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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n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임과 동시에 진리에로 그리고 자유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에 응답의 첫걸음은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을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이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전에 말씀드린 바 있어 제가 어떻게 강론을 준비하는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새벽 강론을 올린 다음 바로 다음 날 독서와 복음을 읽고 하루 내내 독서와 복음을 가지고 묵상하고 다음 날 새벽 강론을 완성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제도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주제를 자유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는데 어제 안 보이던 나무의 새순들이 보였고, 순간 ‘나무는 자유롭고 꽃은 자유로운가?’하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나무와 꽃은 자유롭지 않고 자유가 없다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나오고 싶을 때 나오고 싫으면 나오지 않을 수 있지만, 나무는 자기가 내고 싶을 때 새순을 낼 수 없고, 꽃은 자기가 피고 싶을 때 필 수 없으며, 사람이 머리를 물들이듯 꽃이 다른 색 꽃을 피울 수 없잖아요?
정해진 때에 피고, 정해진 모습을 핍니다.
그대로 피지 않으면 그것이 자유라고 하지 않고 돌연변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샛노란 개나리와 수선화꽃이.
야리야리 연보라 진달래꽃이.
귀부인 목련꽃은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습니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아름다운 머리를 괴상하게 물들이기도 하지만 비구니의 머리처럼 파르라니 삭발할 수도 있지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옷으로 숨기려 했지만 요한처럼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을 수도 있고, 회개하는 사람들처럼 회색 옷을 입을 수도 있지요.
꽃은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여 아름답지만, 사람은 죄지을 자유로 사랑하니 아름답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자유로 사랑하는 것도 아름답다는 말이고, 자유로 진리에 순종하고 자유로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더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사랑 안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세 청년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뜨거운 불가마도 그들을 가두거나 억누를 수 없었고, 불가마 안에서 주님과 자유로이 거닐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 안에 머물면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사랑으로 더 자유로운 우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사랑을 안다면 그냥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라 2,20)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않았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10,30).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 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실행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 1,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여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 그리고 그 세력이 가져온 죽음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경청하고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야 합니다.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랑의 메시지인 성경,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과 성경을 공부만 하는 사람의 차이는 실로 엄청납니다.”
(요하네스 타울러)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야고 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넌 내 마음 몰라.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내 마음 몰라.
떨리면서 떨리지 않는 척하는 내 마음 몰라.
겉으로는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열병을 앓고 있는 내 마음 몰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나를 아는 분은 누굴까?
참새 마음은 참새가 알고, 비둘기 마음은 비둘기가 안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속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저를 알고, 저도 주님을 압니다.’하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는 이유>
6·25 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 중 60명이 정원인 배에 피란민 1만 4,000명을 구한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선장의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라루 선장은 전쟁을 겪은 뒤인 1954년 20년간 생활한 바다를 등지고 마리누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베네딕도회에 들어갑니다.
12월 23일 흥남 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수많은 기뢰가 있던 동해를 항해했지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주님 성탄 대축일인 25일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렀습니다.
항해하는 이틀 동안 배 안에서 아기 5명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구조된 1만 4,000명의 후손은 현재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의 부모도 이 배를 타고 거제도에 왔었습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수도원에 들어갔을까요?
이웃 사랑을 포기한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새로 정해야 합니다.
부모는 나의 존재 이유입니다.
따라서 사춘기까지 육체적인 부모가 생존만을 강조했다면, 사춘기가 된 아이는 이제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과 같은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이 자기 삶의 방식과 맞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 사람들에게 추앙받기를 원할 때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자 그렇게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수도회를 설립합니다.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원의가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의대로 아버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 등이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는 창조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론도 다 창조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을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를 따릅니다.
자연의 이치는 생존입니다.
하지만 나의 생존은 역시 정글의 법칙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법칙입니다.
생존욕구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결국 인간이 믿는 아버지는 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나 아니면, 자연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였다면 하느님은 부모처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춘기가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게 되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을 적합하게 해 주는 종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도 자연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창조론처럼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각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정당하게 해 줄 아버지를 찾는 방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는 결단, 그것이 더 큰 행복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는 신앙 생활은 거짓이 됩니다.
실제로는 내가 섬기는 사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이용하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기 전에 내가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줌으로써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거짓은 나를 관계의 행복보다는 생존의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사춘기가 되어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게 됩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여 그 뜻을 따르게 되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서 그분을 아버지로 선택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항상 나를 떠받치고 계시는 주님>
요즘 참된 진리가 아닌 거짓 진리에 깊이 빠져 단 한번 뿐인 아까운 자신의 인생이 쫄딱 망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지라, 개인적으로 열심히 이단과 사이비 교주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혹세무민의 주범들인 사이비 교주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얼마나 웃기는 짬뽕들인지, 속으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 작자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사이비들이 득실대고 있다는 것은 우리 국민이 지금 처한 현실이 그만큼 암담하다는 반증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지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우리 가톨릭을 비롯한 기성 종교가 교인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표현입니다.
더욱 안타깝고 화가 나는 것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우리 수많은 착한 청춘들이 속절없이 사이비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악질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과대망상증 환자인 사이비 교주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딱 중심을 잡고 참 진리가 무엇인지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아침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은혜롭고 힘이 되는 한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장 31~32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진리가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진리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겠지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로서 그분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진리, 그분 안에 하느님에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진리, 그분 손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진리, 그분은 모든 율법과 계명 전체를 수렴하고 완성하신다는 진리, 그분은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이유라는 진리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수록 눈물겹고 감사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하느님이라는 진리,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챙기신다는 진리, 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윤곽이 잡히지 않는 멀고 먼 당신이 아니라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진리, 오늘도 내 바로 등 뒤에 서 계시면서 나를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 움직이신다는 진리, 내가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항상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결국 영원불변한 최종적인 진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님이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절친한 친구보다도 더 살갑고 다정다감하신 분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매일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대자유를 만끽하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려면 내 말 안에 머물러라.”인데, 이 말씀은 15장에 있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과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같은 일’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또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 사람은, 끝까지 노력해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멈추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인데, ‘깨닫다.’ 라는 말은 ‘앎’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은 곧 자유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온갖 억압과 압박에서 해방되어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억압과 압박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그래서 “죄와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 라는 말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14장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길’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걸어가신 그 길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걸어가신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4)
이 말씀은 ‘구원’과 ‘자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서 사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안식과 기쁨이 ‘참 자유’입니다.
‘구원과 참 자유’는 메시아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의 종’이 겪는 ‘부자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로마 7,18-25ㄱ)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마는” 바로 그 상태가 ‘죄의 종’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속에서 살면서도 전혀 부자유를 느끼지 않고, 비참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자유롭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주시는 도움도 거절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참 자유’를 얻지도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의 종’을 ‘죽음에 빠진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죄의 억압은 죽음의 억압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로마 5,12).
여기서 ‘죽음’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멸망’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집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루카 15,13)
여기서 ‘먼 고장, 방종한 생활, 허비’ 라는 말은 ‘죄’를 나타냅니다.
‘자기 것, 자기 재산’이라는 말은, 각자의 인생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사는 인간들은, 자기들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또 자기들은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내 인생이니 내 마음대로 살겠다.” 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쫓겨난 아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떠난 아들입니다.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방종한 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까 멀리 떠난 것인데, 바로 그것이 ‘죄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방종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을 ‘부자유’ 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유의 여정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그리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정치인, 여행가로 널리 알려진 ‘니코스 카찬차키스(1883-1957)’의 묘비명입니다.
그의 ‘영혼의 자서전’은 제가 평생 애독하는 책입니다.
<자유를 향한 머나 먼 여정>, 최초 흑인으로 남아프리카 대통령을 역임했던 위대한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으로 고 김대중 대통령이 번역했고, 역시 얼마전 감동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입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며 자유로워야 비로소 인간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울 때 행복합니다.
과연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역시 우리 삶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 “자유의 여정-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마디가 가슴 떨리게 합니다.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만35년 정주의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자유롭고 행복한가?” 자문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자유가 없다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예전 신자분과 주고 받은 대화가 생각납니다.
“여기 수도원이 천국입니다. 행복하시겠습니다.”
“자연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주님과의 관계가, 형제들과의 관계가 전혀 무관한 남남의 불편한 관계라면 거기가 지옥일 것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우정, 형제들과의 우정이 깊어져 자유로울 때 거기가 천국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여기 수도원의 늘 단조로운 일상에서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삽니까?”
“하느님 맛, 기도 맛, 말씀 맛으로 삽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진리를 깨달아 주님을 아는 맛으로 삽니다.”
지금 물어도 똑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늘 새 하늘과 새 땅, 새날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끊임없이 바꿔야 할 것은 외적환경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마음이 늘 새로우면 늘 새롭고 놀랍고 좋고 자유로운 만남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의 내적 여정의 삶일 때 행복한 정주의 삶입니다.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일 때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이런 자유는 다음 고백처럼 순전히 주님의 선물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이런 참된 자유가 선물임은 오늘 복음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 두 대목이 참 은혜롭습니다
참자유의 소재를 밝힙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말씀이자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와 더불어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자유의 여정은 진리 탐구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진리이신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자유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날마다의 제 강론 쓰기입니다.
참으로 깨달음을 통해 자유롭기 위해, 살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날마다 쓰는 강론이요, 살아 있는 그날까지 "미사드리는 것", “걷는 것”, “강론 쓰는 것” 셋만이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영원한 도반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런 주님과의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참으로 서로를 알아감이 없이는 참자유는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평생을 살아도 이런 진리이신 아드님을 만나지 못해 무지와 허무, 세상의 종이 되어 참자유의 맛도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주님의 진리 맛, 말씀 맛이 아니곤 영혼의 목마름, 배고픔은 결코 해결되지 못할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주님을 만날 때, 주님과 함께 할 때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의 불가마 속에서 열렬히 하느님께 찬미를 바치는 세 청년이 이의 모범입니다.
불타는 화덕속에서도 열렬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이 그대로 진리로 자유로워진 공동체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세 청년의 아름다운 찬미가가 많이 생략되었습니다만 우리 수도자들은 주일이나 축일 때는 이 세 청년이 바친 찬미가를 아침성무일도 시 바칩니다.
이 세 청년처럼 모두를 찬미로 바꿀 때 운명도 바뀌고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내 아픔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병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절망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불행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내 시련과 고통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찬미로 바칠 대상은 끝이 없습니다.
찬미에 기겁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하면 사탄은 멀리 달아납니다.
하느님 찬미가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바꿉니다.
새삼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공동체 형제들을 자유롭게 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찬미의 훈련, 자유의 훈련 시간이 공동전례기도 시간입니다.
제1독서 다니엘서의 불가마 속에는 세 청년만 있었던 게 아니라 주님의 천사도 있었듯이, 주님께서도 늘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함께 하시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 기도 은총이 불가마 연옥같은 세상에서, 공동체에서 크게 다치지 않고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마침내 네부카드네르 임금도 세 청년을 불가마 속에서 살려내신 하느님께 찬미의 고백을 바칩니다.
불가마 속의 이스라엘 세 청년이야 말로 찬미공동체의 모범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들을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
찬미와 감사의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주님의 종들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곤경에서 구해 내시어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대목에 등장하는 대상은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요한 8,31)입니다.
믿지 않는 바리사이들이나 최고의회 의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들에게 제자가 되는 길을, 그것도 "참으로"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기만 하면 된다네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육화하신 말씀이시기에, 말씀에 머무르는 이는 그분에게 깊이깊이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근본 정신과 뜻하시는 바와 말씀께서 나아가시는 방향을 감지하며 어렴풋이나마 진리를 인식하고 물들어 갑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게 진리를 접촉하고 맛보며 걸어가는 이는, 살고 사랑하고 일할 때 어느 조항, 어느 규정, 무슨 판례를 일일이 들춰가며 제 생각과 행동을 규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되신 분, 진리의 주인이시며 사랑이신 분의 무한한 품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듯 살아도 됩니다.
그것이 자유(自由)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또 사랑을 누릴 자유!
그것 말고 피조물에게 더한 행복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나마 당신을 믿던 유다인들마저 발끈하네요.
제자가 되라고 했더니 오히려 "자유"라는 말씀이 몹시 거슬린 듯합니다.
자신들이 따라가는 존재가 누구인지 모르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부끄럼 없이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요한 8,41)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 불쏘시개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요한 8,41)
놀랍게도 그들 입에서 엄청난 고백이 흘러나오네요.
그들이 자기 선조, 조상이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하는 수준을 넘어, 하느님을 직접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실 때의 관계성과 상호 이해, 친밀함에는 못 미치고, 그동안 예수님께서 설파하셨으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르침과 별반 다른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하느님 백성을 넘어 하느님의 자녀라고 임기응변이든, 진심이든 스스로 선포한 겁입니다.
참 놀랍지요?
독서에서는 자기를 신(神)으로 섬겨 경배하기를 거부하다가 불가마에 던져진 세 유다 청년이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말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다니 3,95)라고요.
놀라운 기적 앞에서 외친 이방인의 이 고백이 비록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앎과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입을 빌려 찬송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의 힘이고, 때가 차면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를 위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복음에서 비록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스스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라 시인하는 유다인들의 고백에서처럼 말입니다.
갑자기 등장한 이 "사생아"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미스테리한 출생에 대한 비아냥일 수도 있고, 과거 우상숭배로 불륜을 저지르면서 혼인 관계로 표상되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번번이 깨뜨린 조상들에게서 근본도 없이 태어난 후손이 아니라는 항변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 백성 한가운데 오신, 자기들 눈 앞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자기들의 하느님께 충실한 것이라고 믿고자 오히려 더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지요.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이처럼 믿지 않을 자유, 거부할 권리도 인정하십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그래도 믿어드렸던' 일부 유다인들은 오늘부로 마음을 돌릴 것 같습니다.
감히 자신들을 아브라함이나 하느님의 자손이 아닌, 죄의 종으로 규정하다니...
근본도 모르는 떠돌이 망상가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느님이 아버지시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다니...
이미 빛과 어둠이, 생명과 죽음이, 선과 악이 제 자리를 잡아 갈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전한 자유로 제 길을 택한 것입니다.
자기들을 움직이는 것이 누구의 힘인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르면서 그동안 지켜온 율법과 신념을 고수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자유,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주는 자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단서를 독서에서 만났습니다.
불가마에 던져지기 직전 세 유다 청년이 임금의 마지만 회유를 거부하면서 한 말, "그분께서 ... 저희를 구해내실 것입니다. ...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다니 3,17-18)라는 부분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제 안의 모든 바람에 대해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관대한 의탁과 허용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으니 결과가 어떻든, 자기가 바라던 것이든 아니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가장 좋은 걸 더 잘 알고 계시니 그분께서 해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나도 그게 좋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청하되 결과에 집착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자유란, '내 맘대로 할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 맘대로 하시도록 나를 활짝 펼쳐놓고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일 겁니다.
이 자유는 말씀에 머물러 진리와 접촉하는 이에게 가능합니다.
이런 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께서 가슴이 터지도록 기쁘고 행복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벗님 여러분은 자유로우십니까?
아니면 이런저런 굴레에 얽매여 있습니까?
언제 자유로운 영혼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유롭지 못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요한 8,32) 테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진리를 찾아 누릴 수 있을까요?
수많은 현자(賢者)들이 이 진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이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며 웃고 맙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너무도 쉬운 곳에,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멀리서 진리를 찾는 헛수고를 하지 말고, 내가 곧 진리이니 나에게서 진리를 찾고 깨달음을 얻으라 하십니다.
저는 말씀 묵상을 하면 할수록 진리가 아주 가까운데 있음을 더욱 느낍니다.
그 말씀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언젠가 이 말씀마저도 필요없이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하고 고백할 날이 오기를 염원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73년에 캐나다로 이민 오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50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한편의 영화와 같았습니다.
어르신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있는데 지금의 배우자를 만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배우자를 따라서 천주교를 만난 것이라고 합니다.
삶의 고비에 하느님께서는 늘 새로운 길을 마련해 주셨다고 합니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면서 자녀들을 잘 키웠습니다.
바이올린을 하는 딸은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습니다.
첼로를 하는 딸은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의사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된 아들은 아프리카로 가서 의료 봉사를 하였습니다.
딸들도 자신들의 재능을 나누었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자리를 잡았고, 이제 노년의 삶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르신은 또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은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르신은 11년째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병원봉사의 주된 업무는 수술을 앞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술 전에 아이들은 전날 금식을 하기에 당일에는 배고파서 운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아이들이 울면 함께 울면서 아이들을 달래준다고 합니다.
그 일을 11년 째 하면서 이제 아이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리라 믿지만 설사 불가마에서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열심히 일 했으니 즐겨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광고를 기점으로 해외여행이 늘어났습니다.
이 광고를 기점으로 휴가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낯선 땅에서 공부했던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이국땅에서 삶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도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아꼈습니다.
이제 그들 앞에는 ‘꽃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청년들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겠다고 합니다.
40년 동안 열심히 일한 어르신이 충분히 노년을 즐길 수 있었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도 매년 ‘성사전담사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은퇴라고 했고, 작년까지는 원로사목자라고 했는데 올해부터 성사전담사제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꽃길 대신에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하였듯이, 어르신이 꽃길 대신에 봉사의 길을 선택하였듯이, 성사전담사제가 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길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열심히 일했으니 자유롭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는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창고에 보물을 가득 쌓아놓고 기뻐하던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가난하고, 지금 갇혀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이스라엘의 청년들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불가속이라도 기꺼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는 40년 동안 열심히 일한 후에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병원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성사전담사제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꼰대 패션 탈출법’이라는 이상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패션은 ‘꼰대’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다.
패션은 자유이지만, 꼰대의 성향상 ‘내가 편하다’는 이유로 시간과 장소에 맞지 않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행에 뒤처진 헐렁한 슈트도 모자라, 와이셔츠 안에 메리야스를 받쳐 입고 하얀 양말까지 고수한다면 꼰대일 확률이 높다.
신발이 안 보일 정도로 길이가 긴 바지를 선호한다거나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매치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100% 꼰대다.
자신의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 따르면 저는 확실히 ‘꼰대’였습니다.
그냥 저 편한대로 입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누구에게 특별히 잘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제 맘이 가는 대로 특히 편한 복장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와이셔츠(끌러지 셔츠) 안에 메리아스는 반드시 입어야 하고,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신기도 하고, 제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합니다.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꼰대 패션 탈출법’에 의하면 저는 분명히 ‘꼰대’였습니다.
솔직히 패션은 자유라면서도 다른 이의 패션을 평가하는 것이 더 ‘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이 꼰대일 것으로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다양한 비판에 귀를 닫거나, 개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기준만 맞다고 생각하면 다 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의 말을 꼰대 같다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 자녀 역시 꼰대입니다.
꼰대를 싫어한다면서도 자신이 꼰대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유다인이 주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난다면서 틀렸다고 하고, 자기들을 비판한다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꼰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통해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의 종이 될 뿐입니다(요한 8,32 참조).
주님의 뜻이 때로는 우리에게 커다란 걸림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꼰대’에서 벗어나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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