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혜정광경성목, 현덕정문순선헌, 숙예인의명신희, 강고원충선숙혜, 목정공우창공.
제14대 헌종실록
1.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
(1084년-1097년, 재위기간 : 1094년 5월-1095년 10월, 1년 5개월)
선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자신의 11세 된 어린 아들 욱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렇게 되자 왕권은 자연히 사숙태후
이씨에게로 넘어가 섭정이 시작된다.하지만 태후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헌종(獻宗)은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태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욱(昱)이다. 1094
년 5월 선종이 서거하자 그 유언에 따라 중광전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14대 왕에 올랐다.
11세의 어린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소갈증(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하였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 명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 선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계림공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선종이 자신의 병약한 아들에게 선위해버린 것이다. 덕종, 정
종, 순종 등이 이미 어린 아들보다는 동생에게 선위한 것을 보아왔던 신하들은 선종이 어린 아들에게 선위한 사실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왕위를 노리고 있던 계림공 왕희를 비롯한 선종의 동생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헌종 즉위 당시에 살아있던 선종의 동생은 계림공 왕희를 비롯하여 대각국사 의천,조선공 왕도, 상안공 왕수, 보응승
통 왕규. 부여공 왕수, 진한후 왕유 등 모두 일곱명이었다. 이 중에서 대각국사 의천과 보응승통 왕규는 이미 승려의
몸이었기 때문에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았고, 나머지 다섯 명이 편을 갈라 세력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들 다섯 명은
다시 인예왕후 이씨 소생과 인경현비 이씨 소생으로 나뉘졌는데,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는 왕희와 상안공 왕수가 있
었고, 인경현비 소생으로는 왕도, 부여공 왕수, 왕유가 있었다. 그러나 서열상으로 보나 대의명분으로 보나 선종의 동
복동생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왕희가 가장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대신들도 왕희를 추종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런 가운데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모후 사숙태후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
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헌종은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지고, 앓아오던 소갈증도 심해졌다. 이것을 기화로 선종의 제3비
원신궁주 소생으로 하여금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원신궁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큰아들이
한산후 왕윤이었다.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는 왕윤을 차기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자의는 인주 이씨로 사숙태후와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는 호부상서로 있다가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중추원사로
승격되었으며,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인주 이씨 가문이 그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왕숙이라고 해
도 어쩔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자의는 세력가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사병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왕희를 지칭하며 “왕이 병이 들어 언제
세상을 하직할지 모르는데, 대궐 밖에서 왕위를 엿보는 자가 있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리고 한산후 왕윤을 받들어 옥
새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외척과 왕실간의 왕위쟁탈전 양상을 띨 수 밖에 없었고, 왕실을 대표하는 헌종의 숙부 왕희와 외척을
대표하는 이자의의 힘 대결이 불가피해 졌다. 병상에 누워 있는 어린 왕은 그들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
린 나이에 이미 소갈증을 앓고 있는 헌종을 내쫓는 것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자희와 왕희의 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신하들도 두 편으로 갈라졌다. 평장사 소태보를 비롯한 상장
군 왕국모 등 대부분의 원로들이 왕실편에 서 있었고, 인주 이씨 세력을 포함한 평장사 이자위, 합문지후 장중, 중랑장
곽희, 장군 택춘 등은 외척편에 서 있었다. 두 세력 중 어느쪽이라도 기회만 닿으면 여지없이 상대편을 쳐야만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두 세력 중 선수를 친 쪽은 왕실 세력이었다. 1095년 7월 경신일 밤, 왕희는 은밀히 평장사 소태보를 찾아가 군사를
동원하여 이자의 세력을 척결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소태보는 상장군 왕국모에게 사람을 보내 이자의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으니 궁중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왕을 호위해줄 것을 당부한다, 소태보의 연락을 받은 왕국모는 많은 군
사를 이끌고 가면 양측간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우선 장사 고의화에게 약간의 군사를 내주어 이자의를
암살할 것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고의화는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진입하여 궐내에 머무르고 있던 이자의를 선정문 근처에서 발견하여
죽이고, 그의 수하 합문지후 장중, 중추원 당후관 최충백 등을 선정문 밖에서 살해한다. 또 부하들을 이자의 집으로 보
내 그의 아들 이작과 흥왕사 대사 지소를 죽였다. 이때 이자의 편에 섰던 장군 택춘, 중랑장 곽희. 별장 성보와 성국,
교위 노점, 대정 배신 등 17명이 체포되어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자의를 비롯한 그의 수하들의 모두 살해되자 권력은 왕희와 소태보 등의 왕실세력이 장악했다. 그리고 곧 대대적
인 숙청작업이 감행되었다. 이자의 편에 섰던 평장사 이자위를 비롯한 50여명의 대신들이 모두 유배되었고, 원신궁주
와 한산후 왕윤, 그리고 그의 두 동생들도 모두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 고의화-전주 고산현(지금의 전라북도 완주)출신.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무관으로 진출,대정(무관 품외직으로 경군
의 2군 6위의 종9품 하급지휘관이다. 1000명으로 구성된 1령에는 40명의 대정이 있었다.이들은 25명으로 구성된 단위
부대인 대(隊)의 장(長)이다.)이 되었다. 헌종 초에 왕위계승 다툼에서 한산후 왕균을 받드는 이자의를 참살하고 계림공
(숙종)의 즉위를 도왔다. 그 공으로 산원(1령에 5명)이 되고, 1105년(예종 즉위년)엔 용호군상장군 형부상서에 임명되었
다.1108년(예종3년) 병부상서로 1114년 우복야 응양군상장군르로 임명되었으며,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병부사에 이르렀
다.1117년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위사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자의 세력이 척결되자 계림공 왕희는 중서령에 임명되어 차기 왕으로 오를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렇게 되자 백관
들은 궁궐을 비워놓고 그의 자택으로 달려가 국사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또한 왕희의 주도로 대대적인 조정개편도 이
뤄졌다. 소태부를 특진수사도판이부사, 감상기와 유석을 중서시랑 및 중서문하시랑 평장사로, 임개를 수사공상서죄복야
판호부사로, 왕국모를 우복야 참지정사 판 병부사주국으로, 황종각을 동지 중추원사로 세움으로써 조정은 일순간에 왕
희의 지지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들은 이자의 세력을 몰아낼 때 세운 공으로 한결같이 두 가지 직책을 겸직하게
된 것이다.
조정의 백관들은 모두 왕희 지지세력으로 교체됨으로써 사숙태후와 헌종은 도장이나 찍어주는 허수아비로 전략했다.
그리고 1095년 10월, 왕희의 거사 3개월 만에 헌종은 스스로 물러나야만 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지병이 약화되어 스
스로 선위하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명백히 왕위찬탈이었다. 이것은 헌종이 물러나면서 남긴 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왕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한 관계로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력가들에게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
며 역적 난신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
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
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나는 후궁으로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이 조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헌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백관들 역시 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에서 헌종이 왕위를 고집한다는 것은ㅇ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백관들의 압력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으리므로 헌
조의 모후 사숙태후는 병약한 어린 왕과 함께 후궁으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후궁으로 물러앉은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병명은 소갈증이었지만 그
이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사숙태후-경원이씨 (인주이씨.인천이씨) 이자연의 3남인 공부상서 이석의 딸이다. 문종의 차남인 국원공과 혼인하였
다. 문종의 장남 순종이 급사하자 국원공이 왕위에 올라(선종) 그녀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의 어머니이며 1094년에
헌종이 11세로 즉위하자 왕태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헌종이 재위한지 1년 5개월만에 숙부인 숙종에게 선위하자 그녀
는 헌종과 함께 전에 살았던 흥성궁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헌종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고대 중국의 하우씨(하나라 우왕)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은 후세의 찬역을 염려한 조치였던 바 그 후 유복자를
임금으로 세워 곤룡포를 입혀놓아도 세상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끼리 서로 왕위를 전해서 순종에게까지 미쳤으나, 순종이 거상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일찍 죽
고 아들이 없어서 선종에게 선위했으며, 선종이 죽은 다음 태자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가 헌종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서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받은 데 익숙해져 있어서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면서 이것만을 잘못으로 여기니 어찌 그렇게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근친 중에 주공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 나랏일을 맡아 보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운이 위태롭고 정치가 어지럽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보좌하
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 후세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어서 강보에 싸인 유아에게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맡기데 될 때
에는 이것으로써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즉, 옛날의 주나라 주공이나, 전한의 곽광의 예를 잘 따라야 한다는 것).
헌종의 능은 개성 동쪽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은릉이다. 그는 결혼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처자가 없었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