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건너 거리에 커피 전문점이 생기는 동안 서점이며, 음반가게가 퇴출됐단 소리는 새삼스럽다. 심지어 골목 어귀에 불법 테이프 가득 싣고 뿅뿅 사운드 날리던 리어카도 드물 정도. 길 가다 짝사랑의 추억 담긴 노래를 듣고서 그 자리를 맴도는 것도 옛말이 됐다. 한국음반소매상협회에 따르면 근 10년간 음반가게의 수는 8,000여 개에서 350여 개로 줄어, 4%가 살아남았다. 교보문고가 모회사인 핫트랙스나 굵은 음반유통사 신나라 레코드 등은 규모상의 이점과 다양한 마케팅 전략으로 살 길을 살펴왔다. 하지만 음반가게에 대한 막연한 향수나 음악가란 직업적 사명에 젖어 달랑 가게를 낸 주인장들에게 쇼케이스며 팬사인회가 웬 말. ‘그 따위’는 안 할 만한 똥고집의 소유자들은 대신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취미를 살려 음반을 추려내고, 특이한 공간을 조성해 사람들을 유혹한다. 혹은 그저 변치 않는 꼿꼿한 자존심으로 버틴 명물 음반가게도 있다. 변하든 고집을 부리든, 이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는 “판은 돌아가야 제 맛”이라는 거. 버튼 하나로 쉽게 시작하고 끝나는 MP3파일 따위는 흉내 낼 수가 없다. 지지징 지지징 판 도는 소리가 지겹지만 정겨운, ‘살아남은’ 아날로그 음반가게를 찾아 나섰다.
아날로그 음반을 위한 전문적 공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려서면 번잡한 풍경에 놀란다. 이곳은 4주년 기념 할인행사를 벌이고 있는 클래식 전문 음반매장 풍월당. 방문한 날짜가 할인행사 마지막 날이니 북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성은 실장의 말은 이렇다. “평소에도 사람이 적진 않은 걸요.” 풍월당은 국내 최초 클래식 전문 음반가게라는 이름으로 2003년 문을 연 뒤 음반시장의 흐름을 역행해왔다. 그때보다 “요즘이 더 잘되고 있기 때문” 이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오페라 칼럼니스트인 박종호 씨가 운영하는 이곳은 국내외 클래식 음악가들이 다녀가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올해 말까지 이어지는 ‘모차르트 오페라 22작품의 전곡 해설회’ 같은 프로그램과 음악 감상실을 따로 운영하는 등 전문적으로 클래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가게는 악기별, 오페라별, 작곡가별 등으로 섹션이 구분돼 있다. 입구의 카운터는 클래식의 단아한 이미지와는 다소 상반되는(?) 여자 직원들이 꿰차고 있는데, 통칭하여 ‘풍월댁’이다. 음반 진열대에 붙은 ‘설운도를 닮은 베토벤 아저씨!’, ‘여태 안 들어 보셨나요?' 같은 농 섞이고 재미있는 클래식 지침 카드들은 그녀들의 손길이 닿은 것. 클래식 초보자들을 “이끌고, 가르치고, 즐겁게 하는” 풍월당만의 비법이다.
세종문화회관 건물에 자리 잡은 오퍼스9은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클래식 전문 음반매장으로 풍월당의 후발주자를 자처한다. 공연이 상시 열리는 곳에 자리한 점을 최대한 활용해 공연과 관련된 음반을 꾸준히 들인다. 창가에 놓은 의자와 클래식 서적들은 앉아서 감상에 빠져보기 좋은 장소다.
이런 클래식 전문 음반가게를 보고 그걸 재즈화해 재즈 전문 음반가게를 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 남자의 재즈일기>의 저자이자 재즈 칼럼니스트인 황덕호씨다. 그가 홍대 근처의 골목에 차린 ‘애프터 아워스 After Hours’는 눈에 띄진 않지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있다. 작은 음악 감상실이 있고 ‘Jazz People’ ‘MM Jazz’ 등의 재즈 전문지와 각종 음악 무가지들이 그득하다. 재즈 전문가들만 갈 수 있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2만 장이나 되는 음반들은 초보자들부터 애호가들까지 넓은 취향을 아우른다. 올해 들어서는 온라인 사이트까지 개설했다. 황덕호 씨는 “시작할 때 욕심이 작았으니 이만 하면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라고 허허 웃는다.
싼값에 드려요 신촌 기차역에서 이대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꽤 시끄러운 곳이 있다. 내놓은 좌판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고 그 위로 라운지 음악이 흐른다. 올려다본 빨간 간판에 퍽 어울리게도 쌈바닷컴이라 씌어 있다. 온라인 매장과도 연결 지을 만한 이름이지만 사이트는 없단다. 아니 없어졌다. “온라인 장사가 생각보다 잘 안 돼서” 라는 게 사장님 설명이다.
대신 쌈바닷컴이 취한 방법은 싼값에 좋은 물건을 푸는 것이다. 음악을 열렬히 좋아했던 그가 사들인 수입음반 4,000장과 일본의 연고지를 거쳐 온 일본음반 1,500장, 그밖에 수집가들이 내놓은 중고 음반까지, 4평 남짓의 가게 안을 빼곡히 채웠다. 쿠바, 브라질을 비롯한 월드음악과 일본음반, 가요 신보까지 다양한 음반들을 1만 원 내에서 구입 가능하다. 그런데도 매출이 예년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 사장님은 음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아쉽지만 일단은 “음반을 푸는 데까지 풀겠다”고 하니 이때 냉큼 챙겨두는 것이 음악 팬의 도리다.
끝나지 않는 LP의 추억
장마가 이어지는 날이면 턴테이블에 음반 하나 척 걸어놓고, 커피 한 잔 마시는 상상.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80년대 한두 집이 들어서기 시작해 10곳 이상 남은 회현상가 LP가게들은 용케도 여전히 버티고 있다. 리빙사, 종운 음악부, Pastel 등 늘어선 가게들에는 빈 공간 없이 LP들이 진열돼 있고 친절하기보단 투박한 대꾸를 하는 할아버지들이 자리를 지킨다. 판매량이 많거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것은 아니지만 부러 찾아오는 손님은 있게 마련. 돈을 벌기보다 수많은 LP들과, 회현상가와, 세월과 함께해온 할아버지들은 그게 좋다고 하신다.
아현동에 있는 중고 음반매장 33rpm의 매니저 김영찬 씨는 LP가게가 문 닫지 않는 이유가 ‘할아버지들의 옹고집’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최근 LP를 틀어주는 운치 있는 카페들이 늘고,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LP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 1994년에 중단된 이후 새로운 LP가 생산되지 않지만 6개월마다 새로운 턴테이블이 나오는 것은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33rpm은 내달 200평 규모의 매장을 열 예정인데 이것 또한 조심스런 LP 상승세를 염두에 둔 ‘투자’인 셈이다. 젊은 시절 여행을 하며 외국 음반가게들에서 음반을 사들이곤 했던 사장님은 이제 그 수많은 앨범들과 함께 뒹굴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요즘이 어떤 세상? 컴퓨터만 켜면 미니홈피며 블로그에서 배경음악이 흐르고, 마음에 들면 클릭 한 번으로 그것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음악이라고 들리는 게 다 같으랴. 젊은 날 발품 팔아 품에 안아왔다던 음반가게 사장님들의 보물 같은 소리에 비할 수 있을까. 전문화시키든 싸게 내놓든, 그저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든, 남아 있는 음반가게들을 지탱해주는 제일 큰 힘은 아날로그 사운드의 마력이다. 그러니, 이제 책상 속에 고이 쟁여둔 CD플레이어며 벽장 속에 먼지 낀 턴테이블을 꺼내 직접 확인해볼 때다. 무릇, 판은 돌아가야 제 맛이다.
사진 김진희
이수빈 기자