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자 구원받은 자(눅17:11~19)
오늘은 교회절기상으로 추수감사절입니다.
어떤 분이 그럽니다. ‘목사님 우리는 이제 농사도 하지 않는 데 구약의 추수감사절을 꼭 지며야 합니까?’그러나 감사는 물질이 생겼기에, 내가 원하는 일이 잘되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15절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같은 나병환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씀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감사란 나의 삶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감사 생활을 정말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가요?.
본론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이제 마지막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 두고 있는 어느날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에 위치한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이러난 사건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신을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10명의 나병환자를 보셨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자들이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한 마디로 비참합니다. 나병환자를 구약 성경에서는 ‘쫘라아드’라고 하는데, 이는‘매, 회초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나병을 하나님이 때리시는 병이라고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이것을 ‘천형병’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늘이 내린 형벌의 병이라는 말입니다. 나병은 무서운 전염병이며 저주받은 병이었습니다. 괴로움과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눈썹과 머리카락이 빠지다가 3기가 되면 코, 귀,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서 사람의 모습이 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에 악취가 심하여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뿐만아니라 가족들과 동거할 수 없어 동네 밖으로 쫓겨나서 분리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이 병에 걸리면, 옷을 찢고 머리카락을 풀고 부정하다고 외치며, 마을에서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부정한 병으로 규정했고 접근을 막았던 것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이들이 주님을 만나기는 만났지만, 멀리 서 있었던 것은, 환자로써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한 채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습니다.
13절 같이 읽습니다.“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사람들로 부터 버림받은 이 나병 환자들의 피 뭍은 절류를 듣고 예수님이 말씀 합니다.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당시에 법에 의하면 문둥병은 제사장에게 가서 사실 확인을 받아야 됩니다. 낳았다는 것을 확인 받아야만 됩니다. 그래야 격리된 곳에서 빠져나와서 자기 가족과 마을공동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사장의 가서 네 몸을 보이라’는 말은 내가 너를 이미 고쳤으니 이제 가서 사회적인 공인을 받고 건강하게 살아라 하는 축복의 말씀인 거죠.
그 말을 듣고 가다가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다 치료가 된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치료자이십니다. 주님은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순간에 사람들의 반응이 좍 갈라지는 거죠
그 10명 중에서 오직 한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병에 나온 걸 깨닫고 너무 놀라고 감격해서
15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어 하나님, 질병이 나았습니다’ 라고 감격해 합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놀라고 감격하며 어떻게 했느냐? 16절“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는 자신의 문둥병이 나았음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돌이켜 예수님 앞에 와서 무릎 꿇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 흘리며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그 한 사람을 바라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17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9명은 어디갔냐?
열 명이 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경험하였건만 어찌하여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표할 수 있는지 통탄해하시는 예수의 심정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인데
만남과 치유는 있었지만 경배와 감사가 없었던 사람이 무려 90%나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 당연히 이 처럼 나와야 되는데 아홉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 아홉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어디가 있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추론이 있는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유형/ 내가 정말 다 나은 걸까, 내 느낌은 그렇지만 실제로 치료 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그러므로 일단 한번 가서 확인해 보자. 더 확실한 객관적인 증거를 추구하는 유형입니다.
2.유형/ 다 나앗다 할지라도 지금 내 꼴이 얼마나 초라한가? 문둥이 옷에다 거지꼴인데 이 모습으로는 안되지 깨끗하게 씻고 예절을 갖춘 다음에 찾아뵈어야지 하며 감사를 뒤로 미루는 유형이 있습니다.
3.유형/ 예수라는 분이 과연 낫게 하신 걸까 그분 한마디 말씀에 내가 치료 된 것일까 나을 때가 되어서 난 것이 아닐까 치료를 합리화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4.유형 /그분이 나를 낫게 했다고 할지라도 그 분이 나를 위해 한게 뭐지? 여기까지 오기를 했나? 손을 들어 안수를 했나? 가서 제사장들에게 보이라
멀리서 이 말 한 마디 밖에 해 준게 없지 않은가? 은혜를 축소하는 유형이예요.
마지막으로 5.유형 / 다시 가서 고맙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렇게 하다보면 귀찮고 시끄러워 질 테니 혼자 속으로 감사하지 뭐 마음속으로 감사를 처리하는 유형이예요.
다시 말하면 아홉 명의 치료받은 나병환자,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핑계는 다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치료해 주신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감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참 간사합니다.
급하고 힘들 때는 나와서 울고불고 간절히 매달리는데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나 몰라라 하고 내 힘으로 된 것 같고, 다 하나님은 왜 잊어버리고 자기 길로 사라진다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런 말입니다.
열 명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즉시 온전히 기쁘게 왔구요 .10%
마음의 진심으로 전 인격적인 감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열 명이 다 치료가 됐는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이 질문 속에 배은망덕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서운함과 분노가 들어 있는 거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본문이 오늘 이 시대 우리 국민들과 교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사하지 않는 것이냐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살아오면서 어찌하여 엎드려 감사하지 않고 세상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냐’ 하는 음성이지요.
너희들이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냐?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냐?
그렇다면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 없는 인생을 향한 주님의 서운함과 분노를 볼수있는데. 바로 ‘열 명이 다 치료가 됐는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에 잘 나타나 있어요.
우리는 너무도 욕심이 많고 너무도 교만하고 너무도 생각이 없고.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라도 살 수 없는 존재들인데, 이 나라국민들도 교회와 성도들도 똑같이 감사가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다 자신의 힘으로 한 것 같이 착각하고, 끝없는 욕망의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아홉 명처럼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하는 자가 없는 거예요.
주님은 이제 시선을 돌려서 감사하는 그 한 사람을 주목하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18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패역함을 보인데 반하여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께 나옴으로 인하여 결국 유대인에 앞서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인데. 본문은 의식적으로 불결하다고 여겼던 이방인밖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다는 사실이 강조합니다. 주님은 이 사랑의 감사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18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 외에는 열 명 중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매우 잘 표현된 것이지요.
19절“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그랬어요
예수님 나를 치유하시고, 나를 치유자로 쓰시고, 나를 통해 치유되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했으니 감사행위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여, 왜 감사가 믿음이지요?
여러분 믿음의 본질이 뭐죠? 사랑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하고 받아드리는 게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예요.
감사가 왜 믿음의 본질인가요?
감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고 나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은혜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나보다 더 높으신 분의 은혜 속에 내가 살고 있다 화답하는 믿음이 감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 또한 ‘감사는 믿음의 일 뿐 아니라 구원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 어떻게 감사가 구원이 될까요?
리차드 포스트라고 하는 분은 말했습니다. ‘감사 할 때에 그 영혼은 구원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나를 작아지게 합니다. 욕심과 교만으로 인하여 부풀어졌던 내 존재를 자기 자리로 돌아오도록, 제 위치로 돌아오도록 치료하는 능력이 감사 속에 있기 때문에, 빗나간 인격이 치료되고 구원받는 비결이 바로 감사에 있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나를 구원 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을 구원 하는 겁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감사 때문에 구원을 받느냐하면?
자기의 진실함을 인정받으면서 그의 영혼이 소생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맨발 걷기 하던 장소가 있습니다. 아침에 가면 너무 지저분 해져있어요. 제가 빗자루로 씁니다. 보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수고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제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만 둘까 하다가도 용기와 새 힘과 위로를 얻을 것이고 그 일을 지속할 힘을 얻잖아요.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 힘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힘든 줄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상대방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 내가 구원되고 상대방이 구원받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내가 망하는 것이고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속에서 감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거예요,
감사 할 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가 살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 나아가서 감사는 영적인 구원을 완성시킵니다.
나병에서 놓임 받아 육체적으로 해방의 은혜는 열 문둥병자 모두가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치료받은 아홉의 나병환자들은 자기의 길로 갔습니다. 그걸로 끝이에요.
이는 육체적 구원이 반드시 영혼의 구원과 동일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를 영접하고 그와 더불어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지요. 영혼의 구원은 단지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 명 가운데 단 한명만이 이 은혜를 누렸다는 사실은 복음의 은혜를 접하기는 하나 영혼구원에까지 이르는 자는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요,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한 이 사람은 주님을 일대 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한 명은 감사라는 것을 통하여 그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구원을 받았음을 스스로 확증하는 것이었지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일전에 여수 애양원에 갔었는데 손양원 목사의 9가지 감사라는 글귀를 보고 감동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감사하는 내용을 보면 참 감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오게 하시는 감사합니다.
2)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가게 하시는 감사합니다.
3) 하나도 감사한 데 두 명의 순교자를 주시는 감사합니다.
감사의 옷을 입으면 혁명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혁신적 인생의 변화가 일어날 예고가 감사라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시작하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지금 우리나라는 급속도록 감사가 없는 사회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주 정신적으로 피폐해 져가고 있습니다.
복을 차버리고 있는 거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엎드려 감사하는 사람이 있나요?
모두가 은혜를 받으며 살지만 진짜 엎드려 감사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입니다.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이 적어져 가는 거죠.
감사절을 지키면서 우리는 문둥병자처럼 저주 받은 인생이었지만 주의피로 구원받고 축복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잊어버린 아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삶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