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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히브리어 원전 성경을 중심으로 한글로 쉽게 푸는 창세기 1장 내용의 좋은 강해가 집필되고 있어서
운영자분께 글로써 대신 양해를 구하며 여러분들께 나누고자 올려 드립니다.
서론 1,2와 본론 1을 시작으로 창세기 1장 전체를 히브리 원전 중심으로 한글 성경을 접목시켜 쉽게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읽어 보시고 은혜 되시면 계속해서 나올 강해에도 많은 은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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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원전 성경 중심으로 한글로 쉽게 푸는 창세기 1장 (5)
강해자: 서균석 목사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천지]
하늘 천, 땅 지. 하늘과 땅이라는 뜻이다. 하늘은 ‘에트 핫샤마임’이다. ‘핫샤마임’은 품사가 명사, 남성, 복수 또는 쌍수다. 어근은 ‘솨메’인데 높다는 뜻이다. 높이 있는 것으로서 하늘을 말하는데 눈에 보이는 창공뿐 아니라 천체가 회전하는 더 높은 하늘을 언급하는 쌍수다. 복수는 하나 이상을 의미 하지만 쌍수는 하나 이상의 짝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서 발도 쌍수고 눈도 쌍이다. 둘씩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전에는 그냥 하늘이라고 되어 있지만 현상적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법대로 표현하면 하늘들 또는 하늘이 쌍이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 안에 계신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현상적인 푸른 창공에 계시는 분이라는 말인데 이는 논리상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현상의 세계에 충만하게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라고 기도하고 있고, 사도신경에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현상적인 하늘은 복수가 된다거나 쌍수로 존재 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사도바울이 삼층천 하늘에 갔다 온 것을 현상적인 하늘로 보고 보이는 하늘, 대기권의 하늘, 대기권 밖의 하늘이라고 삼층천 하늘을 해석하는 자도 있다. 이것은 웃음이 나지만 웃지 못 할 서글픈 현실이다. 창1:27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라고 한 것을 아담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무엇일까? 남자와 여자의 중간인 중성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도 많은 생각 속에서 고민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내린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웃지 못 할 서글픈 현실 일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다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간다고 믿고 있다. 그러면 그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현상적으로 하늘을 본다면 대기권 밖의 그 어떤 곳일 것이다. 맞는가? 대기권 밖은 은하계다. 천왕성, 혜왕성이 하늘나라인가? 하늘에 대한 개념이 올바르게 확립되지 못한 채 하늘이라는 단어를 무의식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다. 예수를 믿다가 죽으면 무조건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막연한 하늘나라 개념이다. 태초에서도 설명 하였듯이 태초를 천지를 창조한 시간의 시작, In the beginning으로 보고 있는 것은 여기의 하늘들과 땅을 현상의 하늘과 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들은 ‘높다’는 어원에서 온 말이다. 높다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 시기다. 이것이 하나님의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의도, 계획, 정신, 사상, 머리, 얼굴들이 하늘들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 높은 것이다. 높은 것이 하늘들이다. 하나님은 왜 하늘들의 높은 뜻과 계획을 세우셨는가?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다. 일하시기 위해서 높은 뜻을 세우셨다. 무슨 일을 하시는가? 창조의 사역을 하신다.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의 하늘의 쌍으로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인 인간의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계몽해서 깨트려 소멸시키기 위해 하나하나 상담을 해가면서 인식과 분별에 따라서 계몽을 해간다. 다시 말하면 어두움인 무지를 어떻게 계몽하며 어떻게 죽여 나가는가에 대해서 하늘의 쌍에 의해 상담을 해야 한다. 욥도 고난을 당할 때 우츠땅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사역의 쌍으로 상담하기 위해 들어간 것이다. 또 둘째 시기는 첫째시기와 상담을 하고, 셋째 시기는 둘째시기와 상담을 하고, 넷째 시기는 셋째시기와 상담을 하고, 다섯째 시기는 넷째시기와 상담을 하고, 여섯째 시기는 다섯째시기와 상담을 해나간다.
왜 그렇게 하는가? 첫째시기와 둘째시기가 상담을 해서 하나로 결합을 해야 셋째시기로 상담하기 위해 넘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로 결합되지 않으면 다음 시기로 넘어 갈수 없다.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를 적용하고 익혀가면서 통과하는 것은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 없이 적용하고 익혀 나가지도 않으면서 듬성듬성 건너뛰는 시기가 아니다. 첫째시기에서 정확한 인식을 하고 분별을 하여 어두움인 무지가 깨트려져야 둘째시기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 첫째시기에서 둘째시기로 건너뛰고 셋째시기로 못 넘어 간다. 인식이 안 되면 진행이 안 된다. 어두움인 무지의 머리는 하나님의 지식의 빛이 인식이 안 되면 지식의 빛으로 머리가 바꿔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늘들의 쌍을 인식을 못하면 하나님은 하늘들로 인간의 마음땅에 상담을 해주시면서 어두움인 무지를 깨트리는 일을 하실 수 없으시다.
하늘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올바른 물들로 구성되었다. 성경에 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물들은 하나님이 사역의 쌍으로 일하시는 물들이다. 여기의 물들을 현상적인 물들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의 올바른 일을 하시는 방편과 도구가 물들이다. 성경은 맥이 물이 흐르듯 흘러내린다. 그 맥을 이루고 있는 물이 하늘들의 올바른 사역의 쌍인 물들이다. 이 맥을 잡고 맥이 물로 흐르는 줄기를 꿰뚫지 못하면 성경이 일목요연하고 질서정연하게 전개되어 가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 맥을 보지 못하게 되니까 사람의 생각을 동원해서 이렇게 저렇게 맞추어 가면서 영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풀리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내용을 이 맥 속에다 집어넣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그리하면 맥 속에서 스스로 풀려지게 되어있다. 성경에 맥이 없다면 마귀가 성경을 수만 번 변개시키고 난도질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이 맥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변개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맥은 변개시킬 수도 없지만 변개시키려고 하여도 즉시 탄로 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인 올바른 사역의 쌍인 하늘들의 물을 맥으로 세우셔서 인간의 마음땅에 흐르면서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덮어서 진멸시켜 나가시는 일을 대적을 하거나 방해할 자가 누구인가? 하긴 그리스도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하늘들의 물로 세우신 맥을 전개해 나가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하늘들의 물로 세우신 맥에 순종하지 않고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담고 있는 땅의 맥 곧 지옥의 물의 쌍으로 일하는 물들로 맥을 세워 대항하여 도전하였다. 그래서 사복음서는 하늘들의 사역의 쌍인 물들과 땅 곧 지옥의 사역의 쌍인 물들이 싸우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잣대와 사람의 육의 속성인 잣대가 싸운 것이다. 사람의 잣대에 의해 하나님의 잣대가 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잣대가 사람의 잣대에 의해 패배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생명의 부활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잣대가 사람의 잣대를 이기신 것이다. 하늘들의 물들이 땅의 무저갱의 물들을 덮어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현상적으로 현상의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문자대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현상의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믿게 된다. 하나님의 실존을 올바르게 인식을 해야 한다.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인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 하늘들, 지식의 빛,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시다. 본체이시면서 실존이시다. 이 실존을 한마디로 말하면 말씀이다. 요1:1에 이 말씀이 하나님으로 계셨고 이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시고 하나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말씀은 한 존재다. 그래서 말씀이 왜곡되면 하나님의 실존이 왜곡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가 왜곡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의 본질도 왜곡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말씀이 왜곡되는 것에 대해서 놀라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번역을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 왜곡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늘들의 사역의 쌍인 물들이 인간의 마음땅에 맥으로 흐르는 줄기가 빗나가게 된다. 하나님이 일을 하실 수 없게 된다. 하늘들을 모르면 하나님의 본체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배움으로 알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빛인 말씀을 배우므로 하나님의 실존을 인식과 분별이 되는 것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명확하게 알아 가게 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빛, 하늘들을 말씀으로 배우기 전에는 인간은 목석을 신으로 섬기는 샤머니즘 속에서 길을 못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 방황하는 속에서 더듬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하나님을 왜 찾아서 알려고 하는가? 하나님을 알아야 나 자신의 마음속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늘들을 모르면 인간의 마음땅을 모른다. 하늘들의 지식의 빛이 마음땅속에 들어와야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인식하고 깨달아 분별해 나가게 된다. 깨달고 분별 하였으면 죽여서 진멸해야 한다.
하늘들의 물들을 마음땅의 지옥의 물들이 인식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늘들의 물들을 분별하고 지옥의 물들을 분별 할 수 있다. 하늘들의 물들을 인식하지 못하면 하늘들의 물들이 인간의 마음땅에 흘러내리지 못한다. 하늘들의 물들이 지옥의 물들에게로 내려오지 못하면 지옥의 물들은 하늘들의 물에게로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 물들이 내려오고 올라가는 것은 계속 반복해서 하늘들의 물들과 지옥의 물들이 입을 맞추어 하나로 결합하게 될 때 하늘들의 물들은 사역이 끝나게 된다. 하늘들의 사역의 쌍인 물들이 사역이 끝나면 이름(‘쉠’)이 남게 된다. 하늘들이 이름의 존재로 바꿔지게 된다.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바꿔진 이름이다. 하늘들의 이름으로 바꿔진 존재가 되어야 하늘 안에 정착해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들 안에 계시는 것이다. 하늘들의 이름으로 바꿔진 존재가 된 자만 하늘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존재하게 된다.
땅은 ‘에레츠’인데 품사는 명사, 여성, 단수이다. 땅, 토대라는 뜻이다. 이 땅을 한글 성경은 하늘과 함께 묶어서 천지라고 하였다. 현상적인 지구를 흙으로 형성하고 있는 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는 이 땅을 Earth, Ground로 되어있다. Earth까지는 이해 할 수 있겠는데 Ground는 운동장이란 말인데 왜 운동장이라고 하였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태초에서 말한 대로 땅의 품사는 명사, 여성, 단수다. 태초가 명사, 여성, 단수였기 때문에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머리 안이라고 해석 하였듯이 땅도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땅, 토대를 말한다. 땅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의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인간의 마음토대를 의미한다.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를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며 하늘들이라고 하였다. 그 하늘들의 대칭 개념인 마음땅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세우신 목표와 대상은 무엇인가?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인 인간의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하늘들인 지식의 빛으로 계몽하고 깨트려서 소멸시키고 생명으로 부활시켜 하늘들로 이끌어 올려서 하늘들과 땅이 결합하여 하나로 이루어지게 하심에 있다.
그래서 창1:1을 성경 육십육권의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인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인 하늘들과 인간의 마음땅이 하나로 결합해서 완성되게 하신 것이 결론이다. 이 결론에 이르도록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잣대를 세우시고 이 잣대를 적용하고 익혀 나가게 하신 것이다. 연역법으로 구성된 것이 성경이다. 창세기1:1을 다시 번역하면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머리 안에서 하나님은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인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인 하늘들과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인 마음땅이 하나로 결합된 본체를 창조하셨느니라’가 된다. 이 내용을 현상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라고 하면 성경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겠는가? 깊이 있게 생각을 해야 한다. 현상의 세계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 해와 달과 별인데 이것들은 빠지고 하늘과 땅만 창1:1에 창조하셨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창1:1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창1:16에 해, 달, 별을 창조하셨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전혀 이상 할 것이 없다고 항변 할 것이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창1:16에는 해, 달, 별을 창조하신 적이 없으시다. 큰 광명, 작은 광명이 나오고 그 다음에 별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큰 광명을 해로, 작은 광명을 달로 보고 있는데 큰 광명은 해, 작은 광명은 달이 아니다. 해라는 단어가 따로 있고 달이라는 단어가 따로 있는데 따로 있는 단어들을 쓰지 않고 왜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고 하셨겠느냐는 말이다. 별은 별이라는 단어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큰 광명, 작은 광명에 대해서는 창1:16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 대해서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그 큰사랑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신 것이 그 큰사랑이 쟎느냐 라고 반문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이며 예수는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 시기다. 하늘들인 그리스도를 인간의 마음땅에 기름부음으로 넘겨주시어서 어두움인 무지를 계몽시켜 깨트려 소멸시키므로 생명으로 부활되어 구원의 완성인 예수가 이루어지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만 계신 분으로 인식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부르기만 하는 이름이 아니다. 마음땅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옥에다 가두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죽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생명의 부활을 하셨듯이 생명의 부활을 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로 바뀌어져야 할 이름이다.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지구의 흙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땅을 지구를 이루고 있는 흙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데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흙으로부터 나온 먼지로 만드셨다. 그런데 번역은 흙에서 나온 먼지는 다 같이 흙의 성분이기 때문에 그냥 흙으로 만들었다고 해놓았다. 과연 흙에서 나온 먼지는 흙의 성분이 같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먼지가 번역에서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땅의 먼지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냥 생각 없이 글자대로 성경을 읽고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땅이 지구나 운동장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땅이라고 말을 하면 펄쩍 뛰기부터 할 것이다.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 범주에 들어가 있다. 흙과 먼지는 성분이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다르다. 흙은 창세기 1장 전체 즉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를 의미한다. 먼지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인간의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지옥에 가두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깨트려 죽이고 불태워진 재, 즉 먼지가 된 열매를 말한다.
지옥이 땅속에 있다고 하니까 땅속 깊은 곳에 지옥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음부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현상적으로 읽게 되면 참으로 의미 없는 결과를 만나게 된다. 땅속 깊은 곳에 무슨 음부가 있다는 말인가?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를 파고 파 들어가 본들 지구 이 끝과 저 끝이 맞닿을 것이다. 하나님을 현상적으로 믿으면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잘되기 위해서다. 예수를 믿는 목적은 마음땅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하늘들인 지식의 빛으로 계몽해서 깨트려 불태우고 생명의 부활을 하기 위해서다. 생명의 부활을 하기 전에는 지식의 빛과 어두움인 무지와 계속해서 싸우게 된다. 싸움이 한 순간도 그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다스리실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이제 깨달을 수 있겠는가? 깨달은 것이 은혜다. 하나님이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무지의 마음땅을 지식의 빛인 옥토로 기경되기를 소원하시고 목양하시며 이끌어 나가심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한다.
※ 서론과 본론 등 앞 내용의 글이 궁금하시면 제 닉네임으로 검색하셔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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