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지순례 중에 아인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구원의 중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학자들과 성모님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서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배와 성모님과 군인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였던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호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더 큰 감동을 준 건 성당 마당에 있던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는 조각상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호칭은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먼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던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났던 마리아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실 길을 준비했던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이렇게 찬미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십니다.’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사랑을 드렸듯이,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사랑을 드렸습니다.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았던 마리아는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굶주리는 이를 배불리시고, 미천한 이를 높이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찬미했던 하느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삼라만상 온 우주가 하느님 나라에 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과 교리의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식을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백인대장, 소경,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나자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칭찬하셨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겁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셨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께서 지고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던 주님께서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셨듯이, 세상이라는 우물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겁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조재형신부)
영화 ‘거짓말’(2015)은 허언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가난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불행한 가정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밖에서는 거짓말만 하고 다닙니다. 자신은 그런 가정에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피부관리사로 직장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일을 마치면 고급 집을 살 것처럼 둘러보기도 하고 비싼 차와 전자제품을 산다고 했다가 마지막에 핑계를 대며 다음에 오겠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매우 부잣집 딸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없는 돈으로 비싼 차를 타며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입니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정신없는 사이에 냉장고가 배달되어 돈을 날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는 그녀의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쫓겨납니다. 홧김에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자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여드름 짜는 일이나 한다며 솔직하게 말했다가 모든 게 끝장나고 맙니다.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지옥으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허영심 하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심’이 어떻게 본성을 타락시키고 어둠으로 끌어내리는지 보여주십니다. 이미 마귀들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고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무덤’은 우리로서는 ‘지옥’의 상징으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원인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 마귀들을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느니 죽음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욕심’과 여러 다른 욕망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돼지는 욕심에 찌든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엔 지옥까지 끌고 가는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돼지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정중히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은 그러한 이적을 일으키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이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해버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욕심’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이 좋고 허영심이 좋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죽기를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마귀가 하는 말과 같이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예수님, 돈의 욕심을 버리라,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편안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의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돼지와 같은 인간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돼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제 허영심 대신 당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봉헌부터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봉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 자신의 욕심과 싸우겠다는 의지표명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귀가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않게 욕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전삼용신부)
2020년 02월 03일 월요일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또는
[홍]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 또는
[백] 성 안스가리오 주교
입당송
시편 106(105),47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기게 되자, 그는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신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복음).
제1독서
<압살롬에게서 달아납시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5,13-14.30; 16,5-13ㄱ
그 무렵 13 전령 하나가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쏠렸습니다.”
14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어서들 달아납시다.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압살롬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서둘러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서둘러 우리를 따라잡아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고, 칼날로 이 도성을 칠 것이오.”
30 다윗은 올리브 고개를 오르며 울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었다.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제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계속 올라갔다.
16,5 다윗 임금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울 집안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그는 나오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6 온 백성과 모든 용사가 임금 좌우에 있는데도,
그는 다윗과 다윗 임금의 모든 신하에게 돌을 던졌다.
7 시므이는 이렇게 말하며 저주하였다.
“꺼져라, 꺼져! 이 살인자야, 이 무뢰한아!
8 사울의 왕위를 차지한 너에게
주님께서 그 집안의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돌리시고,
그 왕위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다.
너는 살인자다. 이제 재앙이 너에게 닥쳤구나.”
9 그때 츠루야의 아들 아비사이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이 죽은 개가 어찌 감히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을 저주합니까?
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게 해 주십시오.”
10 그러나 임금은 “츠루야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있겠소?”
11 그러면서 다윗이 아비사이와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12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13 다윗과 그 부하들은 길을 걸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2-3.4-5.6-8ㄱㄴ(◎ 8ㄱㄴ 참조)
◎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 주님, 저를 괴롭히는 자들 어찌 이리 많사옵니까?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하느님이 저런 자를 구원하실까 보냐?” 저를 빈정대는 자들 많기도 하옵니다. ◎
○ 주님, 당신은 저의 방패, 저의 영광, 제 머리를 들어 높이는 분이시옵니다. 제가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으면,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시나이다. ◎
○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기에, 누워 잠들어도 나는 깨어나니, 나를 둘러싼 수많은 무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일어나소서, 주님. 저를 구하소서, 저의 하느님. ◎
복음 환호송
루카 7,16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참조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디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사람들의 삶을 자꾸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갔습니다. 그를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이마저도 부수어 버리고,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쳤습니다.
이렇게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이 되었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족쇄와 쇠사슬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게 이르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어서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에게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제야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게라사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다고 하여도, 이 일 때문에 생계에 가장 필요한 돼지 이천 마리가량이 죽어 속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사실보다도 당장 먹고살 문제에 마음이 쓰일 뿐이었습니다.
생계와 생명은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는 낱말입니다. 생계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참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계와 생명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