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기도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야서 55,10-11)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가끔 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떤 말을 유언으로 남길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가끔은 새해가 되면 유언장을 쓰려고도 합니다. 여러 번 유언장을 썼지만 한참 지난 다음에 보면 정말 시시한 말만 썼습니다. 그리고 교훈이 될 만한 말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유언장을 쓰지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위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들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간다. 누가 행복할 것인가?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라고 말한 뒤 철학자답게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어 낸 칼 마르크스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하녀가 “제게 마지막 말을 남겨 주시면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시끄러워, 나가!”하면서 소리치며 죽었습니다.
나폴레옹 장군은 “나는 불행하게 살았다”라고 중얼거리며 죽었고,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영웅이란 용감하게 실패하는 자이다.”라고 무언가 한을 남기면서 죽었고, 문호 괴테는 “창문을 열어다오.”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 직전에 마지막으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내는데 있어서 당신의 모든 일들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 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기쁨 속에 살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하느님의 평화의 축복 속에 살기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룩해지고 하느님을 닮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뜻하신 것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음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기도보다는 결과만을 바라볼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힘들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정말로 절박한 때만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기복적인 기도에만 매달렸습니다. 기도의 완성은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지도 못한 채 입으로만 독백처럼 기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내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기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엉터리 기도에 절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정성(至極精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하느님의 뜻에 부합(附合)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과 진정한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모든 것이 기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과 방법을 떠나서 그 진정한 친교를 이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진정성을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축일2월 20일 성 에우케리오 (Eucherius)
신분 : 주교
활동 지역 : 오를레앙(Orleans)
활동 연도 : +743년
같은 이름 : 에우체리오, 에우체리우스, 에우케리우스
성 에우케리우스(또는 에우케리오)는 어릴 때부터 거룩한 생활에 이끌렸다. 프랑스의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그는 709년에 주미에주(Jumieges)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7년을 생활하였다. 그의 아저씨이며 오를레앙의 주교이던 소바릭(Suavaric)이 서거했을 때, 시의회와 시민들은 궁중 관리인 카를마르텔(Karl Martell)에게 대표단을 파견하여 성 에우케리우스를 주교로 선임하겠다는 뜻을 통보하였다. 카를마르텔이 그에 동의하자 이 젊은 수도자는 수도원에서 나와 오를레앙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주교로 선임된 그는 스스로 모범적인 사목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한편 교구민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그는 카를마르텔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카를마르텔이 전쟁 비용이나 포로들의 석방금 등을 교회에 지나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이를 항의하자 카를마르텔은 그를 쾰른(Koln)으로 귀양을 보냈다. 여기서 성 에우케리우스가 더 큰 공경을 받게 되자 또다시 리에주(Liege)로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도 성 에우케리우스의 명성이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자 카를마르텔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마스트리흐트(Maastricht) 근교의 생트롱(Saint-Trond) 수도원에 감금하였다. 그는 이 수도원에서 기도와 관상을 즐기며 여생을 편안히 마치고 선종하였다.
오늘 축일을 맞은 에우케리오 (Eucherius)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