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와 역사 강의 녹취(12)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를 읽고(3)
13.<그리고 폭력도 존재할 수 없다. 철저하게 비폭력적이다.>
물론 이 말들을 요 부분에 대해서 제가 요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기 때문에 요즘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요 부분이거든요?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라서 제가 같이 책을 읽자, 같이 책을 읽을 제목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르네 지라르는 사람이, 르네 지라르라는 사람이 요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풀었습니다. 요 문제를 풀었습니다. 폭력문제. 왜 폭력이 일어나냐. 그 폭력이 왜 일어날까 하는 문제를 이 분이 풀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보자 한 겁니다.
그 사람이 뭐라 했느냐 하면.. 읽어보십시오.. 그 사람이 뭐라했냐 하면 인간이 욕망한다는 건데 그 욕망하는 것이 그냥 욕망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이웃이 가진 것을 탐내더라 말입니다. 이웃이 가진 것을 가질려고 한단 말이죠. 내 혼자 욕망이 안 일어나는데 이웃이 생기는 즉시 비교 대상이 생길 때 그 순간부터 이제 그것을 가지고 싶고 그와 같이 될려고 하고 하면서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둘 사람이 있을 때는 그 두 사람에 일어나고 세 사람 있으면 세 사람에서 일어나고 네 사람 있을 때 네 사람사이에 일어나고 다섯 사람 있으면 다섯 사람사이에 일어나고 막 일어날 것 아닙니까 그런 게. 나중에 이런 것들이 걷잡을 수 없게 될 때 이 사람들이 그 걷잡을 수 없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희생양 제도’를 만들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희생양 제도’ 를 만들면서 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우리는 선하고 모든 것을 덮어씌운다는 겁니다. 이 사람을 죄인으로 해서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선함을 널리 알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서로 가질려고 했던 욕망이 잠시 수그러드는 겁니다. 이 사람을 죽이므로 해서.
그런데 이 르네 지라르 라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안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 안했냐하면 십자가를 보니까 예수님은 의인인데 오히려 희생양은 죄인이 아니고 오히려 죄로 덮어씌어져서 억울하게 죽은 의인이다 하는 겁니다. 죄인은 누구냐 하면 죽인 이 사람들, 이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르네 지라르는 뭐라했냐하면 요 죽일려고 하는 요 행동, 요 욕망 요것을 뭐라했냐 하면 사탄이라 하는 겁니다. 요런 것을 모아놓은 총체, 그것을 사탄으로 볼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사탄이 그런 움직임이라는 겁니다. 그런 움직임의 이름을 사탄이라고 정한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 얘기는 십자가의 피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그 분의 피입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기까지 그 분이 얘기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했는데, 여기까지 한 얘기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의식을 그 안에 담겨 있어가자고 제가 3월달에 읽을 책으로 선정했습니다. 사보셔서 그 책을 읽어보시면 진짜 내가 생각 안 했던 부분이 다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십계명 끝부분 있잖아요. 제1계명부터 제9계명은 짧거든요? 제10계명은 억수로 깁니다.
그 긴 내용이 제10계명이 그 앞에 것을 축약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보면 뭐 이웃집의 아내부터 시작해가지고 소 등 다 다른 사람의 소유입니다. 그거를 그걸 가질려고 하지 마라는 얘깁니다. 예수님 편에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거기도 이 분의 입장에 의하면 내 이웃의 것을 자꾸 탐내니까 거기에 대한 그게 근원지니까 그것에 대한 이 사람이 하나의 고발을 하는 겁니다. 이 분이 본 겁니다. 아주 대단한 사람이고 작업이라고 저는 보아집니다.
그렇다 하면 ‘철저하게 비폭력적이’어야 된다 하는 것이 이 사람에 의하면 욕망이 없어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없어야 되죠. 없앨 수 있느냐 하는 부분. 도대체 어떻게 없앨 수 있냐. 만약에 로핑크 신부에 의하면 없앨 수 있느냐 보다도 없다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없다, 없다 교회는 폭력이 없는 거다. 왜? ‘대조사회’니까. 사회 자체는 있습니다. 사회라는 것은 폭력으로 점철되어진 역사 아닙니까. 사회라 하는 우리 세계의 역사가. 역사 내내 전쟁하고 싸우고 죽이고 하면서 왕조가 생성되고 또 새로운 신입생이 이어온 것 아닙니까.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그러니까 제가 어제도 얘기한 것처럼 계속 그 싸움입니다. 열방과 다르다 이스라엘이 열방과 다르다 하는 것은 폭력적이지도 않다 하는 거에요 어떤 면에서.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꾸 폭력적이거든요? 왕이 세워진 것으로 자꾸 폭력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이 외치는 것 아닙니까. 왜 자꾸 구타하느냐, 힘없는 자를 왜 그렇게 하느냐, 그건 하나님의 은혜체제를 자꾸 부서뜨리는게 아니냐. 이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한 겁니다.
르네 지라르는 오늘날에 있잖아요? 교회라는 것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교회 요즘 교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에요. 요즘 교회를 보면 현실교회를 보면 내내 싸우거든요? 신문이라든가 이런 것을 보셨겠지만. 장로님이 칼질 당하시고 이것은 무슨 이걸 교회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힘을 누가 가질려고 하는 주도권 싸움아닙니까? 요즘 목사와 장로 사이의 싸움 아닙니까? 목사님의 힘, 장로님의 힘 싸움. 내내 분열하듯이 이유가 다 그것 아닙니까. 힘을 소유해가지고 힘을 누가 소유하느냐 그 힘 소유할려고 하니까 예배당 소유주를 누구로 할 거냐 땅 누구꺼냐. 이것 때문에 내내 싸우는 것 아닙니까.
저쪽에 저 시지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장로님이 칼로 찔리고 이래 했던 그 교회도 매나 마찬가지. 그것도 설교 끝나고 광고시간에. 이런 문제가 한 예가 아니고 울산에 있는 어떤 교회같으면 목사님이 여성도하고 기도원에 가가지고 같이 누워있었답니다. 아무 일도 안했는데 교인들이 덮쳤단 말이죠? 사건 현장을 덮쳤단 말이죠? 그래가지고 노회에 제소해서 목사가 잘렸단 말이죠.
그래서 목사는 도망가가지고 서울에 가 있다가 내려와 가지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해가지고 또 목사님이 세상법정에다가 법원에다가 그걸 제소했는데 법원에서 판정이, 노회에서는 임시목사를 파송했을 것 아닙니까, 임시목사는 설교 못한다 우리 지방법원에서 임명하는 목사를 거기에 하도록 하겠다 하는 것이 이게 그 쪽 법원의 판결문입니다.
이게 무슨, 이걸 뭐라해야 될지, 이걸 교회라 해야 될지 뭐라해야 될지 좀 황당한 일들이란 말이죠. 오늘날 교회들 싸움을 보면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14.<용서와 나눔만이 있어야 한다. 또한 재물을 초월한다. 돈으로 움직이고 힘을 얻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아 주심으로 사는 공동체이다. 새로운 가족이다. 하나님이 아바 아버지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고 철저하게 서로가 함께 행하는 공동체이다.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고 ,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고,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고, 서로 대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의 대조사회로서, 또는 빛과 소금으로서, 또는 산위의 도시로서 종말론적인 새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그리고 교회를 하나님의 대조사회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스스로 달성하는 성덕이 아니요, 투쟁적 노력과 도덕적 공적이 아니라, 무법자를 의롭게 하시고 실패자를 용납하시며 범죄자와 화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이다.
즉 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용서받은 자리에서 한없는 희망이 자라나는 그런 교회, 갈라진 틈이라고는 다시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온갖 골짜기들을 뛰어 넘으며 화해에의 길을 찾는 그런 교회, 분쟁이라고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분쟁이 여느 사회에서와는 달리 해결되는 교회, 십자가와 고난의 역사라고는 또 다시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되 또한 그 분과 함께 일으켜지기에 거듭 새삼 부활절을 경축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평가@ 본 저서는 대조사회로서 교회의 모습이 “성품”적이라는 사실과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한 목표이며 의지라는 것을 나타내 주었다. 하지만 교회의 “자라남”과 “기다림”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요 부분은 뭐 평가부분은 박영선 목사님의 [교회란 무엇인가]와 대조해서 비교해 볼 때 그런 차이점이 있다 하는 설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