기에서 바꿔지는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모든 사람들이 시간의 태초로 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보고 있다는 말이다. 진리는 다수의 사람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열어 가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태초는 시간의 시작인 In the beginning이 될 수 없다. 시간의 태초로 보고 있는 한 성경은 절대로 열어질 수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의 성경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올바른 개념으로 번역상 오류가 없는 성경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서론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자연현상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137억 만년 전에 말씀으로 창조 하신 것은 분명히 맞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연현상을 창조하신 시간의 내용을 기록해 놓은 글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만 분명히 선을 그어 놓으면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게 되고 혼란스러울 것도 없다. 머리를 바꾸고 생각을 바꿔야한다. 쇠가죽 같이 질긴 마음을 베어내고 굳어진 마음땅을 갈아엎어야 한다. 옥토가 된 마음땅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태초는 성경전체의 태초다. 이 태초 안에서 성경이 시작되고 진행되어 결론이 나게 된다. 이제 새롭게 열어지는 개념을 접하면서 영적 눈이 열릴 것을 확신한다. 이를 위해 서론에서 긴 내용으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태초는 ‘뻬레쉬트’인데 처음, 최초의 산물, 먼저 시간이 뜻이다. 어근은 ‘로쉬’인데 머리, 시작, 처음,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품사는 명사, 여성, 단수다. 여기에서 여성이 문법상으로 풀지 못하고 있는 내용이다. 남성, 여성이라는 개념으로 푸는 여성이 아니다. 그런데 문법으로는 그대로 여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시간의 태초로 해석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여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문법을 만들어 놓고도 그 문법을 몰라서 적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모순이다. 여성을 모르면 성경은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지껏 성경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계시의 비밀이 열어 질 수 있었겠는가? 닫혀진 성경을 읽고 있었을 뿐이다. 여성을 모르면 히브리어 원전 성경을 읽고 있다 할지라도 계시가 닫혀진 성경을 읽은 것에 불과하다. 원전 성경을 읽으나 한글 성경을 읽으나 매한가지다.
여성은 창세기 1장의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를 의미한다. 이 안에서 여자가 남자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를 모르면 성경을 열어 갈 수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남자는 첫째시기에서 셋째시기고 여자는 넷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다. 첫째시기에서 셋째시기는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 즉 법이다. 사람은 이 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 법을 아담의 갈빗대라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인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하나님의 법으로 교환을 하여 소멸시켜야 하는데 이를 적용하고 익혀 나가지도 않은 채 어두움인 무지 가운데 정착을 하면서 안주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은 무지를 죽여서 소멸시키는 데에 있으시다. 아담은 하나님의 법에 빗나가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인간이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육의 속성을 잘라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라내는 아픔이 따르고 고통을 감당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인 아담이 가지고 있는 갈빗대를 여자에게 세우셨다. 이것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창2:22에 번역하고 있다.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여자에게 이관해서 세운 것이다. 법이 넘어간 것이다. 여자가 그 법을 가지고 아담을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로 적용하고 익혀가며 어두움인 무지를 불태워 소멸시키도록 하신 것이다. 이 내용을 창2:18에서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번역을 하였다.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보기에 측은해 보이고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 여자가 있어야 되겠다고 하여 도와주는 배필을 만드신다는 말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왜곡되어 있다. 사람은 여자가 없으면 마음땅의 어두움인 무지를 죽여 나갈 수가 없다. 여자가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인 하나님의 지식의 빛 곧 법을 하나하나 상담을 해주면서 적용하고 익혀가면서 무지를 잘라내고 소멸시킬 수 있게 하여 주어야 한다. 여자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를 주관해 나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여성을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초의 품사는 명사, 여성, 단수이고 뜻은 머리, 시작, 처음, 우두머리인데 이 뜻 가운데서 어느 뜻을 적용해서 태초를 풀어야 옳겠는가? 물론 시작, 처음으로 해야 한다고 말을 할 것이다. 이래서 성경이 안 열리는 것이다. 성경을 외운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머리로 해야 한다.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머리 안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해야 맞다. 그렇다면 머리가 무슨 머리인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문자대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열리지 않는다고 말한 이유를 이제야 인식이 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 머리 또는 얼굴로 표현한다. 물론 사람도 머리가 있고 얼굴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은 머리와 얼굴이 아니다. 하나님의 머리와 얼굴은 생명의, 빛의 머리, 얼굴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얼굴은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와 얼굴이다. 사람의 머리와 얼굴은 잘라지고 소멸되어야 할 머리와 얼굴이다.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는 하나님의 머리, 얼굴이며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는 인간의 머리, 얼굴이다.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 창세기 1장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창세기 1장에 모두 들어있다. 이 안에 들어가 있지 않는 그 어떤 내용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하심이 아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집을 짓는 설계도와 청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슨 집을 짓는가? 현상적으로 보이는 집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집을 짓는 설계도와 청사진이다. 이 도면대로 사람을 지어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라는 집이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연현상의 세계를 창조하실 때 혈과 육으로 된 사람도 창조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혈과 육으로 된 사람 하나만 존재한다고 착각을 일으키면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과 육을 분리해서 이분법으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과 육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의 영을 받기 전에는 영은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영은 죽은 상태에서 혼과 육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으면 자신이 짐승인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것이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로 무저갱인 지옥에 갇혀서 살면서도 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지 못하고 그 옥에 갇혀있는 것을 즐기며 거기에 안주하려는 것이 인간의 육의 속성이다. 이 죽은 영을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 살리고자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거하는 집을 지어 나가시는 것이다. 죽은 영이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 산영이 되면 영혼이 육을 다스려 나가게 된다. 그래야 영, 혼, 육이 일체가 되어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에 따른 설계도와 청사진대로 완벽한 집이 세워지게 된다.
이 집이 세워지기 전에는 인간은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와 지옥의 얼굴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릿속에 육의 많은 생각들을 담고 있다. 이 생각들이 우상이 되어 머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이 그 머릿속에 들어갈 틈이 없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오히려 대적을 할뿐만 아니라 원수의 자리까지 이르르게 된다. 그래서 이 육의 생각들을 담고 있는 머리를 베어내야 하고 지옥의 얼굴들을 깨트려서 소멸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왜 믿는가? 이러한 지옥의 속성들을 죽이기 위해서다. 죽기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의 개념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 그런가? 십자가에서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셨으니 나는 고난은 싫사오니 부활의 축복만을 주시옵소서. 라고 하고 있는 것이 기복주의이기 때문이다. 살기도 힘든데 왜 죽으라고 하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들은 죽어야 생명의 부활이 된다는 것을 잘못 배웠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집이란,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전 되시는 몸을 말한다. 이 몸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속사람이다. 신령한 몸이다. 썩지 않는 몸이다. 이 집을 세워야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워진 사람이 되신 ‘벤-아담’이 된다. 성장해서 세워진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사람의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가 잘라지고 지옥의 얼굴들이 소멸되어야 하나님의 생명의, 빛의 머리와 얼굴로 바꿔진다.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와 얼굴들이 점차적으로 작아져 소멸되고 하나님의 생명의, 빛의 머리와 얼굴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사람의 머리와 얼굴이 하나님의 머리와 얼굴로 바꿔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간곳없고 나를 구속하신 주님만 남게 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인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머리 안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해야 한다. 태초는 시간의 태초가 아니고 존재의 태초다.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태초라는 말이다. In the beginning인 시간의 태초라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리도 못가서 그 억지 주장이 부러져 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사람의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와 얼굴들을 하나님의 생명의 빛의 머리로 바꿔나가신다.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는 세워진 사람 즉 ‘벤-아담’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가 되신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벤-아담’이 되셨다.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는 그리스도이시며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는 예수가 되신다. 그리스도 예수는 부르기만 하는 이름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지식의 빛을 배움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 빛으로 마음땅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교환해서 죽이고 소멸시켜 나가면서 구원 곧 예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예수는 ‘그가 구원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미완료다.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예수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처음 들어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고 또 반복해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줄로 믿는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빠지면 성경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가 빠진다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이 빠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인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가 빠지면 성경이 진행되지 않고 마무리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인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사역을 하며 진행되어 나간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로 오시고, 오시고 계시며, 오실 것인 존재로 오신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나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 모두가 번역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런 일이 있게 되었는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 졌겠는가? 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성경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가 맥이 되어 강같이 흐르고 있다. 이 맥을 보지 못하고 성경을 읽는 것은 문자로 된 글만 읽고 있다는 말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뜻글자다. 문자 속에 뜻과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한문 속에도 뜻이 들어 있는데 그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맛소라 문법이 만들어진 것은 7세기다. 그 후부터 성경을 문법에 의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문법에 의해서 성경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고민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맛소라 문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성경이 어떻게 풀어지고 있었을까?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근이 있었고 자음 하나 하나에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 자음의 뜻이 문법에 가려져 빛을 잃어 버렸다. 어근에다가 접두와 접미를 붙이면 단어는 필요에 의해서 계속 만들어져 나간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단어가 계속 만들어져 나가고 있고 현대 히브리어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둘 것은 히브리어를 연구하는 것은 성경해석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인들의 언어를 배우고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는 뜻글자이기 때문에 한 단어가 한 구문을 이루고 있다. 한 단어 속에서 한 문장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법만으로는 안 이루어진다. 맥과 어근과 자음과 합성어와 문법이 하나로 결합하여 조합을 이룰 때 하나의 구문이 정확하게 이루어진다. 이에 의하여 태초를 구문을 이루어보면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로 창조하셔서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올바른 목표로 적용해서 놓았다’로 된다.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는 하나님의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며 그리스도이며 지식의 빛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인 인간의 마음땅에 넘겨주셔서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에 그대로 적용시켜서 깨트려 소멸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대로 올바르게 놓았다는 의미다. 성경 육십육권은 전부 태초 안에서 발출되어 적용되어 나간다. 태초가 없으면 성경이 시작해서 진행되지 않는다. 이 태초 안에서 짐승과 같았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얼굴, 머리로 바꿔져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태초를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개념으로 설명하면 예수를 오래 믿고 교회의 중직을 맡아서 봉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워서 자신의 마음땅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 즉 육의 속성을 깨트리고 소멸시키는데 적용하지 않는 사람은 태초가 없는 사람이다. 태초가 없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형식은 있으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진행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만하고 강퍅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태초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바꿔지는 시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으려고 애는 쓰는데도 왜 죽지를 않네요.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느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태초가 없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자가 누구인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태초가 시작되어 어두움인 무지가 깨트려지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더 이상 깨트려 질것이 없는 고운가루가 된 자가 점령하게 된다. 어두움인 무지가 깨트려지고 낮아진 자리로 내려가야 요단강이 나온다. 요단을 통과해야 가나안 땅에 이르를 수 있다. 육의 속성이 요단을 향해 내려가고 내려가야 영혼이 열매 맺고 많아지고 충만해지도록 살이 찌는 자리로 성장을 하여 올라간다. 이것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것이다. 영혼이 한번 구원받으면 구원이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영혼이 한번 구원 받으면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단도 있다.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를 통과해 가면서 하나님의 지식의 빛으로 어두움인 무지를 계몽하고 죽여서 소멸시키고 생명의 부활을 해가는 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속으면 안 된다.
창1:1은 성경 육십육권의 결론이다. 하나님께서는 결론부터 내놓으시고 이 결론에 이르도록 성경 육십육권에 적용하시면서 사역을 전개해 나가신다. 이 결론에 이르도록 창세기 1장의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잣대를 세우시고 이 잣대를 통해 구체적으로 적용해 나가고 익혀 나가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창1:1을 현상의 하늘과 땅을 태초에 창조하셨다고 본다면 성경은 계획도 없이 목표도 없이 방향 없이 바다위에 표류하고 있는 배와 같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태초를 현상의 세계를 창조하신 때의 최초의 시간인 In the beginning으로 보면 성경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종이에다 글씨를 인쇄해 놓은 책이라고 보면 안 된다. 성경의 잣대대로 삶속에 적용하고 익혀 가면 사람이 성경화되어 사람이 성경이 되는 것이다. 책은 문자로 된 글을 읽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연현상의 창조의 시작인 In the beginning으로 성경을 본다면 사람이 성경화된 존재가 된다는 것은 허상이다.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왕국이 실현된다. 하나님의 왕국은 자연현상의 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땅에 실현된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다스리는 왕과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왕중 왕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왕들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어서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해 나가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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