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해마다 거룩한 성사로 사순 시기를 지내는 저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달아
회개의 삶으로 그 열매를 맺게 하소서.
제1독서
<홍수에서 구원된 노아와 맺은 하느님의 계약>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9,8-15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들과 내 계약을 세운다.
10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곧 방주에서 나와,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우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살덩어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3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14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15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제2독서
<이제는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3,18-22
사랑하는 여러분,
18 그리스도께서는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19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제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회개란 지옥의 원인이 나 자신임을 확실히 아는 것
오늘 복음은 왜 복음을 믿기 위해 회개가 필요한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유혹은 한 순간 받는 무엇이 아니라 매 순간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유혹은 매 순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것이 유혹이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유혹을 이기셨더니 세상을 구원하는 자가 되시고 결국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따르라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은 나 자신을 그것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회개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의 결단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랑에게 지옥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쓴 『닫힌 문』(No Exit)이란 연극에서 왜 타인이 지옥이 되는지 설명합니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지옥의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죽어서 이 방으로 들어왔지만,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사랑을 갈망하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공간이 됩니다. 하지만 혼자 외롭게 되는 게 더 큰 고통이라 여기기에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삽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세상이 지옥이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옥이 타인의 탓일까요? 타인에게 집착하는 자기 마음 탓이 아닐까요?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느님이고 나는 그 사랑에 내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죽음의 보상을 줄 신의 존재를 거부할 때 의미를 잃습니다.
인도 영화 ‘삼사라’에서 사람은 누구나 물 한 방울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마르지 않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도를 닦는 것임을 말합니다. 결론은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바다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에 투자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마치 사막의 펌프처럼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그 한 방울의 물을 지키려는 마음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펌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된 주유소가 있고 그곳엔 물 펌프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나그네가 주유소의 물 펌프를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바가지의 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 펌프 밑에는 엄청나게 시원한 지하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이 펌프 물로 갈증을 해소하세요. 명심하세요. 펌프 앞에 놓인 바가지의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이것은 ‘마중물’. 잊지 마세요. 다음 분을 위해서 ‘마중물’을 꼭 채워 놓고 가세요!”
이 한 방울의 물을 바치는 게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뱀입니다. 지옥은 이 뱀, 곧 나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에게서 탈출시키려 합니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파라오 때문에 지옥을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가 곧 지옥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모세를 믿게 됩니다.
가나안 땅, 곧 하느님 나라는 자기 안의 파라오를 배신함으로써 얻는 에너지를 갈아 넣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고 생명은 곧 피입니다. 돈도 피이고 음식도 피이며 명예도 피입니다. 이 피를 갈아 넣지 않으면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회개는 지혜의 빛이 요구되고 그 지혜의 빛으로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착한 뜻을 만들고 착한 뜻은 그것과 반대되는 나의 뜻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뜻에서 휙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을 향하게 될 때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나를 가만히 두면 지옥에 머물게 되어 나 자신을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마르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복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지옥의 땅이고 복음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 다녀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순례 코스 중에서 광야 체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몇 시간을 보내면서 광야가 어떤 곳인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광야는 사막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매우 덥고 따가운 햇빛을 맞으면서 살아야 했지만, 약간의 풀도 있고 또 물도 구할 수 있기에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와 같은 풍요로움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몇 시간 체험은 가능해도, 며칠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하느님 체험을 위해 많은 은수자가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하니, 사람들은 하느님 체험을 위해 광야로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광야에서 하느님 체험이 가능할까요? 단순히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장소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요?
세상과 동떨어진 이곳에서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볼 것이 너무 많습니다. 즉, 정작 하느님을 보는 데는 소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볼 것이 없어서, 하느님께 집중하는데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수자가 이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광야는 피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찾아가는 곳이 되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을 찾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도 세상에 파묻혀서 광야처럼 고통과 황량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도 광야로 가셨습니다. 가뜩이나 불편하고 황량함이 가득한 광야인데, 여기에 사탄의 유혹까지 받게 되십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40일 동안을 말이지요. 어려운 장소에서 더 어려운 시간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도 광야에 가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역시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장소로 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받으신 것을 왜 나는 안 된다고 말할까요?
그 시간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일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이지요. 그런데 정작 그 주인공인 우리는 광야와 같은 곳을 피하면서 철저하게 쉽고 편한 것만을 쫓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의 명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무라카미 하루키).
사진설명: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