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창조적 자본주의와 가난한 사람들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폭탄을 맞은 도시처럼 되었고 이어서 우쿠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벌어지더니, 다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벌어지고, 홍해를 지나는 다국적 선박들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실업자가 150만 명이 넘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아주 큰 재앙과 같습니다. 중소 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은 지금 거의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정부에서 회생을 위한 지원금을 쏟아 붓고 있지만 결국 국민들의 빚으로 빚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백신을 무료로 접종과 각종 지원으로 국민들의 건강보험료로 충당할 것이니까 무료라는 말은 당초에 할 말이 아닙니다. 이익공유제를 실제화 하겠다고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할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익을 본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이제 정부나 정치가들이 권력을 가지고 해결해서 될 일은 하나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울의 부동산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더니 다시 전세금이 하락하고, 집값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많은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하나도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4월 10일 총선을 앞두고 지금부터 공약(空約)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룰 수 없는 말잔치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이념이나 정당에 갈려 싸움질 좀 그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수표를 그만 좀 남발해야 합니다. 벌써 16년이나 지난 2008년 스위스에서 세계 최고 갑부이자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가진 자들의 잔치’라 불리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약자를 돕는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촉구했다고 합니다. 모든 언론에서 이 기사를 대서특필하였고, 인터넷 뉴스로 전해졌었습니다. 아마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잊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부유한 사람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도 만족시키는 길을 찾아야한다.”며 “21세기의 창조적 자본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는 6월 회장직에서 물러나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빌 앤 멜린다 재단’ 일에 더욱 매달리게 되면 창조적 자본주의 확산에 전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연명하는 아프리카 빈민들을 돕는 일에 기업과 부유한 나라 정부들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이윤을 창출하면서 가난을 줄일 수 있는 지속가능한 길”이 그 요체다. 게이츠는 기부를 뛰어넘어, 기업이 고급 인재를 빈곤구제 문제에 배치하고, 정부는 인센티브로 지원하는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친절한 자본주의’라는 용어도 썼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날 컴퓨터업체 델과 함께 PC 판매대금에서 50~80달러를 에이즈 퇴치기금으로 지원하는 ‘레드 캠페인’에 동참하기로 했다.
자본주의가 최선의 경제체제라는 신념은 여전하다고 밝힌 게이츠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이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주목하고 인간의 이타성(利他性)을 보는 데 실패했다는 견해를 보였다. 게이츠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 앞서 쓴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존재’라고 규정한 대목을 읽고 ‘창조적 자본주의론’을 착상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이는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 총재의 ‘자본주의는 인간성의 이윤추구적 측면에만 집중하는 미완의 체제’라는 견해와 비슷한 맥락이다. 빈부와 노사 불평등 심화를 방치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다보스에 모인 일부 석학과 경제계 인사도 새 패러다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씨앗을 보고 있다.”고 했다.(로이터 통신 참고)
그런데 그의 이러한 주장이 나에게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왜 헛소리로 들리는지 내 마음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랑의 나눔을 시작한다고 하여도 세상의 가난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실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순절 담화에서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동안의 나눔을 통해서라도 정말 소외 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10%의 신자들만이라도 그 말씀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가난해지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먼 산의 불구경일지도 모릅니다. 또 가난했다가 부자가 되었어도 옛날 생각을 해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세상이라면 우리나라의 부자들이 솔선수범해서 창조적 자본주의의 실천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빌게이츠의 얘기는 결국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일지도 모릅니다. <먼 곳의 물은 가까운 불에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 될까 먼저 겁을 먹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동참하고 있는데 세상이 몰라주기 때문은 아닌지 말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총선에만 관심이 많고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니 이런 사조를 어찌 먼 곳의 물은 가까운 불에는 소용이 없다는 말과 같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단식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리석은 내 가슴을 누르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축일2월 16일 성녀 율리아나 (Julian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 지역 : 니코메디아(Nicomedia)
활동 연도 : +305년
같은 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소아시아 니코메디아 출신의 성녀 율리아나는 소녀였을 때 아버지 아프리카누스(Africanus)에 의해 이교도 청년 에빌라수스(Evilasus)와 결혼할 것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성녀 율리아나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모진 매를 맞았고, 원한을 품고 있던 에빌라수스가 그 마을의 집정관으로 부임하면서 체포되어 갖은 형벌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청혼자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율리아나는 아버지와 청혼자의 뜻대로 결혼하도록 설득하려는 악마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그녀가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Napoli)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쿠마(Cuma)라는 마을에서 순교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그녀는 니코메디아의 성녀 율리아나 또는 쿠마의 성녀 율리아나로 불린다. 성녀 율리아나가 순교한 후 한 귀족 신자에 의해 그녀의 유해가 나폴리 인근 포추올리(Pozzuoli)로 옮겨졌다가, 568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유해를 지키기 위해 쿠마로 다시 옮겨졌다. 그녀의 수난기는 중세 시대에 널리 알려졌고, 특별히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에 의해 나폴리에 성녀를 기리는 성역이 조성되었다. 1207년 성녀의 유해가 장엄한 예식을 통해 나폴리로 이장되면서 나폴리 왕국 전체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프랑스 등 여러 지역으로 성녀 율리아나에 대한 공경이 확산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율리아나 (Juliana)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