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았다. 아마 영화 JSA가 감독 박찬욱을 만난 최초의 영화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나에게 다만 영화 잘 만드는 감독 하나가 나왔다는 것, 적절히 음악도 잘 쓰는 감독이 나왔다는 인상만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다음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은 좀 달랐다. 나는 그 영화를 통해 감독 박찬욱을 제대로 만난 듯 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아주 잔인한 영화였지만, 이 영화는 소통의 부재가 수반하는 가공할만한 폭력, 그러한 폭력의 연쇄로서의 ‘복수’를 드러내면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노동자와 사용자, 부자와 빈자, 정상인과 장애인,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듯 했다. 이 영화가 굉장한 것은 친구와 아주 오랜 기간동안 안주거리가 된 좋은 영화라는 점 뿐만 아니라, 영화가 끌고 가는 이야기(내러티브)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이미지 사용기법(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 사용의 통일성 거부)적 측면에서, 끝으로 화면구성(화면상의 공간을 두 개로 분할해서 서로 상반된 장면을 보여주는 장면, 즉 신하균의 누나는 고통에 신음하지만, 같은 방에 가장 가까이 있는 신하균은 정작 그 신음을 듣지 못하고,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은 그것을 여성의 교성으로 착각하고 자위행위를 하는 장면이 있다.)을 통해서도 적절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올드 보이』는 적어도 나에게는『복수는 나의 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아! 그런데 이 영화는 훨씬 업그레이드 되었다. 『복수는 나의 것』처럼 차분하지 않은 것(폭력성, 카메라 워크, 음악 등등)이 일반 관객에게도 호소할 수 있는 대중성을 지녔다는 점도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대중성은 적어도 3S정책의 범위 안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격조 있는 대중영화라 할까?
너무 말이 많았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올드 보이』라는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올드 보이』 다음과 같은 등식을 성립시키는 영화이다. 폐쇄체계=닫힌 감옥에 사는 인간의 삶=폐쇄체계 내부에서 움직이는 방식인 기억=열린 감옥에 사는 인간의 삶=익숙한 것과의 황홀한 결합=근친상간(누나와 동생 & 아버지와 딸)=소문이라는 폐쇄적으로 순환하는 언어체계=폐쇄체계 내부에 사는 인간의 노예근성=폐쇄체계에 갇힌 자가 가지는 분노의 순환=증오와 폭력의 증폭=오해의 증폭=복수&자살. 아! 이 무슨 해괴망측하고 뒷 골 땡기는 주문을 늘어놓느냐고? 참, 성미도 급하시지…….
1. 오대수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사설 감옥에 갇힌다.(이게 폐쇄체계로써의 닫힌 감옥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알기 위해 폐쇄체계(오대수의 내면세계)를 돌아다니는 유일한 방식인 ‘기억’을 사용한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은 무려 15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15년 후 풀려난다. 그러나 웬걸, 그는 정작 풀려났지만, 그래서 해방되었지만, 사실은 자신을 풀어주는 사람에 의해서 철저히 관리되고 있었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열린 감옥에서 사는 인간의 삶이다.) 우리도 열린 감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감독은 해주고 있는 듯 하다.(열린 감옥에 대한 얘기를 좀더 듣고 싶으면 네이버 지식 검색에서 팬옵티콘panopticon을 쳐보라. 아주 잘 설명되어 있을 것이다.)
2. 이런 인간은 결국 익숙한 것들과만 결합관계를 가진다. 타자의 시선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있듯이 갇힌 자들은 지옥대신 익숙한 천국과 황홀하게 결합한다. 그것이 바로 근친상간(유지태는 누나, 최민식은 딸)이다. 여기서 유지태는 자발적으로 폐쇄체계에 몸을 담그지만, 최민식은 유지태에 의해 관리됨과 동시에 폐쇄체계에 몸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3. 최민식은 자신이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자신의 죄를 발견한다. 바로 자신이 말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소위 그는 ‘소문’이라는 폐쇄적 언어체계(모교생들의 언어체계)를 구동시킨 장본인이었다. 폐쇄체계라는 자동차의 시동을 그가 걸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죄였다. 한 번 시동 걸린 말의 순환은 그에게서 친구 ‘주완’으로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로 넘어가면서 이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그래서 최민식은 혀로도 임신을 시킬 수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
4. 그러나 결국 폐쇄체계를 또 다른 운영자가 나타나서는 이전의 운영자의 도덕성을 흠집내고 그를 몰아내려고 한다. 그가 바로 유지태이다. 그는 폐쇄체계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그 체계를 운영하는 운영자이다.(반면 최민식은 폐쇄체계의 운영자이면서 동시에 희생자이다.) 결국 운영자의 도저한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인간은 개가된다. 정말 최민식은 유지태 앞에서 개가된다. 이것이 바로 폐쇄체계 내부에서 여지없이 발휘되는 노예근성이다.
5. 이들이 뿜어내는 히스테리, 증오, 복수의 순환적 에너지는 그들이 갇혀있다는 사실로 인해 지속적으로 증폭된다. 이 증폭된 에너지는 폐쇄체계를 구동시킨 자에게나, 새로운 운영자로 부상한 자를 모두 파멸시킬 정도의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폐쇄체계는 그 폐쇄체계를 구동시킨 자의 죽음, 곧 ‘자살’ 혹은 ‘자폭’이 아니면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폐쇄체계가 다른 체계에 의해 살해(파괴)당하는 경우에는, 그 체계의 소멸이 또 다른 폐쇄체계인 ‘복수의 체계’를 구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수의 체계는 일단 새로운 운영자인 유지태의 자살로 그 폭발적인 에너지에 브레이크를 건다. 하지만 아직 폐쇄된 체계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체계를 구동시킨 장본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지태는 그 장본인에게 구원을 암시하고 사라진다(자살)는 의미에서 예수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 남은 것은 최민식(몬스터 & 오대수)이다. 그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던 심령술사에게 찾아가서 폐쇄체계를 이동하게 했던 기억, 그 중에서도 몬스터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익숙한 것(자신의 딸)과 황홀한 결합을 맺는다.
어쩌면 이 영화는 매우 비관적인 결론을 맺는 듯 하면서도, 갇힌 공간에 살 수 밖에 없는 인간, 노예근성을 가진 인간의 운명을 냉소적으로 묘사한 영화인 듯하다. 그리고 적당히 도덕 교과서에 나올만한 메시지도 가지고 있다. “말조심해라.”, “함부로 남을 헐뜯지 마라.”는 식의……. 하지만 이 영화가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폐쇄체계에 대한 묘사가 결국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타자를 향한 무관심, 심지어 타인을 죽음에 몰아넣는 행동을 하고서도 그것이 쉽게 잊혀지도록 하는 무관심한 기억의 폐쇄계, 그 속에서 날로 증복되는 사적인 폭력!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를 비참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이끌어 가는 에너지가 아닌가 하는 그런 성찰 말이다.
첫댓글 줄간격을 좀 늘이시지 읽기가 불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