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鄭文孚)-도온성(到穩城)(온 성에 올라)(칼 짚고 성에 올라)
倚劒登臨萬里城(의검등림만리성) 칼 짚고 만리성에 올라서서
烹龍炮鳳膾長鯨(팽룡포봉회장경) 용 삶고, 봉 굽고, 고래 회쳐
滄溟水作一杯酒(창명수작일배주) 저 푸른 바닷물을 한 잔 술 삼아
倒向將軍胸裡傾(도향장군흉리경) 이 가슴속에 부어 볼까나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농포집農圃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장미경님은 “이 시는 임진왜란 중 현직관료로서 의병활동을 펼쳤던 정문부의 작품이다. 정문부는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장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다. 1588년 24세에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 참군이 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해인 1591년 함경북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북도의 여러진을 순찰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시작한 것은 임진년 9월 16일 의병을 이끌고 경성에 들어간 때부터다. 성에 들어간 지 3일 만인 9월 19일 길주에 주둔하고 있는 왜병을 대파한 것을 시작으로 장평, 임명, 단천, 백탑에서 승전하고 육진을 평정함으로써 관북 지방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정문부의 공로를 시기했던 감사 윤탁연의 무고로 자신이 세운 공적을 남에게 가로채이고 영흥부사로 떠나게 된다.
이 시는 영흥 부사를 거쳐 온성으로 부임했을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본 순간 분출된 격정을 표현하였다. 거대한 파도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특히 고래(長鯨)는 큰 도적(巨)고 제압하고자 하는 호기(豪氣)를 볼 수 있다. 영흥(永興) 부사를 거쳐 온성(穩城)으로 부임했을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시인은 온성에 올라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잔 술로 들이키겠다는 호탕한 표현으로 자신의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장경(長鯨)’은 ‘거구(巨寇)’를 비유하는 시어로, 당시 전쟁을 초래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던 왜적을 가리킨다. 고래를 회쳐 안주로 삼고 푸른 바닷물을 한 잔 술로 들이마시겠다고 한 호언(豪言)은 장수로서 왜적 소탕을 자신하는 담대한 기개와 포부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왜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실전(實戰) 경험을 지닌 장수만이 할 수 있는 패기 넘치는 발언이다. 격앙된 시인의 심장 박동이 들릴 듯 생동감이 넘친다. 그러나 정문부의 작품 중 이처럼 장수로서의 면모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정문부는 난세 속에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해 누구보다도 혁혁한 전과를 세웠으나 자신의 공로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변방을 전전하며 지내야 했고 이보다 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정문부는 1624년 10월 박홍구 등의 역모에 연좌되어 체포되었다가 결백이 밝혀질 무렵 창원 부사 시절 지은 영사시詠史詩 회회왕楚懷王이 빌미가 되어 문초를 받다 죽고 만다. 이식과 조익이 문초관이 되어 재판관에게 ‘이것은 시인이 역사를 읊은 작품일 뿐, 무슨 다른 뜻을 내포한 것도 아닌데 어찌 이 시로 이 사람을 죄줄 수 있겠는가?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훗날에 가서야 대신들이 그 시를 반복해 읽어 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다고 상소해 억울한 누명을 벗고 신원되어 1666년(현종7) 5월 우찬성에 추증될 수 있었다. 28살의 젊은 나이에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나 최고의 성과를 올렸지만, 무고에 의한 희생과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두 아들에게 남긴 ‘벼슬을 구하지 말고 남쪽 지방 진주에 가서 살거라’라는 유언은 지난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에서 나온 한마디가 아니었을까?”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 본관 해주(海州), 자 자허(子虛), 호 농포(農圃), 시호 충의(忠毅)]-조선 중기 문신.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의병대장이 되어 경성을 수복하고 회령으로 진격하여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세필을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1565년(명종 20) 한성판윤을 지낸 정신의 아들로 한성(서울)에서 출생했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고, 한성부참군이라는 무관으로 첫 관직을 맡았다. 이후 홍문관 수찬, 시간원 정언을 거쳤고 1591년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무관직인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회복하여 다시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맡았다.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의병대장이 되어 반란군이 점령한 경성(鏡城)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회령을 차지하고 두 왕자를 왜군에게 넘겨준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과 정말수(鄭末秀)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또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대치하여 혈전을 벌였으며 왜적 600여 명의 목을 베고 수많은 군장물을 획득하였다. 이를 길주 장덕산대첩(長德山大捷)이라 한다. 정문부는 길주 왜성을 포위하고 대치하였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온 왜적 2만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쳤다. 왜군은 패전하여 관북지방에서 완전히 철군하여 남하했다. 이때의 승전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기록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2005년에 다시 반환되어, 2006년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 위해 2006년 3월 1일 북한으로 전달되었다.)
1593년 영흥(永興)부사, 1597년 길주(吉州)목사가 되고, 1599년 호조참의, 160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임진왜란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1612년 형조참판, 1618년 창원부사를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대북파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창원부사로 재직할 때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지은 시(詩)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1624년(인조 2) 고문받다가 사망했다. 그후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신원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溟(명) : 바다 명, 가랑비 오는 모양 멱 1. (바다 명) 2. (하늘이)어둡다 3.아득하다
첫댓글 호쾌한 기개가 대단합니다....
바닷물을 술을 삼아 마시고 싶다는 그의 호탕한
표현에 남자의 기개는 용솟음치고......
네, 그 기개가 흡사 남이장군을 떠오르게 하네요,
회장님의 좋은 댓글에 감사드리고,
내년에는 더욱 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