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래임 묵상. 열왕기하 11장 "단 위인가? 성전 문 기둥 곁인가?"
- 권도근 목사
14 보매 왕이 규례대로 단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셔 섰으며 온 백성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부는지라
고작 7살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왕위에 오르며 가장 먼저 율법책을 받습니다. 이는 유다의 왕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선명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율법책을 받고 요아스는 규례대로 단 위에 서서 왕위 등극식을 갖게 됩니다.(왕하11:14) 그런데, 여기서 매우 특별하고도 중요한 장면은 “규례대로 단 위에 섰다”는 겁니다. 그런데 병행본문인 역대하 23장에선 요아스가 즉위식을 가진 장소는 단 위가 아니라 ‘성전 문 기둥 곁’이라고 합니다.
(참조. 대하 23:13) 보매 왕이 성전 문 기둥 곁에 섰고 지휘관들과 나팔수들이 왕의 곁에 모셔 서 있으며 그 땅의 모든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불며 노래하는 자들은 주악하며 찬송을 인도하는지라 이에 아달랴가 그의 옷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
열왕기의 기록과 병행본문인 역대하의 기록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단 위든, 성전 문 기둥 곁이든, 그게 무슨 대수냐 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대숩니다. 둘 중 뭐가 맞을까요? 역대하 23장의 기록이 정확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장면에서 참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 성경은 번역을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NIV KJV영어성경 번역본은 열왕기하 11:14절을 'standing by the pillar', 'the king stood by a pillar'로 정확히 번역했고, 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공동번역 같은 다른 번역본들 역시 ‘성전 기둥 곁’이라고 정확히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왕위 등극식에 오르는 왕이 서는 자리가 ‘성전 기둥 곁’이어야만 할까요?
이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야긴과 보아스란 두 기둥 말입니다. 보통 기둥이란 건물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지만, 야긴과 보아스 기둥은 성전 입구에 그냥 장식품처럼 서 있는 구조물입니다. '야긴'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두 기둥은 이 나라를 세우는 분은 누구시며, 이 나라를 지키고 보존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매일 성전을 드나들며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아스가 오늘 율법을 받으며 '그 기둥 곁에 서서' 유다의 왕으로 왕위 등극식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참된 주인이 누구시고, 이 나라를 세울 뿐 아니라 보존하시는 분이 누구심을 오늘 세워지는 '너 왕이여!', 그리고 오늘 그를 왕으로 세우는 '너희 백성들이여!' 너희 모두는 절대로 잊지 말라!!"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준엄한 선포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게 아달랴의 악한 세상에서 성전에 숨어 지내던 7살 꼬마 요아스는 결국 다윗의 혈통을 이어갈 유다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20절). 그 결과 아달랴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온 나라는 기쁨과 평온을 누리게 됩니다(21절).
온 나라의 기쁨과 평온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일까요? 악녀 아달랴의 통치가 끝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7살 꼬마를 왕으로 세우고 안정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의 씨를 통해 다윗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히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달랴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해답은 요아스가 아니었습니다. 요아스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누가는 참 다윗의 씨, 영원하신 왕이 오실 때 이 세상은 이렇게 될 것이라 기록했습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계획은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비록 악이 너무 강하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만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며 그 왕을 굳게 의지할 때 우리의 삶에는 기쁨과 평온이 가득할 것입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