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삶>
20세기 영국이 배출한 복음주의 진영의 위대한 두 설교자는 존 스토트와 마틴 로이드존스입니다. 제가 영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로이드 존스는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오래된 상태였고 존 스토트는 살아있었습니다.
몸이 쇠약해진 연고로 한 달에 한 번씩만 강단에 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활동하는 분야의 유명인 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
존 스토트가 강단에 서는 주일날, 캠브릿지 대학에 다니는 어여쁜 숙녀의 인도를 받아 아내와 함께 그 교회의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와 저런 귀한 목사님의 설교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니!”
그 날 존 스토트의 설교의 요지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구약에서는 물질적인 축복이 약속되어 있지만 신약에는 그런 물질적인 복이 영적인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연하자면, 복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난 인생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이미 충만히 맛보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마음에는 이런 설교 내용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과 사역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위에 물질적인 복을 허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복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성도들의 신앙적 경향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가시적인 것으로 확인 받으려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큰 문제입니다. 이런 심리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구체적인 표징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보통 이 지점에서 논리의 비약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시죠?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에 상응하는 구체적 증거를 내게 보여 주십시오” 이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기도원에도 올라가고, 금식도 감행하고, 작정 새벽기도회도 시작합니다.
이런 식의 신앙적 열심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지만 건전한 신앙적 방향이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믿음의 걸음은 이렇게 노골적이거나 천박하지 않았습니다.
찬송을 들어보십시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주님의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신앙의 걸음은 멈추지 않고 얼마든지 전진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복된 특징입니다.
“목사님. 예수 믿어 내 삶에 무엇이 유익한지 모르겠어요.” 한 집사님은 모질고도 서러운 경제적 현실 앞에서 비통의 눈물과 함께 솔직한 자기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정리로 볼 때 얼마나 공감이 되고 이해가 가는 말입니까?
생각보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이 신앙의 결과가 최소한의 삶의 여건은 보장해줘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연약함입니다.
저의 아들과 딸이 아기였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잠시 아내와 제가 자리를 비우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아들 녀석이 배설한 똥을 가지고 서로의 얼굴에 바르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미소가 한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은 똥을 찰흙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복이 되는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를 우리 삶에 부어주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은혜가 얼마 되지 않는 우리의 아이큐로 이해되고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될 때만이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체질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와 반면에 일정 부분의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신자의 안목과 인식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동시에 시각자체도 삐뚤어져 있고 왜곡되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터져 나오는 원망이 “예수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먼. 썅”입니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복이 아닌 것을 복이라고 기를 쓰고 우김과 동시에 온갖 불평과 원망을 다 쏟아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의 인생을 이렇게 초라하고 거지같이 인도하십니까?”
이해되지 않는 삶의 현실,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 증거,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고 있는 분명한 표징. 이 모든 것들이 없어도 감사의 노래로 자신의 인생을 채우면서 신앙의 걸음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인식능력 안에 가두어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큰 열심과 성실로 우리가 미쳐 확인하거나 보지 못하는 삶의 영역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안에서 가장 복되며, 안전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난 아직까지는 내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와 복을 주신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라고는 인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 동의가 되어 지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온 마음을 다해 항복하며 동의하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존 파이퍼의 이 귀하고 놀라운 고백을 소개합니다. “God is most glorified in us 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him” 영어 울렁증을 가지신 분들을 위해서 번역을 하자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 안에서 가장 큰 만족을 누릴 때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입니다.
삶의 초라함 때문에 울지 마십시오. 그러한 삶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넘치고 있는 복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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