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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 곧 라자로를 살리는 일을 보고서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이들은 단지 믿지 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거부하고 고발하고 방해하고, 그분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민족과 백성과 공동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분을 죽이기로 결의한 이들의 속셈이 드러납니다.
곧 그들은 민족과 백성과 공동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과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고슴도치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신들을 방어합니다.
그리고 사악한 악의에 차서 계략과 음모를 꾸며댑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비단 교회 밖의 일반 사회에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바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바로 내 자신의 삶 안에서도, 아주 교묘하게 강력한 영향력으로 행사되기도 합니다.
이를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영적 세속성”이라 지적하고, 강렬하고 단호하게 경계하셨습니다.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무려 다섯 개의 항(93-97항)을 배려하여, 이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이는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 교묘한 방법입니다.”
(93항)
그리고 앙리 드 뤼박은 이러한 “영적 세속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적인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더 엄청난 재앙이 될 것”(<교회에 관한 성찰>)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사실 ‘영적 세속성’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결국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처럼 ‘영적 세속성’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자기 기득권과 자기 중심성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는 일은 그토록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의 큰 차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곧 믿는 이들은 희망을 그분께 두는 이들이요, 믿지 않는 이들은 희망을 그분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이들입니다.
곧 그분이 바라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이 갈리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믿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희망을 두고서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로지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기에,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자신이 죽는 길을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나는 진정 누구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닫히고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됩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 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음을 바로 하여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요한 3,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 내에서도 거짓 신앙인이 생겨나는 이유>
로랑 베그가 쓴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라는 책에 흥미로운 조사 발표가 실려있습니다.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하지 않은 미국인 1,000명의 일반인에게 유명인 중 누가 천국에 갔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득표수를 받은 사람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무려 79%가 마더 데레사는 천국에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마이클 조던은 65%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표를 던졌습니다.
그 뒤를 이어 안타까운 사고로 죽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60%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도 79%인데, 자기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무려 87%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렇게 생각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사제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사두가이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사회에서 유력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강력한 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은 당신을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미 잘살고 있다고 믿었는데 왜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당신을 믿어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실까요?
그럼 지금까지 자신들이 노력해 온 것은 무엇이 될까요?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잔인하게 죽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핑계를 오늘 대사제는 이렇게 댑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자, 여러분은 어떤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나와 가족이 이 세상에서 죽는 것보다 그 사람이 비록 죄는 없을지라도 죽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죄 없는 생명을 죽이게 하는 힘은 ‘세상 걱정’이었습니다.
이 말에 모든 사람이 당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둘로 나뉩니다.
정글 아니면 동물원입니다.
영화 ‘보르히아: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은 15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로, 알렉산드로 6세 교황(Rodrigo Borgia)과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아들 체자레 보르지아의 야망과 교황직을 통한 권력 남용을 그린 작품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은 사실 이탈리아에 정착한 스페인 가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통일 국가가 아니라 지방 군주들이 지배하던 이탈리아에서 그의 정치적인 생명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알렉산드로 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자기 아들 세 명과 딸을 통해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축출해 갑니다.
이 과정에서 아들 셋의 목숨을 잃게 되고 딸은 여기저기 이용 당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했던 알렉산드로 교황도 독살 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어떻게 교황까지 되었으면서 교회 내에서 이렇게 일가족이 온통 타락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가 제 역할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글과 같은 세상을 동물원처럼 믿게 하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교회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도 오늘 대사제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사제는 동물원이 아니라 정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선전용으로 삼았지 진짜 신앙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세상은 동물원이 아니라 정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성적 제일주의로 키우려 했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사자와 호랑이가 있는 곳에 아이를 끌고 갑니다.
그리고 사자 앞에 아이를 앉히고 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을까요?
많습니다.
동물원에 가면 그런 아버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유리가 있어서 맹수로부터 아이가 안전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잘도 따릅니다.
아버지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걱정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지도자들의 말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종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이 세상이 정글이 아니라 동물원임을 믿게 하는 가장 완전한 훈련법은 ‘십일조’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를 통해 한 번 맹수 앞에 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알면 주님을 더 믿게 되고 그러면 착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따르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주는 대상을 따르게 됩니다.
만약 유다인들이 십일조가 제대로 된 마음으로 봉헌했다면 그들의 선동에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점점 동물원으로 여기며 살 것인지, 정글로 여기며 살 것인지는 지금 내가 어떤 모험의 길로 들어서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봉헌으로 주님을 더 믿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기고 살아남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누가 결국 구원의 보증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는 명확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며 이 세상을 동물원처럼 살아가려고 자신을 훈련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훈련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받아들여 자신도 하느님처럼 될 존재임을 믿을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에덴 동산이 선악과가 바쳐지지 않으면 생명 나무를 먹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남북 평화 통일 -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궁극의 답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시편 149,147)
시편 말씀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갑작스럽게 활짝 웃는 모습으로 방문한 자매를 반가이 환대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드린 조언입니다.
“괴로워도 즐거운 척, 슬퍼도 기쁜 척 사세요.
이건 위선이나 거짓이 아니라 삶의 지혜요 믿음의 행위입니다.
사진처럼 꽃같이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저도 이렇게 삽니다. 아파도 건강한 척, 불편해도 편한 척!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이 아닌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4월의 첫날이며 내일 4월2일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며 이어 성주간이 펼쳐집니다.
세상 현실은 어둡고 답답하더라도 심기일전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활짝 마음을 열고 성주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남북왕국의 통일”이 소주제로 하여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정말 온전한 통일은 주님 안에서,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이 될 때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평화통일은 멀리서가 아닌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여기서부터 실현되어야 합니다.
남북왕국의 통일이라는 말마디를 보니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남북한의 통일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한때는 애절하게 불렀던 “우리의 소원” 노래도 아득한 꿈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역사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많이 읽게 되는 책들은 옛 현인들의 평전입니다.
어제는 징비록의 저자, 조선 선조시대의 명상 서애 류성룡에 대해 읽으면서 임진왜란 7년의 참상이 어떠했는지, 새삼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정말 일본은 경계해야 합니다.
일본은 한국을 무시하지 결코 존중하지 않습니다.
호전적好戰的인 유전자(DNA)를 지닌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역사가, 근세 동북아시아 역사가 이를 증거합니다.
진정한 반성이 없는 일본은 이웃이 될 수 없거니와 비극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정말 남북의 민족은 각성覺醒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한민족의 형제국이 적국敵國이 되어 전쟁으로 공멸共滅을 가져오는 어리석은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될 것입니다.
통일이 우선이 아니라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나라 지도자의 우선적 책무는 국가 안보요 전쟁이 일어나거나 말려들지 않도록 온갖 지혜와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남북 평화 통일은 파스카의 예수님 안에서 평화롭게!”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멀리서가 아닌 가까이에서부터 분열을 종식하고 주님 중심의 평화로운 공동체 건설이 우선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주는 답입니다.
복음의 배치가 참 의미심장합니다.
라자로의 소생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소생에 이어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고 그해의 대사제인 가야파의 예언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가야파는 정치적이고 이기적은 뜻으로 한 말이지만, 제자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빛으로 이 말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확고히 하시고, 성부의 인도에 따라 세상 곳곳에서 모여드는 이들을 한 백성으로 합쳐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니 참된 평화통일은, 궁극의 남북의 평화통일은 파스카의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에페 2,14-16)
통일이 아니라 상생의 평화공존이 우선입니다.
주님 안에서 무한한 인내와 더불어 한결같은 평화의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멀리서가 아닌 가까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점차적으로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분열이 아닌 평화공존의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를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시편 116,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의 후일담입니다.
그 일은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기적, 표징보다 적대 세력의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럴 수밖에요.
삶과 죽음은 인간 능력 밖의 문제, 즉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임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운운하며 자기들의 불안을 민족적 운명으로 확대하고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공격 욕구를 합리화합니다.
그때 그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
(요한 11,50)
가야파의 예언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요한 11,51)이라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에는 그 자신도 의도치 못한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저울 한 쪽 접시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 나아가 온 인류를 올려놓고, 다른 한 쪽 접시에는 예수님을 올려 놓은 채 평형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미치광이 몽상가 죄인일 뿐이라고 규정해 놓고서도 대사제직에 부여된 영의 뜻을 자기도 모르게 발설했을 겁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이 "백성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단순히 로마인들의 비위를 맟추기 위한 희생양 정도가 아니라, 죄악에 시달리는 인류를 "위한" 고귀한 죽음이 될 것임을, 자기도 모르면서 고백한 셈입니다.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바빌론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 주시는 새 희망이 울려퍼집니다.
"한 임금, 유일한 목자."(에제 37,22.24) 주님께서 세워주실 평화의 임금, 그분 종 다윗을 이을 새로운 통치자는 가야파 입을 통해 발설된 "한 사람",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에제 37,23.27 참조)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계약의 말씀이 다시 갱신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두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첫째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시리라."(에제 37,23)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에제 37,26)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시고 백성 가운데의 성전 안에 현존하시리라는 이 약속은 마침 오늘 복음에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관습에 잘 드러나 있지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요한 11,55-56)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느님의 새 계약은 이렇듯 유다인들 종교 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온 백성, 온 인류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시간과 공간, 육체와 신분, 이스라엘에게만 부여된 듯 자부했던 율법과 선민사상을 초월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체결될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떠올려 봅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요한 4,21.23)
유다인들이 사유화했던 정결례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한 하느님 현존의 계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희생제사를 통해 그분 이름이 전해지는 곳 어디에나 확장되어 퍼져 나갈 것입니다.
육신의 소멸이 오히려 영의 자유로운 활동과 믿는 이들의 헌신으로 부활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파스카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에 잠시 숨을 돌리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채워야 할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유혹과 어둠의 시간을 예수님 수난과 발맞추어 성실히 완주할 수 있기를 서로 격려하면서 용기 북돋워 주면 좋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벗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롤로메이는 “현재와 같은 불안정한 시대에 인생의 가치와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라고 책의 저술 목적을 밝혔습니다.
저자는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 인간 불행의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자아의 재발견이 불안과 불행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아를 재발견한 사람은 자유와 내적인 힘을 회복하여 창조적인 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은 ‘머물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쉬게 하는 머물 곳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머물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혼재하기 때문입니다.
신념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검색엔진을 돌리지만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곤 합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고독과 불안을 이용해서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는데, ‘JMS'와 같은 사이비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교회는 구원의 등불을 더 높이 들어야 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인간 불행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있습니다.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려도 우리는 마음이 아픕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앞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가톨릭신앙체험 수기에 당선된 작품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아들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남편의 죽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둘째는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성격 차이 때문에, 무능함 때문에, 외도 때문에 원수처럼 지내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처럼 원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것은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내가 가진 것을 온전히 내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용서를 만날 때 부활의 꽃은 피는 것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는 길입니다.
셋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람쥐는 한 모금 물을 마시면 미련 없이 샘을 떠납니다.
새는 둥지를 트는데 가지 하나면 만족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아합 왕은 이미 많은 포도원이 있었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다윗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충실한 종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겸손만이 우리를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참된 자아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강물에 떠밀려 내려가듯이 시류에 휩쓸려서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거짓된 자아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오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사제복을 입었지만, 수도자로 살지만, 그 의미를 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은총 속에 살면서 그 은총에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참된 자아를 찾아 가는 길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말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주변에서 선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렇다면 이 선함은 타고난 것일까요?
아니면 환경에 의해서 선해진 것일까요?
선함은 타고난 것도 있고, 환경에 의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함도 재능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더군요.
선함이 재능이기에 갈고 닦아야 빛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능을 갈고 닦지 않아서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선함도 갈고 닦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지난달에 ‘박해 시대 신앙 선조의 사순시기’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주제로 강의하는 것이었기에 오랫동안 책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특별히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복자 김광옥(안드레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성격이 불같이 사나운 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었지요.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하셨고 여러 가지 극기 행위를 실천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면서 성격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책에서는 그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사나웠던 그가 젖먹이처럼 양순하게 되었다.’
엄격한 금식과 극기 행위는 분명 적지 않은 노력을 동반합니다.
육신의 편함을 끊고 주님 사랑에만 집중해야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선함이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노력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 노력으로 자신의 선함이 빛나게 되는데,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걸어가 세상의 것만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선함은 빛을 잃고 악함만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선함도 재능이라고 했습니다.
이 재능을 썩히지 말고, 갈고 닦아 밝게 빛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선함을 통해 주님을 세상에 환히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요한 11,48)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군대를 풀어 폭력을 사용해서 곧바로 해산시키곤 했지요.
이 상황을 들면서, 많은 군중을 모으는 예수님을 가만 놔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을 인정하면서도, 로마의 군대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노력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를 내세워 주님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선함을 드러내면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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