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자기계발서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행복’이란 주제를 인문학의 핵심 사상인 철학, 종교, 역사의 관점에서 성찰한 최초의 책이다. 행복을 합리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철학까지, 천지창조에서 오늘날의 기독교까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에서 21세기 대중소비사회까지, 행복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며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 행복의 본질과 가치, 개념을 탐구한다.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세 명의 학자가 대담 형식으로 풀어놓은 행복론은 일반인에게도 쉽고 명확하게 다가가기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행복하게 해준다는 ‘방법’만을 찾아 ‘허무의 주막’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저자 : 앙드레 콩트 스퐁빌
저자 앙드레 콩트 스퐁빌(Andre Compte-Sponville)은 윤리학과 행복에 관한 책을 다수 펴낸 철학자이다. 파리1대학에서 부교수로 재직했고, 현재는 집필과 대중강연에 집중하고 있다.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탁월한 안내자’로서 인기 있는 대중강연자로 자리 잡았다. 2008년부터는 프랑스 국가윤리자문위원회 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미덕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절망과 지복에 관한 논고》, 《사랑과 고독》, 《가치와 진리》, 《필사적인 행복》, 《인생》 등이 있다.
저자 : 장 들뤼모(Jean Delumeau)
르네상스 시대와 기독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사학자이다. 프랑스 고등연구원, 에콜 폴리테크니크, 파리1대학 등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명예교수이자 금석학·문학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천국의 역사 1, 2, 3》, 《종교와 인간》, 《천국》, 《루터와 볼테르 사이의 가톨릭》 등이 있다.
저자 :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
18세기 프랑스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이사로 재직 중이다. 미셸 푸코와 다양한 책을 공저하며 저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불안의 삶: 18세기 파리의 폭력·권력·연대》, 《거리에 살다: 18세기 파리 인류학》, 《말과 험담: 18세기의 여론》, 《가족의 무질서》(미셸 푸코 공저) 등이 있다.
역자 : 이소영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통번역대학원(ESIT)에서 수학했다. 대전프랑스문화원 통번역팀장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국내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경쟁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자들의 제안》, 《좋은 부모의 용기 있는 한마디, 안 돼!》, 《빠리 언니들》, 《나쁜 딸 루이즈》, 《원자력, 대안은 없다》, 《사치와 문명》,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전지전능한 할머니가 죽었다》가 있다.
머리말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
1부 행복 발견의 대가들
1장 소크라테스 혁명의 도래
그리고 그가 왔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다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
참고 삼가라
극단적인 현자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제3의 길
행복할 자격
악인을 위한 행복?
2장 언제나 바라고 더 바라다
홉스처럼 생각하고 에피쿠로스처럼 살자
욕구만으로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파스칼의 천재성
3장 행복의 패러독스
불행의 부재
삶의 의미
기뻐하는 법 배우기
계속 살아 있으려면
2부 믿어라, 그러면 얻을 것이니
4장 하늘로 올라간 행복
에덴동산
영원한 행복
예루살렘 천성
5장 변화무쌍한 낙원
천상의 궁궐
천사들의 음악
언제나 더 높게, 더 아름답게
낙원은 우리 안에 있다
더 이상 이전의 천국은 없다
6장 신자와 비신자의 악수
택함받은 자들의 모임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타락한 무리
다른 이들을 위한 지옥
삶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희망의 문
신자들의 아편
3부 평등한 세상을 꿈꾸다
7장 귀족의 쾌락과 서민의 쾌락
쾌락의 효능
박식한 ‘리베르탱’
민중의 행복
행복은 초원에
타인의 불행
쾌락의 제어
8장 기묘하고 잡다한 것을 위하여
경이로움에 대한 취향
수호성인 축제와 코코아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기술
9장 만인을 위한 행복
존재할 권리
행복의 전제정치
맺음말 지금, 우리의 행복은?
18세기에는 있고 지금은 없는 것
낙원은 저 너머에
고대의 지혜로 되돌아가다
찾아보기
행복,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좋은 삶’이란 물음에 실마리를 던져줄 프랑스 대표 석학 3인의 명징한 탐구!
순수인문학으로 성찰한 행복의 본질과 가치!
그동안 자기계발서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온 ‘행복’이란 주제를 인문학의 핵심 사상인 철학, 종교, 역사의 관점에서 성찰한 최초의 책이다. 행복을 합리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철학까지, 천지창조에서 오늘날의 기독교까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에서 21세기 대중소비사회까지, 행복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며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 행복의 본질과 가치, 개념을 탐구한다.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세 명의 학자가 대담 형식으로 풀어놓은 행복론은 일반인에게도 쉽고 명확하게 다가가기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행복하게 해준다는 ‘방법’만을 찾아 ‘허무의 주막’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인간 정신의 집약체, 철학. 삶의 궁극적 의미 추구 체계, 종교. 인류 변천 과정의 기록, 역사.
인문학의 핵심 사상이 만나 새롭게 창조한 통합적 행복론!
‘행복’과 ‘힐링’에 빠진 대한민국을 돌아보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은 곧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불특정다수를 향한 칼부림, 아동 성폭행, 왕따, 친족살해, 주폭酒暴, 치솟는 물가, 쌓여가는 빚, 청년실업, 명예퇴직, 비정규직, 입시 스트레스 등 무간지옥과 같은 우리 사회를 보면 ‘행복을 갈망하는 일’이 당연해 보인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행복의 요건으로 돈, 성공, 명예, 사랑 등을 꼽는다. 그래서 돈을 벌고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이야기에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나 《시크릿》 같은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성공의 문턱에 진입한 듯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2012년을 강타한 ‘힐링’ 코드 또한 행복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너도나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펴들고 마음의 위안을 얻어 궁극의 행복에 이르고자 했다. 그런데 그렇게 소유하고 싶은 행복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행복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일까? 혹시 본질은 모르면서 ‘방법론’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도 정확히 모르기에 더 매력적인 그것
인간은 수천 년 동안 행복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왔지만 아직도 행복이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잡힐 듯 말 듯, 알 듯 모를 듯한 행복은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도 정확히 모르는 것에 관하여》는 그 해답으로 인문학의 기본인 철학, 종교, 역사를 제시한다.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처음, 혹은 기본으로 돌아간다. 철학, 종교, 역사는 행복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한 고대부터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행복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며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 행복의 본질과 가치, 개념과 변화를 탐구한다.
행복은 어떻게 철학의 운명과 엮이게 되었나?
대중강연과 집필을 통해 널리 이름을 알린 철학자이자 프랑스 국가윤리자문위원회 회원이기도 한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고대 사상에서 시작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추구한 행복은 무엇인지 살펴보며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홉스, 파스칼, 몽테뉴, 스피노자 등 철학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사상가들이 행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적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동안 ‘자연’이라는 원초적 차원에 머물렀던 철학의 관심을 ‘나’와 ‘인간’으로 이동시키며 지성의 혁명을 일으켰다. 인류의 탄생 이후 늘 존재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이 행복을 자각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고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소크라테스 혁명의 의의를 짚으며 인간과 철학, 행복이 어떻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는지 알려준다. 또한 ‘행복하게 살려면 쾌락을 추구하며 삶의 매 순간을 즐겨야 할까, 아니면 성공을 향해 달려가면서 무모한 열정에 도취돼야 할까?’, ‘행복을 포기한다는 말은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뜻일까?’, ‘사람들은 왜 행복해져야 한다는 과제를 부과하는 것일까?’와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 해답을 모색한다.
내세의 낙원에서 지금 이곳에서의 행복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명예교수이자 종교사 전문가인 장 들뤼모는 서양의 기독교에서 낙원의 형태를 띠게 된 행복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겪는 현재의 모든 두려움을 위로하고 영원한 기쁨을 바라게 했는지 보여준다. 죽음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한 행복을 꿈꿀 수 없고, 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보다 평균수명이 짧고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늘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껴야 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세상을 경이로운 에덴동산, 모든 목마름과 배고픔, 고통이 사라진 곳,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곳으로 변화시키며 이러한 낙원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고자 했다.
평균수명이 80세가 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21세기 사람들은 죽음을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 혹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로 여기며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종교는 내세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바라는 기복 신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정치적 형태로 나타난 행복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 소장이자 18세기 풍속 전문가인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내려온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킨 18세기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꿈꾸고 각자 행복할 권리, 즉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할 권리를 갖춘 행복한 정치 조직을 열망했다. 이때부터 행복은 말하고 교류하며 발견하고 논쟁하는 기쁨으로 이루어진 삶의 기술이 되었다. 이런 행복은 진한 코코아 향기를 풍기거나 성적인 자유, 위험한 치정관계의 유희에서 비롯된 아찔한 냄새를 발산했다. 이처럼 아를레트 파르주는 역사를 통해 행복의 변천과 점진적인 세속화 과정을 탐구하고 현대 사회 속에서 행복이 차지하는 보다 큰 의미를 보여준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행복에 관하여
행복은 한순간도 고정된 무엇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에 따라 무한한 행복이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고대 철학자들은 행복을 한정적으로 정의했다. 현재 사람들은 현세에서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과거 사람들은 영원한 내세의 행복을 믿었다. 21세기에 행복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일이 되었지만 18세기에 행복은 모두가 나누는 행복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행복의 특성 때문에,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행복이란 것을 얻기 위한 확실한 방법이란 것도 존재하기 어려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행복의 본질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생의 충동을 되찾아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 가진 진정한 힘일 것이다.
‘좋은 삶’이란 물음에 실마리를 던져줄 프랑스 대표 석학 3인의 명징한 탐구.
어둠과 부조리의 시대를 깨칠 살아 있는 지성과의 대화.
사람들은 인문학, 특히 철학과 역사라고 하면 골치 아픈 학문이라고 생각하거나 종교를 거론하면 거부감부터 갖는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이 프랑스 학자들은 대담 형식을 통해 전문 지식을 일반인이 거부감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술술 풀어놓는다. 우선 앙드레 콩트 스퐁빌은 우리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수많은 사상가의 행복론을 정리한다. 대표적으로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의 주장을 그가 어떻게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분류에서 욕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것, 자연스럽긴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 자연스럽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나뉩니다. 자연스럽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에는 명예나 부, 권력 등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아무리 가져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돈, 권력, 명예를 갈망하면 제 발로 불만족의 늪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연스럽긴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욕구에는 성욕이나 미적 욕구, 식도락 욕구가 있습니다. 이들 욕구는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욕구는 생명이나 신체 유지, 영혼의 안위를 위한 욕구입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것만 원할 경우 최대한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는 빵 한 조각이나 물 한 잔에서도 극도의 쾌락을 느끼는 데 반해, 방탕한 사람은 끝없는 향연으로 배를 가득 채워도 욕구를 채우지 못합니다. (34~36쪽)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욕구, 심지어 자연스럽긴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욕구도 아닌, 자연스럽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에 매달려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스토아주의는 자신의 뜻에 좌우되는 것을 원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을 원한다는 이분법을 주장합니다. 만약 자신의 뜻에 좌우되지 않는 것을 원한다면, 예를 들어 건강하다거나 아름다워진다거나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행복을 우연에 종속시키게 됩니다. 이 경우 바이러스나 경제 위기, 사고처럼 자신의 뜻에 좌우되지 않는 것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반대로 자신의 뜻에 좌우되는 것을 원하면 욕구는 늘 충족되기 마련입니다. 가령 몸이 아프다고 해봅시다. 이때 건강해지기를 바라면 불행해지는데 이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을 돌보고 치료받기를 바라면 자유로운 동시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또 자신이 하는 것을 바라므로 욕구가 완벽히 충족되기 때문이죠. (40~41쪽)
스토아주의는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바라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을 바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학파는 욕망, 쾌락, 미덕, 의지 등과 관련해 매우 훌륭한 통찰을 보이지만 일반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극단적인 혹은 교조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에피쿠로스주의자와 스토아주의자는 삶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합니다. 자식이 불치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다면 부모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스토아주의자라면 아이가 건강해지기를 바라지 말고, 오직 부모 자신의 뜻에 좌우되는 것만 바라라고 대답하겠죠. 그러면 그 무엇도 행복해지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댁이나 잘하세요!”라고 대답하고 싶겠죠.
에피쿠로스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는 자녀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욕구가 아니기에 그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겠죠. 역시 “댁도 만만치 않으시네요”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 두 지혜는 도덕적 극단주의입니다. (45~46쪽)
앙드레 콩트 스퐁빌이 행복에 대한 철학의 경주를 흥미롭게 서술했다면 장 들뤼모는 기독교에서 낙원의 형태로 구현된 행복의 변화를 짚어가며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 또한 종교 안에서 어떻게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은 지상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의 실현입니다. (…) 제가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은 천국을 믿지 않더라도 유골함이나 무덤 앞에서 묵상하는 행위는 가까운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생각과 추억을 통해 죽은 이들과 다시 만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침묵과 기억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재회가 내세에서는 현실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삽니다. 소중한 이들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열망은 어떤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인 미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적인 미래입니다. 어찌 보면 이 열망은 신자와 비신자가 가까워지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무덤 주위에 모여 침묵으로부터 고인을 이끌어내고, 사랑했던 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 또한 벗어나게 되니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민중적인’ 종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지배계층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115~116쪽)
마지막으로 역사학자인 아를레트 파르주는 사람들이 행복과 그 실현의 문제를 하나의 신앙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다시 현실에 발 딛게 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1656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둬놓는 대감호大監護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자리를 찾으려고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던 떠돌이 집단을 차단하려는 의도였죠. 막대한 수에 달했던 이 집단은 무지하고 제어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군대에서 탈영하거나 가족을 더 이상 부양하지 못해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구걸은 심각한 혼란을 일으키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치밀한 조직을 갖추어 이 행위를 감시하고 제지해야 했습니다. 이 경찰 조직은 가난한 이들을 가둬놓는 병원과 이들의 존재를 지우고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한 감옥에 투입됐습니다. 이렇게 하면 도시 풍경을 정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배계층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이 야기하는 혼란을 막기보다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비세트르 병원이나 살페트리에르 병원 같은 대형 병원은 모두 이런 식으로 설립된 것입니다. 이곳에 환자, 광인, 가난한 사람, 일탈자를 가두는 의도는 늘 동일했습니다. 이들이 눈에 띄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었죠. 이렇게 감시와 통제를 감행한 동기는 분명 행복에 대한 개념에 있습니다. (157~159쪽)
17세기에 일어난 이 대감호 사건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과거 프랑스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국제적인 행사가 열릴 때면 지하철역에서 노숙자를 쫓아내는 것이 대표적이며, 얼마 전 중국 장시성에서 열린 지역 축제 기간 중에는 관광객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구걸하는 사람들을 철창에 가둬두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정책을 펴는 이들은 누군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불평등을 경험했던 18세기 사람들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행복을 평등의 개념 속에서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18세기 장인들이 추구했던 행복의 모습을 살펴보자. 대혁명 발발 당시를 현재 우리나라로 바꾸고 장인을 소시민으로, 귀족을 부자로 바꾸면 지금 우리의 상황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대혁명 발발 당시에 살던 사람들이 꿈꾸던 행복은 돈을 아끼고 씀씀이를 줄여 재산을 모음으로써 평균적이고 ‘평범한’ 삶을 유지하고자 했던 대상인이나 유명한 장인의 행복이었습니다. 이 행복은 경제적인 미덕, 즉 음울하고 계산적이며 합리적인 미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장인은 귀족에 대한 열등감을 품은 채 이들 계층이 누리는 향락과 화려한 삶, 소비를 선망했습니다. 그는 자기 처지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자신의 행복을 일궈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호사를 부러워하지만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근근이’ 살아가는 발자크 소설의 인물들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185~186쪽)
우리는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며 다양하게 변주되어온 행복의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은 무엇이고, 좀 더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될 것이다. 어리석고 불합리한 인간을 이해하고, 고통과 절망을 포함한 행복을 받아들이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고된 인생을 헤쳐 나가는 한 방법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쾌락은 무엇이든 그 자체로 선이지만, 모든 쾌락의 가치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족보다 고통을 더 많이 안겨주는 쾌락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알코올중독자의 쾌락은 쾌락이 맞지만(술을 마시며 즐기기는 하니까요), 알코올중독은 만족보다 고통을 더 많이 경험하게 합니다. 반대로 고통은 무엇이든 그 자체로 괴롭지만, 모든 고통을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에 쾌락이 이어지거나 다른 더 큰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고통도 있기 때문이죠.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는 것은 대개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충치 탓에 몇 년 동안 끙끙대는 것보다는 덜 괴로운 일이니 말입니다. (33쪽)
고통과 불행에는 수용과 투쟁만 내세울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갑니다. 불행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맞서 싸울 수단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행에 맞서 싸우는 것도 이미 행복한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불행의 경험과 우울의 경험이 지니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에서 (정신질환적 의미에서의) 우울증 환자는 ‘사랑하는 능력’, 즉 기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불행하지만 우울증을 앓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기에 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신이 불행과 벌이는 싸움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행복할 때만, 행복을 조건으로 할 때만 삶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복이든 불행이든, 쾌락이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삶 전체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저항하고 버티는 그 무엇이, 사랑의 힘을 발휘하는 그 무엇이, 우리가 사랑하는 그 무엇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울증이 자살로 이끈다면 삶을 사랑하는 능력이 사라졌거나 극도로 약해진 탓입니다. 이를테면 현실에서 지독하게 상처를 받았거나(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 고통과 슬픔에 압도당해서 그렇습니다. 이 경우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때때로 엄습해오는 끔찍한 불안이나 고통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런 증상은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정신 건강 상태가 어떠한지 대략적으로 말해줍니다. 즐기고 기뻐할 수 있게, 삶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삶에 대한 의욕이기 때문입니다. (87~88쪽)
낙원과 지옥은 멀지 않았습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아기 네 명 중 한 명이 다섯 살도 채우지 못한 채 사망했고, 두 명 중 한 명은 스무 살까지 살지도 못했습니다. 성인의 사망률도 지금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여기에 페스트로 인한 집단사가 더해지면서 사망률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흑사병이라고도 불린 이 페스트는 3년(1348~1350) 만에 유럽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후 1630년에는 밀라노에서, 1656년에는 나폴리에서 그리고 1720년에는 마르세유에서 페스트가 유행해 여름 두세 달 만에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마르세유에서는 주민 12만 명 중 6만 명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또 성 뱅상 드 폴Saint Vincent de Paul이 살던 시대에는 파리 거리에서 굶어죽은 사람을 보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페스트라는 전염병 때문에 대개 운명론자로 살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 너머의 세상, 즉 이승 이후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136~137쪽)
-18세기에 파리 같은 도시에서 누리던 쾌락을 묘사하려면 무엇을 언급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축제라는 집단 오락을 들 수 있습니다. 베르사유에서 벌어진 성대한 축제가 되었든, 퐁 마리나 퐁 뇌프 다리에서 열린 소박하고 서민적인 축제가 되었든 말입니다. 휴일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음악과 불꽃놀이를 즐기고 곰 조련사와 열기구를 구경했으며, 센 강에서 바퀴가 달린 신기한 배를 타기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행복은 감각적 쾌락이나 발견의 즐거움과 관련이 있었죠. 이렇게 열광하는 순간에 귀족들은 서민들과 뒤섞여 똑같은 호기심에 들떴습니다.
18세기는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모든 것이 구경거리로 제공되는 시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파리는 한몫 잡으려는 이들이 꼭 가야 하는 신기루 같은 도시였습니다. 동시에 사람을 억누르고 불행을 안겨주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면서도 밀쳐내는 도시였다고나 할까요. 이 도시는 모든 사회계층에게 강렬한 이율배반의 감정을 부여했습니다. 당시 귀족계층은 대개 시골에 살면서 편하게 여행을 즐겼습니다. 지식인들 역시 외국, 특히 러시아와 꾸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사람들은 낙원 같은 장소를 꿈꾸
첫댓글 앙드레 콩트 스퐁빌 , 장 들뤼모 ,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 역자 이소영 옮김 / 역자평점 9.5 / 출판사 생각연구소 | 2012.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