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나도 한국인이기에 어느
정도까지는 예습과 복습의 필요가 없었고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한자를 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기에 항상 잠이 부족했습니다.
결국은 전차 속에서 잠을 자야했습니다.
매일 듣는 것이 일본어고 직장이 일본직장이고 집에서는 아이들이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한국어보다는 일본어가 많은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일본어 실력이 아주 빠른 속도로 불어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TV를 보게 되면 야구와 쓰모를 즐겨 보게 되었습니다. 말을 모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경기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일본어가 어느 정도 소통이 되면서 아, 하라 다츠노리,
지오노 후지네, 하면서 선수들의 근황까지 이야기 하게 되면 일본인들도
놀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주제라서 시청할 수
있는 TV프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나만 홀로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습니다.
“하야시 상, 고레네, 아지밎데 구레루”
한국 영사관, 대사관 직원들의 회식에서는 꼭 내게 맛을 봐 달라는 정도까지
되었을 때 명월관에서는 내게 정식 직원을 제의해 왔지만 ‘아니, 내가 누군가?’
하면서 퇴사하게 됩니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라 해야겠습니다
효성그룹의 한 주류인 대전 피혁 동경 지사에서 일하면서 나의 일본어는
다듬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장로교회에 출석을 했었는데 妻家가
순복음 동경 교회에 출석했기에 자연스럽게 함께 나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유명한 S교회, 반란(?)의 현장에 있었기도 했습니다. 한국 본부의 소환을 거부한
담임 목사가 하루 밤 사이에 간판을 내리고 동경 중앙교회라고 간판을 바꾼
사건입니다. 그 원인을 지금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목사님들이
자신만을 대제사장으로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제사장은
맞는 말인데 구약의 대제사장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한국인 교회에서의
각종 다툼은 그칠 수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저 같이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가장
먼저 담임 목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야시 상, 어디 출신입니까”
“한번 맞춰보시죠”
“도쿄, 사이다마, 가나가와껭, 도찌기...”
이런 정도까지가 되었기에 말에 대한 안타까움은 별로 없었습니다.
내 자신의 Visa를 연기하는 서류를 작성하다 보니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이
좋아하는 문귀도 알게 되었기에 유학 온 학생들의 Visa 연장 서류를 많이
작성해 준 기억이 납니다만 “ 저 사람 조심해, 왜 돈도 받지 않고 저렇게
친절하게 하는지, 혹시 조총련 아냐?“ 뒷머리를 때리는 황당한 말소리를
듣고 졸도할 기분이 된 때도 있습니다.
착한 민족, 베푸는 민족, 인심 좋고 친절한 민족, 예의 바른 민족, 그래서
타골은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던가! 오늘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새삼스럽게
한국인의 정서를 생각해 봅니다. 그 좋았던 후한 인심, 친절은 어디로 갔는가?
교회는 다른 것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잃어버린 땅, 낙원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교회가 아닐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그
처음 인간이 갖고 있던 순수함을 찾도록 인도해 주는 곳이 교회가 아닐까 하고
수없이 자문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간판 사건 이후로 그 교회를 떠나서
시부야에 개척된 복음 교회(김 충모 목사)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L.A에서
술을 팔면서 마셔대던 분이 어느 날 술을 끊게 되고 은혜 속에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일본 선교를 위해 도쿄에 부임하신 분이십니다. 처음이고 뒤늦게 목회를 하시는 상태에서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고 봅니다. 3년 정도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지금까지 가족처럼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박 영기 선교사님(혹까이도 신삿포로 성서 교회 담임)을 만나게
되면서 교회를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교회로 옮기니 기분이 좋습니까?”
김 충모 목사의 음성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아마도 대단히 섭섭하셨을 것이라고...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 실감되는 그런 질책입니다. 지금은 하늘 나라에
가셨지만 이 분이 그 유명하다는 온누리 교회의 선교사에 한 획을 크게 그은 분으로
김 사무엘 목사님이십니다.
절대로
철새처럼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겨 다닌 것은 아닙니다.
박 영기 선교사님의 교회로 가게 된 것은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가벼운 중풍 증세가
있으셨고 원거리를 이동하시기가 불편했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한 사람의 성도가
얼마나 힘이 되고 중요한지 제가 지금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이기에 그 때 그 분의
그 심정을 너무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아무 부담도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지만 역사에서 가정이 존재할 수
없듯이 개인의 생애도 흘러간 후에서의 가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겠기에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는 일본어 학교를 마쳤고
직장과 집, 교회, 이렇게 삼각형을 잇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죽구의 호쿠보 도리라고 기억되는데 길을 걷다가 문득
‘나는 이렇게 죽을 수가 없어, 이대로는 억울 해!‘
하는 외침이 아주 크게 크게 머리를 때렸습니다. 깜짝 놀랬습니다.
첫댓글 선교사님 모든 것을 수취거절 해 놓으시고 회신을 요구하셨군요 빨리 받지 않음을 해제해 주세요. 카페 지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