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자락 금산사에서 <신정일의 세상 풍경>이라는 유튜브를 촬영하다.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난리가 아닌데도 세월은 잘도 간다. 눈이 내리다가 비가 내리는 날, 다시 찾은 금산사, 말 그대로 을사년乙巳年(을씨년)스럽다.
금산사 미륵전 앞에 서서 침묵한 채 나를 굽어보는 미륵불을 바라보는 마음은 산란하기만 한데, 누구에게 물어볼까?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나는 이 답답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매일 매 순간 글을 쓰며 세상을 답사하고, 지나간 역사나, 온갖 풍파 견디고 남아 있는 ‘역사유물과 세상의 온갖 풍경’을 어설프게나마 동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신정일의 세상 풍경>이라는 유튜브에 담기 위해 틈이 나는 대로 세상 편력에 나서고 있다.
2025년 1월 5일 내가 찾아간 모악산 자락의 금산사가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모악산(母岳山) 남쪽에 금산사(金山寺)가 있다. 원래 절터는 용추(龍湫)로서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신라 때 한 조사(祖師)가 수 만석의 소금으로 메우니 용이 옮겨 갔다. 그 자리를 닦아서 절을 세웠으며, 대웅전(大雄殿) 네 모퉁이 뜰 밑에는 가느다란 간수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지금도 누각이 높고 빛나며, 골짜기가 깊숙하다. 또한 호남에서 이름난 큰 절이고, 전주부(全州府)와 가깝다. 『고려사』에 의하면 견신검(甄神劍)이 아비 훤(萱)을 금산사에 가두었다는 곳이, 곧 이 절이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호남평야의 어느 지점에서나 보이는 산이 있다. 가까운 듯 혹은 먼 듯 넉넉한 품새로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을 나누는 산, 모악산의 산줄기는 서해에 닿을 것처럼 뻗어 내리다가 산자락 아래 드넓은 호남평야를 펼쳐 놓았고 북쪽으로는 천삼백 년의 고도 전주라는 도시를 풀어 놓았다. 모악산 올라서서 바라보면 서북쪽으로 멀리 동양 최대의 절터를 품에 안은 미륵산(彌勒山)이 보이고 여산의 천호산 진묵(震黙)스님의 자취가 서린 서방산이 눈앞에 다가오고 서쪽을 바라보면 변산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바다가 끝나는 지점에서 평야가 시작되고 평야가 마무리되는 산자락에서 산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모악산은 평야와 산지의 경계에 있다. 기름진 호남평야에 목을 걸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본 산, 모악산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자리한 명산(名山), 영산(靈山) 속에 어떠한 산으로 자리 잡은 산인가?
이중환은 이 모악산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모악산母岳山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절터가 용추로서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었다. 신라 때 한 조사祖師가 여러 만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다 터를 닦은 뒤 대전大殿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 네 모퉁이 뜰아래에는 가느다란 간수澗水가 주위를 둘려 있다. 지금도 누각이 높고 빛나고, 골짜기 마을이 깊숙하다. 또한 호남에서 이름난 큰 절로 전주부 관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려사〉에서 견신검甄神劍이 그의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다는 곳이, 바로 이 절이다.”
김제와 완주 그리고 전주의 경계를 이루며 드넓은 호남평야를 감싸 안고 있는 모악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포근하며 따뜻하다. 예로부터 엄뫼, 큰뫼로 불려 온 모악산은 이 산의 정상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쉰길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같아서 모악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산과 강의 풍수>에서
히끗히끗 눈덮힌 모악산 자락 금산사에 비가 내리고,
나는 겨울 나그네라서 겨울비에 젖고, 또 젖고,
2025년 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