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지러운 시대, 한해를 돌아다 보면 기쁜 일보다 더 슬픈 일이 많았고, 희망보다 절망이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출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망을 이야기하지, 절망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역사가 긍정적이었던 부정적이었던 간에 이렇게 발전해온 원동력은 결국은 희망이었을 것인데 그 희망이란 무엇인가?
“판도라는 갖가지 재난이 가득 차 있는 나무통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신들이 인간에게 주는 외관상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선물이며 ‘행복의 통’이라는 이명異名으로 불려졌다.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나무통에서는 모든 재난이 생성하고, 날개가 달린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 후 이것들은 싸다니기 시작했고, 낮이나 밤이나 인간에게 해를 끼쳐왔다. 지금 나무통에는 단 하나의 재난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때 판도라는 제우스의 의사에 따라 뚜껑을 닫았다.
그래서 그 재난은 그 속에 남게 되었다. 인간은 영원히 행복의 나무통을 집안에 간직하고 어떤 보물이 그 속에 들었는지 궁금히 여기고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며, 인간은 생각이 날 때마다 거기에 손을 뻗쳐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판도라가 가져온 그 통이 재난의 통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다만 남아 있는 재난이 최대 행복의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곧 제우스는 인간이 그 이외의 심한 재난에 괴로움을 받더라도 역시 생명은 버릴 수 없어, 계속 새로운 괴로움 속에 잠길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이런 것 때문에 그는 인간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 희망은 알고 보면 재난 중에도 가장 최악의 것이다. 희망은 인간의 괴로움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의 ‘도덕적 감각의 역사를 위해서’에 수록된 글이다.
생죵 페르스는 그의 시집 <유적지流謫地> 중 ‘비’-카트라느의 프랑시스 비트르에게-에서
“우리의 길은 끝이 없고, 우리의 집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노래하고 “희망 없이 가다려라.”고 노래하는 시인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남은 성실은, 열려 있는 내일, 그 내일을 향해 “너는 희망을 보았니? 그래 나는 희망을 보았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