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사부정으로 윤필용 사건 촉발
윤필용 사건은 이미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었다. 윤필용 소장의 군부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의 독단과 인사개입이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계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가 영남출신이 아닌 경기도 포천출신의 8기생 강창성 소장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윤필용을 견제했다. 육군본부는 이 기류를 포착했는지 영남 출신 하나회 실세에도 눈을 돌렸다.
1972년 10월 중순,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에 나타난 육사11기 하나회 손영길 대령은 윤필용 소장의 메모를 가지고 대령과장인 박경석 대령(필자)에게 내밀며 윤필용 장군의 희망사항이라며 명단을 건넸다. 거기에는 하나회 신참 대령 명단이 적혀 있었으며 8명 모두 연대장 가용자로 선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보병 대령이 장군 진급권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보병 연대장이 필수 코스이기 때문에 10대 1의 경쟁이었다. 따라서 연대장 가용자 선발심사는 장군 진급 예비 과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은 이 심사위원회의 간사이기에 실무자에 지나지 않았다. 위원장은 강직하기로 소문난 육사 8기생 강신탁 소장이 임명되었으며 위원은 1, 2, 3군 인사처장인 준장급이었다. 1972년 10월 중순 이 심사가 시작되었다.
윤필용 메모는 대령과장인 박경석 대령에 의해 찢겨져 없어졌고 심사는 공정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윤필용 메모 가운데 6명이 심사에 탈락했다. 그러자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과 하나회 쪽에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감히 ‘윤필용 메모를 묵살하다니.......’ 그 여파는 뒤이어 실시된 장군 진급 심사에 반영이 되었다. 장군 심사 마지막날 대령과장 박경석 대령이 선발된 것을 윤필용계의 김성배 대령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김성배는 하나회원은 아니지만 그들과 밀착관계에 있는 간부후보생 출신이었다. 대령 진급 또한 대령과장 보다 3년이 뒤졌다. 이 진급심사에서 하나회 핵심멤버인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 모두가 특진케이스로 장군이 되었다. 이 결과가 공개되자 육군 내의 장교들의 분노와 불만이 고조되었다. 따라서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진급에 얽힌 비리를 수사하기 시작하였다.
내사 결과 엄청난 부정비리가 개재되어 있음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던 와중에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주요 비리 당사자들이 구속되었다. 윤필용을 비롯 손영길, 김성배 등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모두 유죄판결을 받고 파면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영남권 대통령 친위세력이 숙청되면 큰 위기가 온다는 교묘한 진언으로 중도에서 이 조사가 중단되고 오히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역습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2년 말에서부터 1973년 초에 걸쳐 강창성 보안사령관에 의해 진행되던 정치군인 숙청수사가 끝까지 성공했더라면 12․12 군사반란이나 광주의 비극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10여 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필자인 내가 인사분야의 핵심 직위인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에 임명된 내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 영남권 하나회가 인사 요직은 물론 수도권 핵심 직위를 독점하자 육군 내 고급 장교들의 불만이 고조돼 있었다. 이때 대령과장은 육사11기 하나회 핵심인 육사 11기 권익현 대령이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총장은 영남, 호남출신을 제외한 대령 가운데 장군 진급 1순위자, 근무 성적 최상위자, 무공훈장 가장 많은 수훈자를 선발하기로 하여 심사에 착수한 결과 필자 박경석 대령이 선발되어 대령과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총장의 요구 조건에 부합되는 대령은 단 한 사람 박경석 대령뿐이었다. 그러나 이 영광이 불씨가 되어 필자는 불행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윤필용과 하나회의 역습으로 그 해는 물론 다음 해, 그 다음 해까지 무려 3년을 지체해 겨우 대령 임기 만료 직전인 1975년 구제 케이스로 진급, 별을 달자 철원땅굴개척 임무를 받아 철원 북방 DMZ에서 6개월간 눈물의 유배 아닌 유배에 들어갔다. 국군 사상 장군이 DMZ에서 상주하며 근무한 예는 전무후무하다. 그러나 이 유배 기간 동안 철원땅굴 개척 공로로 대통령의로부터 보국훈장 천수장을 수훈, 훈장이 많다고 질시하던 정치군인에게 한 방 먹인 꼴이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